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과보심 (위빠까찌따, vipaka-citta) 때문에

담마다사 이병욱 2009. 5. 12. 13:19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 우연일까 업보일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 업이 과보의 마음(위빠까찌따, vipaka-citta)으로 익도록 업에게 기회를 부여한 결과라면

 

 

 

 

 

 

온라인오프라인은 어느 정도 다를까. 온라인 이라고 하면 보통 인터넷상에서 통신하거나 거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직접적인 대면 없이 통신 하거나 거래 하는 것 모두 온라인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온라인 중에 전화 통화가 있다. 주로 전화를 이용 하여 통신 하는 방식이다.

 

원만하고 구족 된 인상을 보면

 

하는 일이 주로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이용하여 일을 하다 보니 밖에 돌아 다닐 일이 별로 없다. 자료는 이메일로 주고 받으면 되고, 궁금한 것은 전화로 물어 보면 된다. 일이 끝나면 자료를 이메일로 발송 하면 되고, 물건제작을 요구 하는 경우에는 제조업체에 맡겨서 물건을 만들어 보내면 된다. 물건은 택배로 보내면 되기 때문에 만날 일 또한 없다.

 

자료를 이메일로 주고 받지만 전화통화는 반드시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대면 하는 경우는 드믈지만 자주 거래 하다 보면 만날 때가 있다. 이런 경우 고객서비스 차원에서 먼저 찾아 가보는 것이 예의 이지만 스스로 찾아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 고객중의 한 분이 있는데 젊은 사업가 이다. 이제 막 뻗어 나가며 도약하려는 단계에 있는 것 같다. 만나 보니 전화로 통화 할 때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목소리를 들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원만하고 구족된 인상이다.

 

왜 사람들은 생긴 모습이 다를까

 

사람들은 생긴 모습이 전부 다 다르다. 그리고 성질이나 성향 또한 제각각 이다. 왜 이렇게 전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고 성향 또한 제각각 일까. 모든 사람들은 평등한 존재라고 하는 데 이렇게 제각각 이라면 평등한 존재가 아니라 애초에 태어 날 때 부터 불평등하게 출발 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누구는 좋은 신체에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서 한 세상 그리 어렵지 않게 살다 가지만, 누구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한평생 힘겹게 살다가 세상을 등지는 것일까.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 만큼이나 각자의 성향이 서로 다른 만큼이나 세상은 불공평 함에 틀림 없다.

 

생긴 모습이 서로 다르고 불공평하게 태어난 이면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은 그 원인에 대한 결과일 것이다. 모든 것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파악 하였을 때 연기법을 거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조건 지워져서 일어 나는 일련의 사건의 지배를 받는 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원인과 결과에 태어나고 죽는 현상은 필연적으로 윤회와 관련 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윤회가 없다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없다면 생긴 모습이나 성향은 모두 동일 해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모습과 기질은 필연적으로 축적된 성향에 기인 한다. 과거에 쌓이고 쌓인 결과물이 현재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원만 구족한 신체와 성품을 타고 났다면 과거 전생의 축적된 성향에 따를 것이다. 지금 불만족한 상황 역시 과거 전생의 영향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 탓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남방불교를 접하고 나서

 

5년전 불교교양대학에 다닐 때의 일이다. 같은 지역에 사는 법우님이 있었는데 수업이 끝나면 카풀해 드렸다. 그 법우님은 말을 할 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자신은 마음공부하러 다닌다고 말했다. 마음공부라는 말은 참 듣기 좋은 말이다. 불교를 믿는 다는 말보다 마음 공부 합니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을 정도이다.

 

그런 마음에 대하여 알면 알 수록 점점 어려워 지는 것이 불교 인 것 같다. 특히 한국불교에 있어서 그렇다. ‘마음이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내는 것이라든가, ‘마음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불성이나 법성과 같이 본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불교는 어려워 지는 것 같다. 따라서  마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또는 어려운 것으로 인식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최근에 남방불교를 접하고 나서 일시에 그런 문제점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든다. 마음은 알 수 없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에는 법을 제대로 아는 것이 전제 되고 있다. 법을 알면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은 알 수 없고 어렵다고 생각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 법이란 부처님이 직접 설한 팔만사천 법문이라 볼 수 있다.

