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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라 (samsara), 물 한 방울이 바다에 떨어지면

담마다사 이병욱 2009. 4. 16. 16:09

 

삼사라(samsara), 물 한 방울이 바다에 떨어지면

 

 

 

티벳의 자연 환경이다.

나무 하나 풀한포기 없는 척박한 환경이다.

 

 

 

티벳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거칠고 메마르고 장대한 산하와 짙푸른 창공의 이미지가 떠 오른다. 거기에다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매우 소박하고 궁한 이미지이다. 새끼줄에 매달린 듯한 울긋 불긋한 헝겁조각이 나부끼는 장면 역시 우리의 아련한 옛모습을 떠 올리게 한다.

 

삼사라는 티벳영화일까

 

이렇게 척박한 대지에서 살아가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다. 티벳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영화로도 소설로도 또는 특집 다큐멘타리로도 많이 나왔다. 따라서 그리 낯설지 않는다. 그런 티벳 이야기를 다른 또 하나의 영화를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보게 되었다.

 

영화 제목은 '삼사라(samsara)'이다. 우리 말로 '윤회' 라는 뜻이다. 지역적인 배경은 지금의 인도영역인 '라다크' 지방이고, 시대적인 배경은 현재이다. 이 영화의 특색은 원작과 각본과 감독이 모두 동일 인물로 되어 있다. 이름은 '팬 낼린(PAN NALIN)'이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대사가 모두 티벳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티벳영화라고 불러야 할까.

 

3년째 명상에 잠겨

 

해발 3500미터에 위치 하고 있는 라닥의 어느 수도원의 동굴에 한 승려가 고행을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타쉬'이다. 3년째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이다. 머리는 길어서 어깨 까지 내려 오고 손톱과 발톱은 마음껏 자라서 마치 동물의 그 것을 보는 것 같다. 이 때 고행기간이 끝나 감에 따라 그의 스승과 동료 승려가 동굴에 도착한다. 오랜 명상을 끝낸 타쉬의 손과 발과 온 몸은 거의 굳다 시피 하였다. 이런 그를 정성껏 씻겨 주고 손톱과 발톱도 잘라 주며 머리까지 깍아 준다.

 

 

 

5세때 절에 맡겨진 타쉬는 20년간 공부 하였고 또 3년간 동굴에서 고행명상 수행 하고 있다.

 

 

 

 

 

 

명상을 마치고 사원으로 돌아 가는 도중이다.

 

 

일행들이 그를 싣고 사원으로 돌아 가는 길에 폐허가 된 사원을 지난다. 거기의 돌 무더기에 쓰여진 문구를 우연히 주인공은 보게 된다. 그 돌에는 티벳어로 다음과 같이 씌여 있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폐허가 된 사원의 돌 무더기에 글이 쓰여 있다.

내용은 "어떻게 해야 한 방울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이다.

 

 

 

명상하느라 힘이 다 소진 된 타쉬의 눈에 비친 문구는 어떤 의미 이었을까. 무심코 보게된 문구 한마디는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예고를 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화두라면 화두인 셈이다.

 

수행후 온다던 자유와 금욕후의 만족감은 어디에

 

사원으로 돌아온 타쉬는 3년간 고행한 공로를 인정 받아 라마교 최고의 입문식에 참여하고 고위직까지 받게 된다. 그 행사날에 축제가 벌어지는 데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 하게 된다. 젊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광경이다. 생전 처음 그런 장면을 목격한 타쉬는 이후로 매사가 의욕이 없게 된다. 더구나 몽정까지 자주 하게 된다. 이것을 보고 그의 도반 승려의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아마도 이후로 전개될 험난한 인생여로가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도반 친구의 눈에 눈물이...

친구 타쉬의 앞날을 보는 듯 하다.

 

 

 

이렇게 갑작 스럽게 변화된 그를 위로 하기 위하여 사원에서는 마을 축제에 참여 할 것을 권유 한다. 그런데 마을 축제에서 운명적인 여인과 의 만남이 이루어 진다. 그 여인을 보고 나서 부터 모든 것이 뒤틀려지는 생활이 시작 된다.

 

 

 

 

운명의 여인

 

 

 

이런 현상을 눈치 챈 그이 스승이 타쉬를 어느 묵언 정진 중인 고명한 승려에게 보낸다. 그 승려는 동굴속에서 정진 하고 있었는데 타쉬가 오자 마자 알아채고 그림을 내 민다. 그림 속에는 남녀가 교합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약간 기울어 보면 해골로 변하는 신기한 그림이다. 모든 애욕이 허무 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 일 것이다.

 

 

 

 

남녀그림을 옆으로 기울이면 해골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리고  한자로 된 액자를 보여 준다. 그 액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세상에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

 

이 말을 듣고 타쉬는 부리나케 되 돌아 와서 그의 스승에게 따지 듯이 물었다. 부처님도 29세까지는 속세에서 사셨고, 깨우침도 속세의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5세 때 부터 속세를 떠나 부처님 같이 살아 왔지만 부처님 같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행후 온다던 자유와 금욕후의 만족감은 어디 있죠?"라고 반문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될 것도 있지만...포기 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죠" 라고 말하면서 사원을 떠나게 된다. 환속을 하게 된 것이다.

