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영어이름 아난과 다문제일 아난다, 여시아문의 니까야는 붓다의 명령

담마다사 이병욱 2009. 4. 20. 19:38

 

[위빠사나 수행기 13] 영어이름 아난 (Anan)과 다문제일 아난다, 여시아문의 니까야는 부처님의 명령

 

 

중국인들의 이름은 우리나라 이름 보다 더 읽기가 어렵다. 그래서 해외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은 성 앞에 잉글리시 네임(English Name)을 주로 사용 한다.

 

중국인들의 영어이름을 보면

 

비즈니스 관계로 알고 지냈던 중국인이 있었다. 그의 한자식 이름을 우리나라 식으로 읽으면 '궁금강(宮金鋼)'이다. 중국식 발음으로는 '공진강' 이겠으나  그의 명함에는 '제임스 공(James Gong)'으로 되어 있어서 보통 '제임스'라고 불렀다. 이렇게 잉글리시 네임을 사용 하는 사람들은 주로 영업 파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외국인을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은 한자음이 들어간 이름을 그대로 표기 하거나 영어의 이니셜을 따서 약어로 표기 하기도 한다.

 

잉글리시 네임을 쓰는 이유는 좀 더 기억 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해외 비즈니스를 하는 중국인들의 거의 대부분은 잉글리시 네임을 가지고 있는데 영어식 이름은 매우 다양 하다. '제임스(James)' '안젤라(Angela)'와 같이 가장 흔한 이름 부터 '제키요(Jakeyo)'  같이 좀 생소한 이름까지 매우 다양 하지만 중국식 이름 보다 훨씬 더 기억 하기 쉽다.

 

이왕이면 부처님 제자 이름을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외국인과 상대 하는 사람들의 상당 부분의 사람들이 잉글리시 네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잉글리시 네임을 보면 '토마스''스테판'과 같은 세례명이 들어간 이름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예수의 10대제자의 이름이 잘 사용 되는 이유는 비즈니스 하기에 유리 하다고 한다. 같은 기독교 신자이거나 가톨릭 신자일 경우 여러가지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명함을 만들 때 뒷면에는 영어로 표기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식 발음을 집어 넣으면 중국식 발음과 매우 유사 하여 좀처럼 기억 하기 힘들다. 따라서 대부분의 명함이 영문의 이니셜을 딴 약어로 표시 하지만 잉글리시 네임을 사용 하기를 권장 한다. 그래서 영어식 이름을 고안 하게 되는 데 대다수는 흔히 듣는 영어 이름을 사용 한다. 그러다 보니 그 이름이 그 이름 같아서 개성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폐단을 극복 해 보고자 하여 새로운 이름을 고안 하기로 하였다. 지금은 외국인을 만날 일이 없지만 명함 뒷면에 나만의 개성을 나타내는 영어식 이름을 짖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생각 해 낸 것이 '아난(Anan)'이다. 아난은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의 한사람으로 다문제일 아난(多聞第一 阿難) 이라고 부른다. 빨리어로 아난은 '아난다(Ananda)'이다. 이왕이면 불자로서 부처님의 10대 제자 이름을 사용 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석서에 나오는 아난다에 대한 이야기는

 

아난다는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의 한사람으로서 다문제일이라 부른다. 아난다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을 12연기 공부를 하면서 알 수 있었다. 주석서에 나오는 아난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과 매우 인연이 깊은 관계

 

