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마음을 도표화 하다니! 아비담마는 프로다

담마다사 이병욱 2009. 4. 21. 10:53

 

마음을 도표화 하다니! 아비담마는 프로다

 

 

 

 

 

 

'먹고 대학생'이라는 말이 있다. 대학만 들어 가면 만사가 해결 된다는 뜻이다. 공부해도 대학생이고 먹고 놀아도 대학생이다. 대학에 학적을 두고 있는 한 아무 제한 없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부모가 주는 돈으로 대학을 다니니 학비 걱정 할 필요 없고 적당하게 놀면서 공부 해도 취직이 잘 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먹고 대학생이 반드시 대학생에만 적용 되는 법칙일까. 이런 먹고 대학생의 유형을 공무원사회에서도 본다.

 

놀고 대학생, 먹고 공무원

 

공무원 되기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들어 가고 나면 평생신분이 보장 된다. 보장된 신분을 유지 하고자 하는 노력 또한 유별나다. 가급적 손해 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큰 사고 없이 정년까지 마치면 성공적인 공직생활이 될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 없다 보니 정년퇴직 후까지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공무원연금이다. 늙어 죽을 때까지 매달 일정액을 꼬박꼬박 지급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 미리 노후 대책까지 세워 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느 공무원도 반대 할 이유가 없다. 국민이 주인이라고 하지만 주인 눈치는 그다지 보는 것 같지 않다. 그런데 더 욱 더 놀라운 사실은 본인이 사망하면 가족이 연금을 승계 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 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비록 60%에 해당 되는 금액이지만 유산개념으로 까지 연금을 확장 시켜 놓은 것이다.

 

이런 공무원 연금은 비슷한 납부 조건의 국민연금과 비교 하였을 때 무려 2.5배나 더 많다고 한다. 왜 이렇게 차별을 두느냐고 물어 보면 첫째가 공무원은 선발된 인원으로서 국민에 대한 봉사와 노고 차원이고 둘째로 투잡을 가질 수 없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공무원 연금은 '보상차원'이고, 국민연금은 '보험차원'으로 생각 하기 때문이다. 이런 '먹고 대학생' '먹고 공무원'이 종교계에는 없다고 볼 수 있을까?.

 

'먹고 종교인'은 없을까

 

종교계 역시 '먹고' 유형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종교라는 커다란 테두리안에 안주 하고 있는한 '먹고 대학생' 내지 '먹고 공무원' 못지 않은 그룹이라 볼 수 있다. 일단 종교인이 되면 먹고 사는 데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룹내에서 다 해결 해 주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적극적으로 개척해서 먹고 살기도 하지만 조상이 남겨 준 유산으로 유지 하는 경우도 있다.

 

비록 허접하고 유치원 동화 수준의 교리일지라도 두려움과 공포의 프레임을 만들어 놓고 수금을 하는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쉽게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갖은 죄의식을 만들어 놓는다. 일요일에 나가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거나 배교 하면 죄지은 것 같은 죄책감을 들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꼼짝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병주고 약주고' 하는 식으로 꾸려 나가는 것이다. 어렵게 일구어 놓은 터전을 남에게 줄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를 이어서 소유 하게 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종교인도 '놀고 대학생' '먹고 공무원' 못지 않은 '먹고 종교인' 이 되는 것이다.

 

또 한부류는 조상이 남겨준 유산으로 유지 하는 것이다. 입장료 수입이 생기고 보시함에 돈이 들어 오기 때문에 특별히 노력 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시스템이 평생 계속 된다면 공무원 연금 못지 않은 사회보장제도라 볼 수 있다. '놀고 대학생' '먹고 공무원' '먹고 종교'인 모두 제힘으로 개척해서 나간 다기 보다 뒤에 거대한 배경에 기대어 살아 가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이다. 대학생 뒤에는 부모가 버티어 주고 있고, 공무원 뒤에는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절대적으로 신분이 보장 되고, 해당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신도들이 뒷받침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먹고 종교인을 프로라 볼 수 있을까.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방()과 할()

 

프로는 아름답다. 언젠가 광고에 자주 나오던 말이다. 프로는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다. 누군가에 돈을 주고 배운 다면 아마추어 이지만 돈을 받고 가르친다면 프로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프로라고 볼 수 있다. 프로가 되려면 무언가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설령 그 것이 육체적인 작업을 필요 한 것이든 정신적인 노력이 필요 한 것이든지 상관 없이 남의 주머니를 열게 한다는 의미에서는 모두 프로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아마추어는 취미생활의 개념이기 때문에 돈을 가져다 바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프로는 고도로 전문화 되어 있고 아마추어는 어설프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어렵지 않다.

  

선불교가 있다. 중국화된 불교를 선불교라고 한다. 선불교의 특징을 들라면 크게 네가지를 들 수 있겠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이다. 풀이하면 불립문자는 경전을 읽고 암송 하는 것 보다 수행을 중요시 하는 사상이고, 교외별전은 조사에서 조사로 이어지는 법통의 전수를 말한다. 또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은 인간의 내면에 본래 부처를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수행을 통하여 본래부처를 발견 하자는 것이다.

 

이런 선불교의 전통에 따라 깨우침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온다. 무문관을 보면 깨우침을 주기 위하여 몽둥이를 사용 하기도 하고 악 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마치 하나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제자가 스승에게 법에 대하여 물었을 때 다짜고짜 몽둥이질을 하거나 역으로 제자가 스승의 뺨을 때리는 경우도 있다. 이 모두가 분별 없음을 말하고자 함이겠으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희극을 보는 것 같다는 것이다.

