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재가불자에게 최고의 스승은

담마다사 이병욱 2009. 5. 15. 10:27

 

재가불자에게 최고의 스승은

 

 

 

 

 

 

 

 

스승의 날 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말은 촌지이다.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어떻게 해서 든지 사례를 하려 할 것이다. 금액을 얼마로 해야 욕먹지 않을지 고민도 되고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프게 하는 날이 스승의 날이다.

 

촌지 주는 날

 

스승의 은혜에 대하여 단 하루라도 감사하게 생각 하라는 뜻에서 만들어 놓은 스승의 날이 촌지 주는 날로 변질된 것은 항상 문제시 되어 온 사항이다.

 

초중고 같은 경우 의무적으로 다니기 때문에 스승을 선택할 여지가 없다. 또한 한 스승 밑에 수 많은 학생이 있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 개념이 희박 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대학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대학원 정도라면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선택 하기도 하지만, 또한 스승이 제자를 선발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케이스의 경우 거의 매일 스승의 지도를 받기 때문에 1 365일이 스승의 날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사회에 나오면

 

사회에 나오면 스승이 없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이기 때문에 스승이 필요 없을 것이다. 스승이 계속 필요 하다면 더 배워야 할 것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가장 큰 차이는 수업료를 지불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라 볼 수 있다. 프로는 돈을 받으면서 일하지만, 아마추어는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 돈을 받으면 가르쳐 줄 의무가 있다. 반면에 수업료를 지불 하면 배워야 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반드시 학교 뿐만 아니라 학원이나 강습소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학교나 학원이나 강습소에만 있는 것일까.

 

현대인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가까이에 있는 종교 단체에 가입하면 누구나 신행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나 성당, 절에 다닌다고 했을 때 그 때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볼 수 있을까. 무언가 가르쳐 주고 전수 받는 다고 했을 때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 되지만 일방적으로 전달 한다면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나 성당 또는 절에 다닌 다고 해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보기 보다 믿고 따르는 신도로서의 관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스승도 스승 나름일것

 

그러나 수행을 위주로 하는 불교는 좀 다르다. 수행을 점검 해주기 때문에 단순히 믿고 따르는 신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로서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스승은 법을 전달 하고 제자는 법을 전수 받는 입장이라면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스승도 스승나름이라 볼 수 있다. 스승을 선택하는 조건을 든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느 경전에 근거 하고 있는가.

둘째, 어느 주석서에 근거 하고 있는가.

셋째, 어느 스승으로 부터 전수 받았는가.

넷째, 언행이 일치 하는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법맥에 관한 것이라고 본다. 어느 스승으로 부터 전수 받아서 법의 맥이 이어 왔느냐에 대한 사항 이다. 만일 스승이 없이 혼자 배웠다면 자신이 스승일 것이다.

 

스승이 없는 재가불자

 

세속을 살아 가는 재가불자에게는 스승이 없다. 따라서 혼자 배우고 혼자 생각 하고 혼자 살아 간다. 어쩌면 자신이 스승인지 모른다. 그래서 독단에 빠질 수 있고 오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터넷 시대를 맞아 훌륭한 법문을 찾아서 들을 수 있다. 그 것도 부처님의 원음을 전달 하는 초기불교 전법사들이다. 바로 이런 분들이 재가 불자들에게는 가장 큰 스승이다. 비록 한번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동영상 강의를 통해 그 분위기는 느낄 수 있다.

 

옛날에는 스승을 반드시 찾아 다니며 배워야 했지만 생업을 가지고 있는 재가 불자들에게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저녁이나 주말에 배우러 찾아 간다고 할지라도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방송을 통하여 보거나 듣기도 하지만 지나면 그 때 뿐이다. 이런 경우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동영상으로 하는 공부는 매우 유용하다. 놓치거나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은 다시 돌려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스승은 일상에서 스스로 느끼며 체험 했을 때이다.

 

최고의 스승은

 

언제나 그렇듯이 계절의 변화는 극적이다. 늦깍이 아카시도 새옷을 갈아 입었으니 주변은 온통 초록일색이다. 그리고 청명하고 상큼한 봄날씨가 갑자기 비가 오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은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끊임 없이 변화 하고 모습을 바꾸어 나간다. 자연만 그럴까 사람역시 많은 변화를 거친다. 흰머리가 생기는가 고 주름이 생기고 몸의 기능도 예전 같지 않다. 이 모두가 무상 하다는 것이다. 말로서 이야기 해주지 않지만 변화되는 것을 보여 줌으로서 알 수 있다.

 

음주를 하고 흡연을 하는 순간은 강한 만족과 자극을 느낀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불쾌 하기 이를 데 없다. 감각적 욕망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때 뿐이다. 남겨진 것은 불만족스럽고 불쾌한 느낌이다. 즐겁기 위하여 쾌감을 느끼기 위하여 추구 하였지만 언제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귀결된다. 괴로운 것만이 고통이 아니라 즐거운 것도 고통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불쾌하고, 정신적으로 괴롭고 불만족을 느끼는 것이 본질임을 알 수 있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마치 화장실 가기 전과 갔다 온후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무언가를 이루고 났을 때 기분은 고양 된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 사이에 다른 변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과연 어느 마음이 내 마음일까. 나 자신도 잘 모르는 나의 마음이 과연 내 마음일까. 여기에서 무아를 본다.

 

모든 사람이 스승

 

살아 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사항은 나의 스승이라 볼 수 있다. 이들 모두가 무상 고 무아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말이 필요 없는 설법이다. 매일 매일 무상 고 무아를 체험 하며 살아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반드시 스승에게 배운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좌선을 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부딪치고 깨지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자연현상이나 몸의 현상의 변화 뿐만 아니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스승이라 볼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로 인하여 자극 받았다면 다시 한번 돌아 볼 수 있게 만들테니까.

 

 

 

200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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