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미륵존불과 바위덩어리, 점집과 무당집의 큰집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09. 5. 16. 15:18

 

미륵존불과 바위덩어리, 점집과 무당집의 큰집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우리는 행운의 겁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행운의 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과거 칠불 중의 네번째 부처님인 까꾸산다 붓다(Kakusandha Buddha) 부터 앞으로 오실 메떼야 붓다(Metteya Buddha, 미륵불)까지 5분의 부처님이 오고 가는 시기를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고따마 붓다도 들어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바위는

 

한 겁()이란 어느정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백과사전을 찾아 보면 범천의 하루인 인간계의 4 3200만년을 말하고 있지만 흔히 드는 비유가 바위론이다.

 

, 달구지로 한나절 걸리는 거리를 한변으로 하는 큰 바위를 100년에 한번씩 선녀가 내려 와서 옷깃으로 스쳐서 바위가 다 닳아져 없어 졌을 때의 기간을 말한다. 굳이 바위의 한변을 현대식으로 계산 한다면 14Km에 달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큰 바위가 지구상에 있을까. 자료를 찾아 보니 호주에 있었다. 에어즈락(Ayers Rock)이라고 불리우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바위이다.

 

백과사전을 보니 높이가 348m이고, 길이 3.6km, 둘레가 9.4km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변이 14km에 달하는 바위와 비교 하면 1/4밖에 되지 않는 사이즈이다. 그런데 에어즈락이 닳아 없어지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지구상의 격변이 없는한 풍화작용으로 닳아 없어 지는데 있어서 지구와 종말을 함께 할 가능성이 크다.

 

 

 

 

에어즈락, 출처:www.wayfaring.info/wp-content/uploads/2006/12/ayers-rock-1.jpg

 

 

 

그런 논리라면 일겁이라는 시간은 사실상 우주가 생멸하는 시간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서 5분의 부처님이 출현 하였고 앞으로 출현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들에게는 대단한 행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행운의 겁 시대에

 

그 이유는 3번째 부처님인 웻사부 붓다 (Vessabhu Buddha)에서 4번째 부처님인 까꾸산다 붓다 까지의 공백기간이 무려 30겁에 달했기 때문이다.

 

30겁이라면 우주가 30번 성주괴공 했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래서 현재의 우주가 존재 하고 있는 1겁이내에 4분의 부처님이 이미 출현 하였고, 또 한분의 부처님인 미륵부처님이 오신 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5분의 부처님이 오셨거나 오시는 것이 왜 행운일까. 바로 그 것은 정법을 전달 하기 위해서 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법은 오래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 되고 언젠가는 사라지고 만다. 그런 정법이 사라진 시기는  깜깜한 암흑천지와 같다. 싸움이 그칠 날이 없고 수명또한 짧아 진다. 그리고 온갖 삿된 사상이 난무 한다.

 

지금 보는 시대가 정법시대인가 아니면 상법시대인가 아니면 말법시대인가 아니면 아예 법이 없는 시대인가를 알아 보려면 민간의 신앙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샘플도시 안양에서

 

안양을 표본 도시라 한다. 또한 민심의 바로미터로 보고 있다. 따라서 선거 때 만 되면 여론조사의 샘플로서 선정 되기도 하고, 각종 통계를 내는 데 있어서 표본으로 활용 되기도 한다. 이유는 지역적으로는 수도권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골고루 모여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서민층에서 부터 중산층까지 계층 역시 고루 분포 되어 있어서 샘플링 하기에 딱 알맞다는 것이다. 이런 안양에서 종교의 행태를 분석 하는 것 역시 전국평균에서 크게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수도권 어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안양 역시 기독교세가 왕성하고 불교의 교세는 형편없다. 대형 교회와 대형성당은 쉽게 눈에 뜨이지만 사찰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다. 설령 사찰 비슷한 것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만()자가 붙은 점집이다. 간혹사찰이 있긴 하지만 독립건물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믈고 상가에 임차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외부에서 보면 매우 궁색해 보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에서 인식 하는 사찰의 개념은 우상숭배 내지는 미신행위 하는 곳으로 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만자를 붙인 점집과 보살이라고 칭하고 있는 무당들의 영향이 클 것이다.

 

바위덩어리를 모셔 놓고

 

안양의 어느 주택가에 가보면 점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당집도 아닌데 바위덩어리를 모셔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위 바로 옆에 간판에  대한불교조계종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종단소속 암자로 보인다. 그러나 주택가에 붙어 있는 안내판 주변에 암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바위덩어리 옆에 미륵존불이라고 음각된 석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부처님을 모셔 놓은 것임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미륵존불이라고 명칭 되어 있는 바위

 

 

 

바위를 자세히 드려다 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아무리 보아도 형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통 미륵불 같은 경우 투박하긴 해도 머리에 갓을 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미륵존불이라고 칭하고 있는 바위는 그 어떤 형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냥 단순한 바위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위 밑에는 촛불을 켤 수 있도록 칸이 마련 되어 있다. 그러나 촛불공양을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는지 폐쇄 되어 있다.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돌덩어리에 불과 함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 아닐까.

 

작은집과 큰집 이라는데

 

개신교나 천주교인과 같은 기독교인이 알고 있는 불교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가혹하다. 우상숭배 아니면 미신으로 보기 때문이다. 만자 붙인 점집이나 보살이라 칭하는 무당집을 불교의 작은 집정도로 생각 하고 있고 사찰을 큰집정도로 생각하여 싸잡아 취급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항에 대하여 그들의 무지를 나무라기 전에 먼저 비불교적이고 방편적인 행태는 없었는지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바위덩어리를 갖다 놓고 미륵존불이라고 칭하는 것이 과연 점집과 무당집과 비교 하여 다르면 얼마나 다르냐는 것이다. 그것도 불교계를 대표 한다는 종단의 간판을 내걸고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지금은 누구도 찾는 사람이 없는지 썰렁하고 신자들도 모두 떠난 듯하다. 그러나 볼썽 사납게 흔적은 남아 있어서 지나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교는 돌덩이나 숭배 하는 우상숭배의 종교로 각인 시키기에 딲 알맞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1700년 역사는

 

흔히 한국불교를 1700년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그런 전통이 무색하게 낡고 오래된 것으로 간주 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모든 정보가 오픈 되고 공유화 되는 정보통신시대에 한국불교에 대한 정체성 논란도 뜨겁다. 과연 1700년 역사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일부 식자들은 한국불교의 1700년 역사를 부끄러운 역사 이었다고 폄하 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것은 불은(佛恩)에 대한 배반이 더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어야 함에도 불구 하고 기복적이고 방편적인 비불교적인 요소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불교적인 요소가 마치 불교인 것 처럼 포장 되어서 동네 골목의 한켠에 미륵존불이라는 바위덩어리가 서게 된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결국은 정법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전수 받은 불교가 민간으로 내려 와서 동네 끝에 이르렀을 때는 바위덩어리 숭배로 까지 발전 된 것이다.

 

진정한 자주불교를 위하여

 

미륵부처님을 기다리기 위하여 미륵불이라는 바위덩어리를 만들어 놓고 빌 필요는 없다. 정법이 살아 있다면 바로 그 시대가 모든 부처님이 살아 있는 시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따라 그 동안 모르고 지내 왔던 정법이 엄연히 존재 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제는 더 이상 격의화된 불교, 여러 단계를 거친 불교, 방편불교, 기복불교 없이 부처님당시의 불교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서 있어서 진정한 자주불교를 실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따라서 한국불교가 더이상 점집과 무당집의 큰집과 같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이제 부터라도 부처님법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2009-05-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