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위빠사나 수행기 12]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09. 4. 12. 16:37

 

[위빠사나 수행기 12]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하여

 

 

 

 

 

얼큰한 라면 국물의 추억

 

선원에 가면 거의 저녁밥을 못 먹게 된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토요일 오후 6에 시작 되는 법문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적어도 1시간 반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겨울에는 그런대로 일이십분 여유가 있었으나 날씨가 풀려서 인지 거의 빠듯 하거나 지각 하기 일쑤이다. 그렇게 6 시작하여 인터뷰 시간이 끝날때 까지 3시간 반을 선원에 있다가 집에 오면 10 훌쩍 넘는다. 그러다 보니 저녁먹을 시간을 놓쳐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선원에서는 간단히 요기 할 수 있도록 김밥을 갖추어 놓았다. 그리고 일부 수행자들이 다른 수행자들을 위하여 빵을 보시 하여 놓기도 한다. 그래서 저녁을 못 먹는 대신에 허기를 때울 수 있는 것이다.

 

라면을 자주 먹지 않으나 얼큰한 국물 생각이 나면 먹고 싶어 질 때가 있다. 선원에서 돌아 와서 밥대신에 라면을 먹었다. 그런데 스프를 너무 많이 넣어서인지 몹시 짜게 느껴 졌다. 그 결과는 잠을 자면서 나타났다. 갈증이 난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 하게 된 것이 습관의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을 느꼈다. 과거의 얼큰한 국물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경험에 지배 받아 버린 것이다. 한번 먹고 싶다고 먹었을 때 좀처럼 제동이 걸리지 않고 그대로 실행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떠 오른 것은 인터뷰시간의 어느 나이 지긋한 여성 수행자의 말이 생각 났다.

 

고참수행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선원에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수준은 모두 다르다. 수행을 오래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마 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몇 년 된 사람 부터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은 사람들 까지 여러 근기의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수행을 하다 보니 인터뷰시간에 하는 이야기는 모두 제각각 이다. 그 중에서도 꽤 오랫동안 수행을 한 듯한 나이 지긋한 여성수행자의 이야기는 신참내기 수행자가 하는 말과 확실히 달랐다. 우선 얼굴표정 부터가 다르다. 신참내기 들은 어딘가 긴장 되어 보이고 얼굴이 굳어 있으나 오랫동안 수행한 사람들은 얼굴표정이 은은하고 온화하다.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도 매우 예의 바르고 공손함을 알 수 있다.

 

그 분이 하는 이야기 중에 알아차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참들이 주로 느낌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마도 느낌의 단계를 넘어선 알아차림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모로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한 마디로 자신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매번 그 의도를 알아차리려 한다는 것이다. 옆에서 진동벨이 끊임 없이 울렸을 때 짜증이 났었는데 짜증 내는 그 마음을 알아차렸다와 같은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 법사님은 반드시 수행중에만 알아차릴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매번 알아차리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반드시 과보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업을 지었으면 받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피해 갈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받을 것은 받고 새로운 업을 지으면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업을 짖기 위하여 수행이 필요 하다고 하였다. 왜 수행이 필요한가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관성에 의하여 살아 왔는데 그 관성을 멈추려면 알아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관성(慣性)에 의하여

 

사람들은 이제까지 자신이 만들어 온 습관에 의하여 살아 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심지어는 알면서 하는 경우도 있다.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이유는 이제까지 축적된 성향의 영향이 너무 커서 일 것이다. 그래서 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업에 그대로 휩쓸려 가는 것이다. 마치 홍수가 난 강물에 돼지가 떠밀려 내려 가듯이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알면서도 당하는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술이나 담배 그리고 온갖 감각적인 욕망등이 바로 그런 케이스라 볼 수 있다. 한번 습관이 들여 놓으면 여간 해서는 빠져 나오기 힘들다. 빠져 나오기 위해서 기도도 하고 108배도 해 보지만 그 때 뿐이다. 똑같은 상황이 닥치면 예외 없이 휩쓸려 가게 되어 있다.

 

바로 그때 마음을 보는 수 밖에 없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리게 되면 그 순간 만큼 시간을 벌게 된다. 시간을 번다는 말은 다른 생각이 일어 나게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두개의 마음이 일어 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결국 수행은 연습하는 것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칼을 빼어 들고 목을 치려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버려 두면 목을 치게 되겟지만 주변에서 무언가 한마디를 하면 그 순간 멈칫 하게 되고 결국은 칼을 내려 놓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마음도 바로 그런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관성(慣性)'에 의하여 또는 '()'에 의하여 움직이는 마음에 제동을 거는 것은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것'이다. 그 순간에 다른 마음이 일어나면 일단 모면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두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고 '찰라생' '찰라멸' '상속' 한다는 마음의 이치를 두고 한 말이다.

 

얼큰한 라면국물의 추억은 누구나 다 있다. 그 기억에 끄달린다면 누가 뭐라해도 라면을 찾게 되어 있다. 그 때 그 마음을 한번만 본다면 제동을 걸 수 도 있다. 마음에 제동 걸기는 연습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결국 수행라는 것은 연습하는 것이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하여.

 

 

2009-04-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