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마타의 삼매와 위빠사나의 통찰지 제대로 알기

담마다사 이병욱 2009. 5. 16. 08:47

 

사마타의 삼매와 위빠사나의 통찰지 제대로 알기

 

 

 

 

 

계의 그릇이 온전하고 견고해야 선정의 물이 맑게 고이고 거기에 지혜의 달이 나타난다

 

흔히 계정혜 삼학을 그릇과 물과 달에 비유하여 하는 말이다. 여기서 그릇을 계()로 보고, 그릇에 담긴물을 정()으로, 그리고 그 물에 비친 달을 혜()로 보았다.

 

계정혜, 그릇과 그릇에 담긴 물과 그 물에 비친 달

 

초기경에 나와 있는 삼학(三學)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계()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삼매[]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통찰지[]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해탈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이제 성스러운 계를 깨닫고 꿰뚫었다.

성스러운 삼매를 깨닫고 꿰뚫었다.

성스러운 통찰지를 깨닫고 꿰뚫었다.

성스러운 해탈을 깨닫고 꿰뚫었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갈애는 잘라졌고,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은 부수어졌으며,

다시 태어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앙굿따라 니까야 깨달음 경(A4:1))

 

 

계정혜를 삼학이라고 한다. 삼학을 빨리어로 말하면 띠시카(Tisikkha)’이다. 삼학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문단속을 잘해야

 

첫째, ()이다.

 

계를 빨리어로 시라(sila)’라고 한다. 그리고 계행을 시라나(silana)’라고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계행은 단속을 뜻하는 말인 삼와라(samvara)’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왜 단속이라고 하였을까.  그 것은 문단속을 의미 하고 문단속을 잘해야 계행을 잘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문단속을 해야 하는가 바로 육문(六門)이라 볼 수 있다. 육근이라고도 불리우는 안이비설신의이다. 이들 문으로 들어 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에 대한 단속이라 볼 수 있다. 

 

선심일경성(善心一境性, 꾸살라찌따샤에까가따)

 

둘째, ()이다.

 

정을 빨리어로 사마디(samadhi)’라 한다. 한자음으로 번역 될 때는 삼매로 된다.

 

그렇다면 삼매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삼매는 한마디로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된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대상은 좋은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나쁜 대상이 될 수 도 있다. 예를 들어 연예인의 사진을 대상으로 한다면 좋은 대상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좋은 대상 즉, 선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선심일경성(善心一境性)’이라 하고, 빨리어로는 꾸살라 찌따 에까가따(kusala-citta-ekaggata)’라 한다. 따라서 삼매를 닦음으로서 7가지의 해로운 마음을 극복 하는 것이다. 7가지 해로운 마음은 5가지 장애와 일치 한다.

 

, 잘못 했구나!(꾸꿋짜, kukucca)

 

다섯가지 장애는 무엇일까. ‘오개(五蓋)’라 불리우는 다섯가지 장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감각적 욕망이다. 재욕, 식욕, 색욕, 명예욕, 수면욕을 말한다.

 

둘째, 악의를 말한다. 분노, 저주와 같은 것이다.

 

셋째, 해태와 혼침을 말한다. 이것은 깔아 앉은 상태를 말하는데 해태는 나태한 것을 말하고, 혼침은 멍청한 상태를 말한다.

 

넷째, 들뜸과 후회를 말한다. 여기서 후회는 악작(惡作)이라고도 표현 되는데 빨리어로는 꾸꿋짜(kukucca)라 하고 , 잘못 했구나!”라는 뜻이다. 즉 해로운 심리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율장에서는 좋은 것으로 본다. 왜냐 하면 건전한 의문으로서 불선업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섯째, 의심이다.

 

이렇게 오개로 보면 5가지이고, 개별 단어로 보면 7가지가 된다. 이런 해로운 마음을 극복 하기 위하여 삼매를 닦는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삼매의 경지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삼매를 요약하면, 심사희락정(尋伺喜樂定)

 

삼매의 종류는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의 4가지가 있다. 이 사선에 대한 설명이 초기경에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떨쳐내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리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수반하며,

멀리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 pīti]

행복감[, sukha]을 특징으로 하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sampasādana)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2(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희열이 사라졌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때문에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온하게 마음 챙기며

행복에 머문다’라고 일컽는

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捨念淸淨]

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

(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21)

 

 

삼매의 경지에 대하여 요약하면 심사희락정(尋伺喜樂定)’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정은 네개의 선 모두 공통으로 들어 가지만 단계에 따라 나누면 다음과 같다.

