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불법승 삼보와 연기법을 회의 하는 어느 뇌과학자의 전도된 인식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09. 5. 10. 11:49

 

[위빠사나 수행기 13] 불법승 삼보와 연기법을 회의 하는 어느 뇌과학자의 전도된 인식을 보고

 

 

 

 

 

 

“영혼이나 마음이라는 것은 뇌의 작용에 불과하다”

 

어느 정신과 의사이자 뇌과학자의 주장이다. 불자인 그는 말하기를 부처님은 윤회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죽음을 편안히 받아 들일 수 있는 상태가 바로 해탈이고 열반이며 깨달음이라고 주장 하였다. 이런 회의적인 의심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회의론자가 되는 지 살펴 보았다.

 

어디까지 승가인가

 

흔히 불법승 3보라고 말한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을 3보라고 말하는데 스님이라고 해서 다 3보에 들어 가는 것일까. 삭발하고 승복만 걸쳤다고 해서 무조건 존경 해야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승()의 개념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승가(僧伽)

승가로 음역한 빨리어 상가(sangha)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인 집단을 뜻하며 불교에서는 좁게는 비구, 비구니의 승단, 넓게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의 모임을 뜻한다.

 

 

승가는 좁게는 비구, 비구니를 가르키지만 넓게는 비구, 비구니를 포함한 일반 재가신자도 승가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스님을 승가로 보고 3보의 하나로서 존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존경의 대상으로서의 스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한국불교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법맥을 전수 하여 인가 하는 방식으로 깨달음을 인정 하지만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명확히 규정 하고 있다.

 

범부와 성자를 가르는 기준은

 

천주교에서는 죽어서 성인이 되는 수 가 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이적을 행하였거나, 순교를 한 경우에 심사 하여 성인으로 추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살아서도 성인이 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성인이라는 말 대신에 성자라고 많이 쓰이고 있는데 빨리어로는아리야 뿟갈라(Ariya-puggala)’라고 한다.

 

그리고 성자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 말로 차례로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비록 지금 스님이라도 성자가 되지 못하였다면 범부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범부와 성자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초기불교에서 가장 큰 기준으로서 유신견(有身見)을 들고 있다. 유신견이 있느냐 없느냐로 범부와 성자를 구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유신견을 타파 하지 못하면 성자의 초보 단계인 예류자,  빨리어로 소따빤나(sotapanna)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유신견으로 대표 되는 족쇄(삼요자나, samyojana)를 끊지 못하면 천신과 인간, 재가자, 출가자를 막론하고 윤회계를 벗어 나지 못하는 개개의 인간들이란 뜻의 뿌투자나(puthujjana), 즉 범부의 단계를 벗어 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예류자가 되기 위해서는

 

범부와 성자를 가르는 가장 첫 단계인 예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객관적인 징표가 있어야 할까 크게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를 보고 있다.

 

 

첫째, 유신견(有身見)을 극복한 경지이다.

둘째.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을 극복한 경지이다.

셋째, 법에 대한 회의심을 극복한 경지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한 것은 단연 유신견이다. 유신견에 사로잡힌 범부들은 필연적으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단견은 단멸론에 대한 믿음으로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도덕적인 책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비존재에 대한 갈애의 대표적인 예라 볼 수 있다.

 

상견은 영혼이 다른 몸이나 보금자리로 옮겨 간다고 믿는 것으로 영원히 사는 견해를 말한다. 재생이 아닌 환생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거참나’ ‘주인공’ ‘본마음등과 같이 영원히 변치 않는 나가 존재 한다고 생각 하는 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는한 결코 열반 해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단견이나 상견 모두 전도된 믿음으로서 원인과 결과를 부정 하는 삿된 견해인 사견(邪見)’으로 규정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삿된 견해로는 윤회를 반복 할 뿐이며 결코 열반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대신에 불교에서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을 주장 하고 있다. 연기법을 아는 것이말로 윤회의 고리를 끊어 버릴 수 있고, 열반 해탈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겨자씨만한 유신견이 있어도 결코 열반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왜 의심 하는가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아마도 세번째인 법에 대한 회의심을 극복한 경지 일 것이다. 여기서 법이라 함은 대표적으로 불법승 삼보연기법을 말한다. 왜 의심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정말로 회의심을 극복 하는 것이 범부와 성자를 가를 정도로 커다란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빠띠짜 사무빳다, paticca-samuppada)교재를 참고 해 본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 의심 한다. 즉 자신이 모르는 사항에 대하여 잘 못 알고 있을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이런 의심은 전반적으로 자신의 지적수순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지적수준을 넘어 삶의 본성에 대해 추론 하면 처음에는 의심이 생기지만 나중에는 전도된 인식에 집착 하는 회의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이런 회의주의와 전도된 인식을 갖게 되면 불법승 삼보와 연기법에 대해서도 역시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심의 대표적인 예가 다음의 여덟가지이다.

 

여덟가지 의심의 내용은

 

첫째,부처님에 대한 의심이다. 이 것은 부처님은 실제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분이었을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맹목적으로 믿도록 한 보통사람이 아니었을까?”와 같은 의심이다.

 

둘째,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다. “도와 열반은 진정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을 보장 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다.

 

셋째,승가에 대한 의심이다. “진정으로 번뇌에서 벗어난 성자(아리야, Ariya)는 있기나 한 것일까? 전도된 인식과 의심을 극복한 예류자는 절대로 악처에 태어 나지 않는 다고 하는 데 과연 그럴까? 감각적 욕망과 성냄이 희미해진 일래자가 있는 것일까? 감각적 욕망과 성냄에서 완전히 벗어난 불환자가 있는 것일까?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아라한이 진짜 있는 것일까?”와 같은 의심이다.