 

법을 아는 것이 마음을 아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하고 있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아비담마를 접하고 나니 하나씩 의문이 풀려 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아비담마에서는 법과 마음에 대하여 명쾌하게 설명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비담마를 12연기에 적용 하여 설명한 법문을 들어 보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런 법문을 접할 때 마다 느끼는 사항은 불교는 무척 재미 있는 것 또는 매우 과학적인 것이라고 느끼게 되고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한껏 느끼게 해 준다. 그런 내용 중에 식()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을 크게 4가지로 나누면

 

위빠사나 선원에서 법문을 들을 때 행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 나는 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식은 121가지 이지만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선심

둘째, 불선심,

셋째. 과보심

넷째, 무인작용심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고 그 때의 마음은 오로지 하나의 마음만 갖는다. 또 마음은 단독으로 일어 나는 것이 아니라 선하거거나 불선한 52가지의 마음부수의 도움을 받아 일어난다. 따라서 선한 마음을 갖느냐  불선한 마음을 갖느냐는 전적으로 마음부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즉 탐욕과 같이 불선한 마음이 일어 날 때는 거머 쥐려는특징을 가지고 있고, 성내는 것과 같은 불선한 마음이 일어 날 때는 밀쳐 내는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과보심무인작용심이다. 무인작용심에 대하여는 원인 없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 말하고 부처나 아라한의 마음이라 설명 하고 있다. 즉 마음은 일어 나지만 좋아 하고 싫어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과보를 짖지 않게 되어 더 이상 태어 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까지는 과거 전생에 수 없이 바라밀 공덕을 쌓은 결과라고 말한다. 수행의 목적이 바로 무인작용심으로 가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과보심은 크게 선과보와 불선과보로 나눌 수 있는데 이미 우리 마음속에 내재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전생에 지은 선업과 불선업이 익어서된 결과 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선심을 일으키는 원인도 알고 보면 불선과보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또 다른 불선업을 짖게 되고 그 과보는 마음의 종자가 되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 진다는 것이다.

 

내 의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연결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점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설명 된다. 만일 마음이 서로 연결 되어 있다면 한마음이라 볼 수 있고 항상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점들의 모임으로 보인다면 무아이고, 일어 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특징은 반드시 일어 났다 사라지고 또 반드시 과보를 남기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찰라생 찰라멸 하면서 상속 하는 것이다. 이것이 초기 불교에서 보는 마음이고 부처님이 설한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 되는 것은 과보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과보심이라 부른다.

 

과보심은 마음의 종자로 볼 수 있고, 또한 그 과보심의 힘에 의하여 살아 간다고 볼 수 있다. 역설적으로 내가 내 의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과보심 대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을 성질대로 산다고도 말 할 수 있고 좀 더 고상하게 표현 한다면 축적된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전생에 지었던 업의 종자가 과보의 형태로 내재 되어 있어서 한 사람의 성향을 결정 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또한 그 과보가 정신적인 성향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요소도 결정 할 수 있다는 사실또한 놀라운 일이다. 이런 설명에 대한 이야기는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재생연결식이 대표적일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하지만 그 사람이 살아온 모든 정신적 육체적인 정보는 식의 형태로 과보가 전달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태어 날 때 누구는 잘 태어 나기도 하고, 누구는 잘 못 태어 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항에 대하여 더 자세 하게 설명한 책이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이 지은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어떤 특정한 경우에 한 사람이 원하지 않는 대상을 경험 하는가, 적당히 원하는 것을 경험 하는가, 열렬히 원하는 대상을 경험 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의 업에 의하여 지배 된다. 그러므로 경험된 대상은 업이 과보의 마음(vipaka-citta)으로 익도록 업에게 기회를 부여 한다. 과보의 마음들은 아무런 고의성 없이 대상의 성질과 자연히 일치 하게 된다. 그 것은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실제의 얼굴의 특징과 일치 하는 것과 같다.(아비담마 길라잡이 1, 385)

 

 

거울을 보면 있는 그대로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더 하거나 빼는 것이 없이 본 모습을 그대로 비추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과거의 자신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과거에 행한 모든 행위가 업으로 되고 그 과보가 고스란히 거울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성질대로 사는 것이다. 구더기에게 깨끗한 방을 주고 비단이불을 덮어 주어도 기어이 똥통으로 가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과거의 축적된 성향 때문에

 

한 눈에 사람을 알아 본다고 한다. 보이는 모습만 보아서도 대충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생긴 모습이라든가 행동거지 같은 것이다. 여기에다 목소리 까지 들으면 더욱 더 확신이 들 것이다.

 

확실히 잘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 용모라든가 신체적인 조건이 구족되고 성격 또한 원만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한 눈에 보아도 눈에 들어 온다. 실제로 옆에서 지켜 보거나 만나서 이야기 해 보아도 보통 사람들과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용모와 성격 또는 성향이 우연히 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마도 과거의 축적된 성향 때문일 것이다.

 

 

 

2009-05-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