 

초선, 심사희락정(尋伺喜樂定) 모두 있다.

이선, 심사가 탈락 되고, 희락정(喜樂定)만 있다.

삼선, 희가 탈락 되고, 락정(樂定)만 있다.

사선, 락이 탈락돠고, ()만 남았다.

 

단계가 올라 감에 따라 하나씩 떨어져 나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심사희락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말일까.

 

신통의 토대가 되는 네번째 사선(四禪, 빠다까자나)

 

()은 일으킨 생각을 말하고, ()는 지속적인 고찰을 말한다. 이들 모두가 언어적 사유에 속한다. 심과 사는 초선에는 있지만 2선 이상에서는  사라진다.

 

다음으로 희()는 빨리어로 삐띠(piti)’라 말하고 거친행복 즉, 희열을 말하는데 3선에서는 사라진다.

 

()은 빨리어로 수카(sukha)’라 하는데 잔잔한 행복을 말하고 사선에서는 사라진다. 4선에서는 정만 남게 되고 지극히 평온한 상태가 되고 심리상태가 매우 깊어지는 단계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단계에 이르면 행복감까지 사라질 뿐만 아니라 호흡도 끊어 진다.

 

그래서 신통은 사선에 들어야 얻어지게 된다고 한다. 사선을 빨리어로 빠다까자나(padaka-jjana)’라 하여 신통의 토대가 되는 선이라 한다.

 

근접삼매(욱가하니밋따)와 본삼매(빠띠바가니밋따)

 

다음에는 어떤 방법으로 사마디를 닦을 것인가. 구체적인 방법이 청정도론에 나와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대상에 집중하기 위하여 까시나(kasina)’를 사용한다고 한다. 대상으로 삼는 것은 40가지에 이르는데 그 중에 진흙으로 만든 까시나가 있다. 이 진흙 까시나에 집중하면 표상이 뜨게 되는데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익힌표상이다. 빨리어로는 욱가하니밋따(uggaha-nimitta)’라 한다.

눈앞의 대상과 똑같이 마음에 인지된 대상의 복사판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단계를 근접삼매단계라 한다.

 

둘째, 닮은표상이다. 빨리어로 빠띠바가니밋따(patibhaga-nimitta)’라 한다. 익힌 표상에서 복사된 대상이 더욱 더 청정하고 완전한 형태로 마음에 확고 하게 자리 잡은 표상을 말한다. 이 단계를 본삼매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사마디가 중요할까. 삼매를 닦으면 악도에 태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는 위빠사나

 

셋째, ()이다.

빨리어로 빤야(panna)라 하고 통찰지로 번역 된다. 즉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한 실천 수행 방법은 위빠사나(vipassana)라 불리운다.

 

위빠사나는 이제 까지 남방소승불교의 수행방법으로 폄하 되어 왔다. 그러나 초기경에는 열군데 이상 나타나고 있다. 디가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상윳다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등에 나타나고 특히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5-6곳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은 특히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구별하여 설한것으로 되어 있다. 주석서에는 더욱 더 구체적으로 설명 되고 있고 후대에 미얀마에서 전승 발전 시켜온 대표적인 부처님 수행법이라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대승위빠사나, 선불교이전의 중국의 대표적인 수행 방법

 

수행방법에는 크게 두가지 있다. 하나는 사마타(samatha) 이고 또 하나는 위빠사나이다.

