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과거로 돌아 갈 수 있다면, 신종서비스 디지털뉴스 아카이브로 본 제등행렬

담마다사 이병욱 2009. 5. 9. 10:32

 

과거로 돌아 갈 수 있다면, 신종서비스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로 본 제등행렬

 

 

과거로 돌아 갈 수 없을까. 현실이 불만인 사람은 과거로 돌아 가서 다시 해보고 싶고, 과거에 잘 나갔던 사람들 또한 항상 과거를 회상 하며 살아 가고 있다. 물론 과거의 끔찍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두번 다시 돌아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가는 것일까

 

시간이 흘러 간다고들 한다. 그런데 시간은 진짜 흘러 가는 것일까. 엄밀히 말한다면 시간은 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는 것이다. 다만 에너지의 흐름이 변할 뿐이다. 빈집을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되고 허물어 지듯이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관리를 하지 않은 회사는 부도로 가게 되어 있고,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으면 못된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이렇게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담장은 무너지게 되어 있고, 그릇은 깨지기 위하여 존재 하는 것이다. 이런 법칙을 엔트로피 법칙이라 한다.

 

그러나 단 하나 엔트로피법칙에 역행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생명이다. 생명은 끊임 없이 무질서에서 질서로 지향 하는 특징이 있다. 사람이 성장 하는 것도, 도시가 건설 되는 것도, 회사가 유지 하는 것도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은 이 생명 있는 것 또한 엔트로피 법칙을 피해 갈 수 없다. 죽으면, 부도나면 모두 무질서로 환원 되기 때문이다.

 

신종서비스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최근에 과거를 되돌아 볼 일이 생겼다. 신문을 통해서이다. 수십년전의 일을 모니터를 이용하여 보게 된 것이다. 최근에 네이버에서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라는 서비스(http://dna.naver.com/search/searchByDate.nhn)를 개시 하였다. 과거의 종이신문을 데이터베이스화 하여 검색 할 수 있도록 하게 한 것이다. 430일 부터 시작 하였으니 이제 막 시작한 신종서비스라 볼 수 있다. 아직 완성 되지 않은 시험용 오픈베타기간이라 볼 수 있는데 현재는 경향신문, 매일경제, 동아일보의 세 신문사에 한정 되어 있고 서비스 기간은 1976년 부터 1985년 까지 10년 까지만 보여 주고 있다.

 

제등행렬을 키워드로 하여 검색한 결과

 

시간상으로 30년전의 일은 이제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이 발달한 요즘과 비교 하면 거의 원시시대나 다름 없는 시대인 것이다. 오로지 신문과 방송에만 의존 하던 시대 이었고 특히 신문이 하자는 대로 하던 시대 이었다. 그런 시대에 검색창을 이용하여 연등축제에 대하여 조사 해 보았다. 그러나 그 때 당시에는 연등축제라는 말은 없었고 그 대신에 제등행렬이라는 말이 폭 넓게 쓰여 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등행렬을 키워드로 하여 검색한 결과 10년간의 자료를 스크랩 할 수 있었다.

 

그 때 당시 제등행렬은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가 부처님오신날 저녁에 열렸고,

둘째는 제등행렬의 출발지는 여의도 공원이었다.

셋째는 남북통일 호국기원 같은 용어가 자주 등장 하였고,

넷째 1980년도의 비상계엄하에서는 제등행렬이 열리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1980년도 한해만 빼고 제등행렬은 매해 마다 치러 졌고, 불자들 또한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오늘날 과 같은 세계적인 축제로 발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제등행렬에 관한 기사내용을 보면

 

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불교는 전반적으로 무기력한 시대이었다고 판단 된다. 그 동안 단절 되다 시피한 전통을 살리는 데 주력 하였지만 사회에서 바라본 시각은 오래 된 것’ ‘낡은 것의 이미지를 벗어 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또한 남북통일이나 호국기원 같은 용어가 많이 등장 함에 따라 정권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그에 따라 대 사회적인 역할은 매우 부족 하였다고 여겨 진다.

 

반면에 이웃 종교인 기독교는 이 시기에 배가 성장한 시대이다. 해방후에 매 20년 마다 배가 성장해온 기독교가 성장율에 있어서 정점에 달한 시기가 칠팔십년대이다. 이후로 90년대에 정체 되다가 2000년대 들어 와서 하락 반전 했다고들 흔히 말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급신장 하고 상대적으로 불교가 처지는 무기력한 시대 이었음에도 불구 하고 불자들의 최대 잔치인 제등행렬은 1980년 한해만 거르고 매년 성대하게 치루어져 왔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1976년 5월 7일 매일경제

 

국태민안과 남북통일을 기원 하는 대제가 5.16광장에서 열렸다고 보도 되고 있다.