첫째로 부처님과 매우 인연이 깊은 관계라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아난다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런데 현생에서 뿐만 아니라 과거 전생에서도 긴밀한 관계 이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부처님 이 왕이었을 때 아난다는 대신이었고, 부처님이 인간 이었을 때 아난다는 천신이나 제석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지위가 가끔 뒤 바뀌기도 한 경우가 있었고 어떤 생에서는 서로 형제간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현생에서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 내생에서 또 만날 확률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가끔 TV에 나오는 전생이야기는 엉터리일 가능성이 농후 하다. 전생이 아프리카 마사이 족으로 태어 나기도 하고 영국의 공주로 태어 나기도 한다는 전생의 이야기가 바로 그 것이다. 좋던 좋지 않던 질기고 질긴 인연이 있기 때문에 비슷한 환경에서 태어 나는 것이 일반적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난다가 부처님과 시자로서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과거 24불 가운데 10번째 부처님인 '빠두뭇다라 붓다(Padumuttara Buddha)'일 때이다. 빠두뭇다라 라는 뜻은 태어나는 순간과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에 1만세계에 연꽃비가 내렸기 때문에 빠드뭇따라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 때 당시 아난다 존자를 비롯한 고따마 부처님의 이름난 제자들이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고따마 부처님 당시에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의 시자가 되기를 서원 하였기 때문에 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사진설명>붓다의 열반으로 슬픔에 젖은 아난다의 조각. 아난다의 눈썹을 지나 미간으로 이어지는 회색선은 슬픔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더욱 뚜렷이 보여준다.사진 ;법보신문

 

 

 

외우는 데 있어서 천재적인 머리를

 

두번째로 연기법에 대한 이해이다. 가장 난해 하고 심오 하기로 이름난 연기법을 아난다 존자는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부처님의 시자로서 25년간 시봉 하였기 때문이다. 외우는 데 있어서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아난다 존자가 연기법을 이해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석서에 따르면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칭찬겸 꾸지람 형식으로 말하였다.

 

아난다여,

너는 지혜가 출중 하기 때문에 연기법을 이해 하기 쉽다. 그러나 남들도 너처럼 쉽게 이해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난다 존자가 연기법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던 요인을 든다면, 전생에 쌓아온 바라밀 공덕이 컷고, 스승의 지도, 폭넓은 지혜, 예류과의 증득이라는 네가지 요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 했던 것이다.

 

84천법문이 다 부처님 말씀일까

 

셋째로 아난다는 84천의 법문을 다 외우고 기억해 냈다는 것이다. 아난다가 처음 부터 부처님의 시자는 아니었다. 부처님의 전법 21년 부터 시중을 들기 시작 하였으니 25년간 모시고 있었던 셈이다.

 

아난다는 부처님의 전법여행에 항상 동참 하였고 모든 법문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한번 들은 법문은 그대로 되풀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아난다가 없을 때 한 법문은 다른 사람들로 부터 들어서 기억 해 냈다. 이렇게 해서 배운 법문이 84000법문이다. 그런데 장로니게(Thag.92)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온다.

 

82천은 부처님으로 부터 받은 것이고,

2천은 비구들로 부터 받은 것이니.

나는 84000 가지의

이러한 법들을 전개 하노라(Thag.92)

 

즉 부처님으로 부터 82000법문을 듣고 2천 법문은 부처님의 제자들로 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84000법문이 모두 부처님의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니까야를 부처님의 직설로 보는 이유는

 

불교의 경전을 보면 여시아문으로 시작 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는 뜻의 여시아문은 아난다가 들었다는 것이다. 아난다가 듣지 않은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라 볼 수 없다. 따라서 초기경인 니까야를 부처님의 직설로 보는 이유가 아난다가 직접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후대의 대승경전의 경우에도 여시아문으로 시작 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부처님의 직설로 보기 어렵다. 아마도 부처님의 경지에 올라간 사람이 부처님 이름을 빌려 올렸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부처님이 돌아 가시고 1차 결집 할 때 5백비구가 모인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부처님의 육성을 기억 하는 제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할 때 모두 아라한만 참석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아난다가 참석 하지 못하게 된것이다. 왜냐 하면 그 때 당시 아난다는 아라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류자로서 보고 들은 사항을 기계적으로 암기 하였기 때문에 아라한 도과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난다는 부랴 부랴 위빠사나 수행을 하게 되고 경전 결집 전날에 아라한이 되어 간신히 참석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의 선언은 경전에 대한 신뢰를 주기에 충분 하다. 따라서 경전은 엄숙한 부처님의 육성이고 부처님의 선언이고 부처님의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말씀이 니까야만 있고 한국불교 1600년 역사에 있어서 최근에야 안일이다.

 

 

 

2009-04-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