 

넷째,수행에 대한 의심이다. “계를 지키고 관찰 하는 수행은 더 높은 영적인 진보에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는 데 과연 그럴까?”하고 의심 하는 것이다.

 

다섯째,과거에 대한 의심이다. “나는 과거에 존재 하였을까? 나는 과거에 왜 어떻게 존재했을끼? 나는 전생에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나는 덩어리에서 생겨 났을까? 아니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 났을까? 와 같은 의심이다.

 

여섯째,미래에 대한 의심이다. “나는 죽고 나서 존재 할 것인가? 내생에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와 같은 의심이다.

 

일곱째,과거와 미래 모두에 대한 의심이다. 복주석서에 따르면 이 의심은 삶의 수레바퀴의 과거와 미래 가운데서 현재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니까야의 말씀과 일치 한다고 한다. “이 현생에서 자아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그러한 의심에서 다음과 같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나는 진정 나 자신인가? 자아는 존재 하는가? 존재 하지 않는가? 만약 존재 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자아인가? 그 것은 큰가? 작은가? , 어떻게 자아가 존재 하는가? 그 것은 창조 되었는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는가? 자아는 어디서 왔으며 마지막에 몸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과거에 대한 다섯가지 의심, 미래에 대한 다섯가지 의심, 현재에 대한 다섯가지 의심을 나타낸다. 수행자는 자아나 나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 날 때 이러한 모든 의심들을 극복 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덟째,가장 중요한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다.“상카라()는 정말 참된 법에 대한 무명에서 비롯 된 것일까? 재생은 정말 업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 나는 것일까? 정말 내생의 악업은 해롭고, 선업은 유익할 것인가? 모든 현상에 정말 원인이 있는 것일까?”와 같은 의심이다.

 

이상은 마하시 사야도의 의심에 대한 견해를 요약해 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회의주의들의 의심에 대해서이다. 즉 그들의 의심은 자아가 있다는 사유에 해당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유는 머리속에서만 생각 하는 희론이 되고 만다. 결국 이런 이런 지적희론에서 탈피하여 몸과 마음을 성찰 하여 괴로운 그 순간을 보아야 한다. 화살을 맞았으면 화살을 뽑아 내는 것이 급한 것이다.

 

어느 뇌과학자의 전도된 인식을 보고

 

범부와 성자를 가르는 기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성자의 초입 단계인 예류자의 경우 다섯가지 족쇄를 풀어야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신견이다. 겨자씨만한 유신견이 있어도 결코 열반 해탈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법에 대한 의심이다.

 

불법승 3보와 연기법에 대한  의심은 기본적으로 지적수준과 관련 되어 있다. 자신의 지적수준을 넘어 추론 하면 처음에는 의심이 생기지만 나중에는 전도된 인식에 집착 하여 회의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하여 의심하고,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고, 성자에 대하여도 의심 하게 된다. 결국 불교의 가장 기본인 연기법도 의심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보다 먼저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의 말이라면 믿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의식수준에 맞추어 사유 하다 보면 희론이 되고 결국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회의주의자가 될 것이다.

 

어느 정신과 전문의이자 뇌과학자는 영혼이나 마음은 뇌의 작용에 불과 하고, 깨달음 역시 뇌의 상태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윤회는 실체로서 파악 해서는 안되고 기능으로 파악해야 된다고 말한다. 즉 심리적 윤회로 파악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불교에서 말하는 단견, 즉 죽으면 끝이라는 단멸론(斷滅論)’에 해당 되고 넓게는 유물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것은 대표적인 법에 대한 의심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전도된 인식은 결국 불법승 3보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 질 수 있고 외도의 주장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사성제가 12연기이고, 12연기가 사성제

 

불교의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로 집약된다. 이처럼 사성제는 불교의 초석이라 할 수 있으며 깨달음이란 바로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나는 알아야 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 깨달은 사람이노라(상윳따 니까야, SN558)

 

 

 사성제는 괴로움(현실)을 철절히 알고(빠린냐, parinna), 그 원인인 갈애를 제거하고(빠하나, pahana), 괴로움의 소멸(열반)을 실현(사치끼리야, sacchikiriya)하고, 그러기 위해서 팔정도를 수행 하는 것(바와나, bhavana)이라고 요약 할 수 있다. 그리고 고성제와 집성제는 12연기의 순관(유전문)과 동의어이고, 멸성제와 성제 12연기의 역관(환멸문)과 동의어이다. 따라서 사성제가 12연기이고 12연기가 사성제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맞물려 돌아 가고 있는 것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다.

 

믿을 만 하기 때문에 믿는 것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볼 수 있는 연기법은 필연적으로 윤회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 설령 부처님이 직접적으로 윤회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윤회의 개념을 도입 하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연기법을 의심하고 회의 한다는 것은 그릇된 견해와 무지에서 비롯 된다고 볼 수 있다. 연기법을 분명하게 이해 하는 사람이라면 전도된 인식은 말 할 수 없고 의심도 갖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보다 지적 수준이 높고 먼저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의 말이라면 믿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에 대하여 범부들은 알 수 없다. 마치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인간과 개의 인식범위가 서로 다른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교리는 천지창조론과 같은 유치원 동화수준의 교리와 달리 매우 치밀하고 과학적이다.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유일신교와 달리 고도의 이성적 사유와 깨달음으로 탄생된 것이 법이다. 그런 법은 믿을 만 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따라서 범부 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고 훨씬 더 많이 인식 하였을 성자의 말이나 부처님의 말이라면 일단 믿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2009-05-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