 

중국에서는 사마타를 지()로 표시 하고, 위빠사나를 관()으로 표시 하였다. 그래서 지관수행은 선불교가 유행하기 이전 까지는 중국의 대표적인 수행 방법이었다. 4-5세기에 천태지관(天台-止觀)’은 경전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대승위빠사나수행방법이었다. 따라서 중국불교에서 위빠사나가 수행 되지 않았다고 주장 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라 볼 수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마타()는 삼매()와 동의라고 볼 수 있다. 삼매 를 닦는 것은 48정을 닦는 것이라 볼 수 있다. 48정이란 무엇인가. 4선은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을 말하고 8정은 여기에다 공무변천, 식무변천, 무소유천, 비상비비상처를 더 한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는 빤야()와 동의로 볼 수 있고, 통찰지를 일으키는 구체적인 수행법이다. 즉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사마타는 표상, 위빠사나는 ()’

 

첫째,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마타는 표상을 대상으로 한다. 표상은 빨리어로 니미따(nimita)’라고 말한다. 또 다른 말로는 개념, 빨리어로 빤야띠(pannatti)’라 말한다. 반면에 위빠사나는 법을 대상으로 한다. 법을 빨리어로 담마(dhamma)’라 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오온 12처와 같이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에 부딪치는 모든 대상이 법이라고 볼 수 있다.

 

사마타에서는 대상을 개념으로 보아야 표상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법은 개념일 수 없다. 법의 성질은 무상 고 무아이고 찰라생 찰라멸하기 때문이다.

 

사마타는 집중, 위빠사나는 통찰

 

둘째, 특징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마타는 대상을 집중하는 것이다. 즉 마음을 한끝으로 모으는 것을 말한다. 빨리어로 찌따사에까가따 (cittassa-ekaggata)’라 말한다.

 

반면에 위빠사나는 대상을 통찰하는 것이다. 즉 꿰뚫어 보는 것이다. 매우 날카로운 맛이 난다. 방법으로는 신수심법이 있다.

 

사마타는 닮은표상, 위빠사나는 무상 고 무아

 

셋째, 핵심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마타는 닮은표상을 보는 것이고, 위빠사나는 무상 고 무아를 보는 것이다.

 

사마타는 일시적 해탈을, 위빠사나는 완전한 해탈을

 

넷째, 해탈의 경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마타는 일시적 해탈이다.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지며 5가지 장애개 제거 되어 본삼매에 들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나, 본삼매에서 나오면 다시 장애가 일어난다. 따라서 일시적 해탈이라고 볼 수 있고 이것을 심해탈(心解脫)’ 이라고 한다.

 

반면에 위빠사나는 완전한 해탈이다. 이것을 혜해탈(慧解脫)’이라 하고 빨리어로는 빤야위무띠(panna-vimutti)’라 한다. 즉 마음을 깊이 관하여 통찰하여 얻은 해탈을 말한다.

 

혜해탈은 무상 고 무아를 보기 때문에 본삼매에서 얻어 질 수 없고 찰라삼매에서 얻어진다. 보통 찰라삼매를 초선의 경지로 보고 근접삼매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무상을 보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있어야 한다. 그 상태를 찰라삼매라 하고, 빨리어로는 카니까사마디(khanika-samadhi)’라 한다.

 

사마타는 상수멸정(想受滅定), 위빠사나는 찰라삼매를

 

넷째, 궁극적인 경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마타는 48정을 말하고 가장 높은경지가 '상수멸정(想受滅定)’이다. 상수멸정은 인식과 느낌이 소멸된 경지로서 몸과 목숨은 붙어 있지만 수상행식으로 대표 되는 정신현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상수멸정에 들었다 나오면 불환과나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찰라삼매로서도 상수멸정 없이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매와 같은 따뜻함이나 편안함은 없기 때문에 마른 위빠사나라 부르고 빨리어로는 꾹까위빠사나(kukkha-vipassana)’라 한다. 이렇게 삼매 없이 위빠사나를 닦는 것을 순수위빠사나라한다. 즉 순간적인 마음집중을 바탕으로 하여 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말한다.

 

각자의 기질에 따라서

 

청정도론에서는 정혜 삼학을 균등하게 닦을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미얀마에서는 순수위빠사나를 강조한다. 

 

사마타를 닦아야  하느냐, 아니면 닦지 않고 위빠사나만 해야 하느냐는 기질에 따라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부처님의 제자들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았다는 것이다. 순수위빠사나를 먼저 하고 나중에 사마타를 할 수 있고, 반면에 사마타를 먼저 하고 나중에 위빠사나를 하는 것은 개인의 성향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으로 각묵스님의 불교tv 강의를 요약 정리 하였다.

 

 

 

2009-05-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