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불교의 시작인가,
비산동에서 관악산 산림욕장이 시작 되는 곳에 꽤 너른 연못이 하나 있다. 봄이 되어서 일까 연못 주변에는 진달래 철쭉등 각종 꽃이 피어 있고 수초 또한 왕성하게 뻗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수초 주변에 무언가 까만 작은 콩알 같이 생긴 것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것도 서로 뭉쳐서 꿈틀 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올챙이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수초 주변 뿐만 아니라 전 연못에 걸쳐서 좍 깔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나게 번식 하고 있었다.
보통 태어남 이라고 하면
새로운 생명이 나는 것을 ‘태어남’이라 한다. 한자로 고상 하게 표현 하면 탄생(誕生)이다. 태어남에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4가지 방법이 있다. 즉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이다. 올챙이가 태어난 것은 난생에 속할 것이다.
암놈이 수천개의 알을 낳고 그 위에 숫놈이 정액을 뿌리면 수천개의 생명이 태어난다. 여기에다 여러 개구리가 알을 낳는다면 그 개체수는 수만 수십만이 될지 모른다. 그래서 연못 하나가 올챙이로 빼곡히 채워 지다시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량으로 태어나는 방법은 물고기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강이나 바다에서 수천 수만개의 알을 낳으면 그 위에 숫놈이 정액을 뿌려서 수만 수십만의 치어가 발생 되는 것이다. 땅에서 살아 가는 개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지구상에서 알에서 나온 생명체의 개체수를 합친다면 가히 천문학적 숫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개나 돼지 소 닭과 같이 인공으로 대량 생산 하는 식용 축산 가금류 부터 야생의 이름 모를 생명체까지 합친 다면 그 숫자는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다. 그렇다고 지구상에만 생명체가 있을까. 먼 우주의 어딘가에도 있을 수 있고 불교적인 세계관으로 본다면 6도를 포함한 3계에도 수 없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존재들의 대부분은 4악도에 태어난 다는 것이다. 인간이상으로 태어 나는 경우는 극히 드믄일 이라는 것이다. 즉 태어남 이라고 말 하였을 때의 태어남은 보통 4악도에 태어남을 일컫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몸 받기 어려움에 관한 비유가 있다.
‘눈먼 거북이’ 이야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람으로 태어 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런 좋은 비유를 드는 것이 항상 ‘눈먼 거북이’ 이야기인 ‘맹구경(盲龜經)’이다.
부처님께서 베살리의 원숭이 연못 옆 중각강당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연못 주변을 산책하시던
부처님께서 문득 아난다에게 이런 것을 물었다.
“아난다야,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이 거북이는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머리를 내놓았는데
그때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 판자를 만나면
잠시 거기에 목을 넣고 쉰다.
그러나 판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냥 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때 눈먼 거북이가 과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다는‘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눈까지 먼 거북이가 백 년만에 머리를 내밀 때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난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했다.
“그래도 눈먼 거북이는 넓은 바다를 떠다니다 보면 서로
어긋나더라도 혹시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중생이 육도윤회의 과정에서 사람
으로 태어나기란 저 거북이가 나무판자를 만나기 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저 중생들은 선(善)을 행하지 않고 서로서로 죽이
거나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해쳐서 한량없는 악업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내가
가르친‘네 가지 진리(四聖諦- 고집멸도 苦集滅道)’를
부지런히 닦으라.
만약 아직 알지 못하였다면 불꽃같은 치열함으로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잡아함 15권 406경 《맹구경(盲龜經)》
사람으로 태어 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눈먼 거북이를 비유 하여 설명 하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 강조한 사항은 사람으로 태어 났을 때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를 닦으라고 분명히 말 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시는 이세상에 나오지 말라는 것과 같다.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깨우쳐서 열반에 들어가 다시는 태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런 말 중에 부처님의 직설로 여겨지는 숫타니파타에도 나온다. 자신의 아들인 라훌라에게 한말이다.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라(Sn.339)”
다시는 태어 나지 않는 것이 목표
불교의 최종목표는 열반이다. 열반은 다시는 이세상에 태어 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수만가지 법문도 알고 보면 열반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생에서 안되면 다음생에서 하면 되고 또 다음 생에 하는 식으로 다시는 태어 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곳에 태어 나기를 바란다. 천상과 같이 수고 없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을 최고의 목표로 한다. 또 그 곳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 천상에 태어나고 천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불교라 볼 수 없다. 외도에서 그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으나 부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열반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당당하게 ‘다시는 태어 나지 말라’ 라고 주장 하는 사람들이 드믈기 때문이다. 다들 이 좋은 세상에서 계속 태어 나기를 원하든가, 죽어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함부로 말을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감하게 다시는 태어 나지 말 것을 이야기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인터넷 동영상으로 본
인터넷상으로 본
인터넷상으로 본 그녀는 매우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하고 있다. 생활풍수라든가 작명법, 인상학, 표정관리 같은 것이다. 주로 기업이나 공무원, 문화센터에서 주로 활동 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그녀가 위빠사나에 대하여 다수의 동영상 강의를 하고 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누구도 이제 까지 시도 하지 않았던 노트북을 이용한 프리젠테이션 강의 기법이다.
누구나 법문을 할 수 있는 시대
시대는 확실히 변하고 있다. 법문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누구나 법문을 할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 것도 무슨 자격증을 갖추고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전달 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것도 인터넷과 정보통신기기를 잘 활용해서 알기 쉽게 요점 위주로 전달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문이라 하지 않고 ‘강의’라는 표현을 쓰는지 모른다.
법문이든 강의이든 부처님 법을 전달 하는데 있어서 똑 같다고 볼 수 있다. 또 법문은 반드시 출가한 수행자가 해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항을 정확하게 전달 하면 된다. 법문 한다고 하여 ‘신변이야기’로 때우는 것 보다 프리젠테이션 기법을 이용하여 부처님 법을 알기 쉽게 강의 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생활불교, 생활선의 시작인가
인터넷시대를 맞이 하여 집에서 또는 작업실에서도 이제 쉽게 불교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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