 

 

 

환속 하는 타쉬

 

 

 

범부 보다 못한 삶을 살아 가면서

 

떠돌이로 나서면서 찾아 간 곳이 전에 마을 축제할 때 눈이 마주 쳣던 처녀의 집이다. 추수할 때 까지 일을 도와 주기로 한 것이다. 결국 처녀와 결혼 하게 되고 함께 살게 되었다.

 

 

 

운명의 여인과 결혼식 하는 장면이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 아들도 한명 낳게 되었다.

 

 

 

 

 아들까지 낳고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한다.

 

 

 

그러나 세속의 일이라는 것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점철 된 곳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탐진치에 물들어 가는 타쉬는 수행자의 모습이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범부로 변하였다.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하여 일꾼을 줄이자고 말하는가 하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여자 일꾼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한다.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는 범부 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되는 타쉬.

 

 

 

이렇게 범부보다 더 못하게 살아 가던 그에게 어느 날 도반이었던 친구 승려가 방문 하였다. 스승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승의 편지를 전달해 주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난 삼사라를 향해 귀의 하게 됐구나 

우린다시

꼭 만날 것이다.

우리가 재회 하는 그날...

수천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게 더 중요한 지를 알게 되겠지

 

여기서 한가지 욕망은 아마도 불교의 최고 목표인 열반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편지를 받고 난후 타쉬는 반성 하게 된다. 수천가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살아 왔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 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승도 아니고 속도 아닌 어정쩡한 처지에서

 

아내와 아이가 잠든 사이에 타쉬는 집을 떠나게 된다. 마치 부처님이 야소다라 왕비와 아들 라훌라를 남겨 두고 떠나 듯이 새벽에 떠난다.

 

 

 

집을 떠나서 다시 출세간으로

 

 

 

그리고 다시 삭발 하고 승복을 걸친 모습이 되었다. 한참 길을 걷고 있던 중 어느 무너진 오래된 사원 앞에 다다르자 놀랍게도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야소다라 왕비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그 왕비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하여 질타 한다.

 

 

 

 

뒤따라온  아내의 이야기를 듣는 타쉬

 

 

 

당신이 불도를 사랑한 열정이 내게 보여준 사랑만큼만 강했어도..

당신은 지금 이 현세에서...

부처가 됐을 거예요

 

이 말 뜻은 무엇일까. 남자가 사랑에 대한 열정은 강했지만 정작 불도를 이루려는 열정은 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일 불도를 이루려는 열정이 강했다면 크게 깨달아서 부처가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디. 그러나 그렇지 못했고 탐진치에 찌들어서 평범한 범부 보다 못한 삷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타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만 아내는 염주가 든 단지를 남편에게 주고 가버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 타쉬는 절규 하게 된다. 땅을 뒹굴며 절규 하다 잠이 들게 되고 잠에서 깨어 나자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절규 하는 타쉬.

 

 

 

그 것은 자신이 3년간 명상을 마치고 난 후에 사원으로 가던 길에 보았던 바로 그 돌이었다. 그 돌에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고 쓰여 있었다. 이제는 승도 아니고 속도 아닌 어정쩡한 처지에서 그 돌의 문구를 바라보던 타쉬는 그 돌을 쥐어 들었다. 그리고 돌을 돌리자 글씨가 쓰여 있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에 대한 답이 돌의 뒷면에 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라고 쓰여 있다.

 

 

 

이 문구를 보고 타쉬는 짙 푸른 창공을 쳐다 보게 된다. 창공에는 독수리 한마리가 자유롭게 날 고 있었다.

 

윤회 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은

 

영화를 보고 남은 기억은 두 문장이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이다. 마치 화두를 보는 것 같다. 아무리 해석 해 보아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기 위해서는 바다에 던져야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다. '한 방울의 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영화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또 피 터지게 싸우는 장면도 나온다. 눈물이나 피나 또는 정액도 한 방울의 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런 한 방울의 물이 모이고 모이면 바다와도 같이 많게 될 것이다. 이런 비유를 부처님 이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피가 이럴진대 윤회 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 또한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 가 아닐 것이다.

 

영화 삼사라는 불교영화 일까

 

영화 삼사라는 불교적인 영화 일 수도 있고 반 불교적인 영화 일 수 도 있다. 5세에 절에 맡겨져 20년간 공부를 하고 또 동굴에서 3년간 고행수행을 한 수행자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이나 과도한 성행위 묘사 장면등은 분명히 반불교적인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세속에서 고락을 통해 무상 함과 괴로움을 맛 보고 결국은 열반으로 향하게 된다는 의미에서는 불교적인 영화라 볼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세상을 모르고는 도를 깨우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런데 세상의 경험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눈물과 피로 점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윤회 하면서 흘린 눈물과 피의 양이 5대양의 바다를 덮을 정도라면, 지금 흘린 눈물 한 방울과 피 한 방울은 바다에 떨어 뜨려 보았자 표도 나지 않을 것이다.

 

 

2009-04-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