이때 당시 30만명이 참여 하였고 조계종 종정은 서옹스님 이었다.

 

 

 

 

 

 

 

 1977년 5월 26일 경향신문

 

호국기원대법회가 5.16광장에서 서옹스님과

이후락 전국신도협회 회장이 참여 한 가운데

수십만명이 참여 하였다고 보도 되고 있다.

 

 

 

 

 

 

1978년 5월 15일 동아일보

 

5.16광장에서 2만여 신도들이 오후 7시부터 코끼리등  대형탑과

오색연등을 들고 행진 하였다고 보도 되고 있다.

 

 

 

 

 

 

1979년 5월 4일 경향신문

 

이때 부터 여의도 광장이라는 말이 등장 한다.

여의도 광장에서 출발한 제등 행렬은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3만명이 갖가지 모양의 대형연등을 앞세우고

석가모니불을 외며 행진 하였다고 보도 되고 있다.

 

 

 

 

 

 

 

1980년 5월 21일 경향신문

 

비극의 해인 1980년이다.

사진에 보는 할머니는 왜 주저 앉았을까.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참 벌어 지고 있을 때

비상계엄하에서 치루어진 부처님오신날은

시국을 감안 하여 제등행렬이 취소 되고

통금도 그대로 유지 한다고 발표 되고 있다.

 

 

 

 

 

1981년 5월 12일 경향신문

 

다시 제등행렬이 화려 하게 시작 되었다.

10만명이 여의도 광장에서 출발 하였다 하니

역대 그 어느 대회 때 보다 규모가 더 커진 느낌이다.

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모습도 눈에 띤다.

 

 

 

 

 

같은해 1981년 5월 12일 동아일보 기사내용이다.

 

동아일보는 보수적으로 잡아서 3만명이 참가 하였다고 나온다.

장장 10km이르는 거리를 10시 30분까지 행진 하였다고 나오고

장관을 이루었다는 표현을 보아 성공적으로 치루어진 듯한 느낌이다.

 

 

 

 

 

 

1982년 5월 1일 매일경제

 

부처님오신날이 토요일어서인지 일요일 쉬는 신문에 저녁에 시행하는 제등행렬에 관한 내용은 없다.

다만 10만명이 참가 하여 길이만도 4km에 이르게 되고, 일대 장관을  이룰 것이라고 보도 되고 있다.

 

 

 

 

 

 

 

1983년 5월 20일 경향신문

 

오후에 제등행렬이 벌어질 것이라고 보도 하고 있다.

왜 신문들은 한결 같이 나이 드신 노보살님 모습만 보여 줄까.

 

 

 

 

 

 

 

1984년 5월 9일 매일경제

 

여의도에서 화신앞까지 20여만명이 국태민안과

자비를 기원하는 제등행렬을 하였다고 보도 하고 있다.

 

 

 

 

 

 

 

1985년 5월 27일 매일경제

  

자비광명을 기원 하는 제등행렬이 여의도에서

조계사 까지 진행 되었다고 보도 되고 있다.

이 해 처음으로 부처님오신날 보다 이틀 앞당겨

대규모로 벌어 졌다고 기사는 전한다.

이유는 전국에서 동원된 신도들이 각 사암으로 돌아가

사찰별 봉촉행사에 참석토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기사 내용으로 파악 한다면 제등행렬이 본격적으로 대규모화 한 시발점은 1985년부터 라고 생각 한다. 불교중흥을 위하여 종단에서 부처님오신날 행사의 규모를 대규모화 하였고 특히 제등행렬과 같은 경우 분리 시행한 첫해로서 그 어느 해 보다 성대 하게 치루어 졌다고 보도 되고 있다.

 

호진스님에 대한 기사를 발견 하고

 

신문을 보면서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호진스님에 대한 관계기사이다. 신문을 보다 우연히 눈에 띄여서 보게 된 기사이다. 1982년도 4 23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스님은 소르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고 보도 되고 있다. 그 때 당시 나이가 41세이었고 초기불교를 대상으로 집중으로 연구 하였다고 보도 되고 있다. 지금이야 초기불교와 남방수행의 열풍이 불고 있지만 그 때 당시에 초기불교를 연구 하였다는 것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1982년 4월 23일 경향신문

 

 

 

2009-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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