 

도가 무어냐고 물었을 때  '무언으로서 대답하기' '손가락 세우기'를 한다든가 '마른 똥막대기'라든가 '뜰 앞의 잦나무'와 같은 동문서답도 볼 수 있다. 도라는 것은 말로서 설명할 수 없고 분별해서도 안된다는 뜻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시절인연이 된 사람들은 '' '' 등으로 깨우치게 되지만 도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의 기행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교가 생겨 나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런 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보전 되어 있는 남방상좌부 불교를 접하고 부터이다.

 

스리쿠션을 먹은 한국불교

 

불교는 크게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쪽 코스는 북방이고 또 한쪽 코스는 남방이다. 아쇼카 대왕 이래 전도사가 파견 되어 성공적으로 전파 된 곳이 북방의 간다라 지방과 남방의 스리랑카라고 한다. 간다라로 전파된 불교는 험한 육로를 거치고 서역을 지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페르시아와 그리스 그리고 서역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shvara, 관세음보살)나 아미타바(Amitaba, 아미타불) 사상이 흡수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서역에서 한번 변형 되고 중국으로 건너 와서 또 한번 변형 된다. 이미 4대 문명권인 중국에서 고유의 신앙인 도교와 습합된 불교가 선불교라고 한다. 이런 불교가 다시 한국에 건너와서 무속을 용인 하는 한국불교가 된다. 초기 불교가 3번에 걸쳐서 변형된 것이 한국불교라고 볼 수 있다. 당구로 말한다면 스리쿠션을 먹은 셈이다. 세차례에 걸쳐서 방향이 바뀌다 보니 원형과는 크게 달라 진 것이다.

 

남방으로 간 불교는 변형 없이 잘 보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차결집때의 구전내용이 고스란히 패엽경으로 기록 된 것이다. 이런 초기 불교는 바닷길을 거쳐서 미얀마와 태국과 같은 동남아시아로 전달 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모두 팔리어로 된 경전을 공통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국에서도 변형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닷길이 육지길 보다 더 외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2300년간 변형 없이 전수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육지를 거치지 않고 비행기로 초기불교를 전수 받고 있는 것이 요즘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원본과 비교해 보니

 

근세에 초기경전은 영어의 알파벳으로 문자화 되어 세계에 알려졌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요즘에 원본이라고 볼 수 있는 니까야와 대승불교를 비교해 보면 원형이 심각 하게 훼손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방불교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 한 반면에 대승불교는 육로를 거치면서 한번씩 변형 되다 보니 원래의 모습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최근에야 알게 된 것이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상이 아마도 선불교일 것이다.

 

선불교가 불립문자를 표방하고 교외별전 이야기를 하면서 경전을 멀리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방에서는 불교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는 '청정도론'이 지어 졌고 아비담마논장이 체계화 되었다. 또한 위빠사나로 불리는 수행방법이 체계화 되었다. 이렇게 인간의 이성을 한 없이 발전 시켜 나간 것과 대조적으로 북방에서는 왜곡 되고 변형 되어 한국과 같은 종교시장에 있어서 거의 경쟁력이 없는 '산중불교'로 전락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한 민간인들이 믿는 불교는 신앙으로서의 불교이고 타력신앙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각종 보살과 신장들 또는 산신과 같은 민속 내지 무속신앙이 혼재 하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이 불교가 유일신교 종교와 경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가 불교다울 때 가장 경쟁력 있는 종교가 될 것이다. 그런 경쟁력 있는 종교로서의 불교를 초기불교에서 발견 한다. 아비담마로 대표되는 정교한 교학체계와 단계별 수행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을 도표화 하다니!

 

마음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키워드이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북방과 남방에서 대하는 태도는 정 반대이다. 북방에서는 마음을 함부로 알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답이 된다거나 엉뚱한 답을 내놓는 선문답, 그리고 방망이로 두드려 패거나 고함을 지르는 행위 등과 같은 격외의 일을 통하여 마음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마음을 체계화 하였다는 것이 북방불교와 확연히 구별된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든가 마음은 '찰라생' '찰라멸' '상속' 하는 개념 같은 것이다. 이런 심층적인 토대위에서 성립된 아비담마를 보면 마음을 도표화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모습이 진정한 프로가 아닐까.

  

전문가는 데이터를 가지고 이야기 해야 된다고 말한다. 말로만 이야기 한다면 진정한 전문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문자화 하고 기록화하여 남겨 놓아야 한다. 설령 그 전문가가 사라지고 없더라도 기록이 남아 있으면 후임자가 매뉴얼을 보고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 자신만이 제조방법을 알고 있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그 사람이 나가게 되면 더 이상 해당 제품을 생산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 관리가 잘 되어 있는 회사에서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길 것을 요구 한다. 나중에 사람도 가고 물건도 사라졌을 때 남는 것은 기록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도표화 하는 기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남방상좌부 불교는 확실히 프로집단이다. 부처님의 원음이 잘 보전 된 니까야와 이를 세밀하게 주석한 청정도론 그리고 초기불교의 뼈대를 갖춘 아비담마가 이를 말해 준다. 마음을 도표화 한다는 것은 전문가가 생산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어 놓는다는 말과 같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큰스님들 보다 프로임에 틀림없다.

 

 

 

진흙속의연꽃

2009-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