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MB식 중도실용주의와 불교의 중도는 어떻게 다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09. 6. 26. 12:23

 

MB식 중도실용주의와 불교의 중도는 어떻게 다른가 

 

 

 

 

 

 

출근 하다 보면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버스나 전철에서 보는 사람들은 항상 그 시각에 볼 수 있다. 처음에 한 두번은 무심코 마주쳤다고 생각 할지 모르지만 여러번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보게 된다면 익숙하게 된다. 만일 어느 날 보이지 않게 된다면 그 사람 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 아닌지 걱정 하는 단계에 까지 발전 하게 된다.

 

귀가길에 보는 장면

 

일을 마치고 늦게 귀가 할 때 항상 보는 사람이 있다. 동네의 자그마한 수퍼의 노천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이다. 그의 앞에는 늘 소주2병에다 병맥주 한병이 놓여 있다. 안주는 과자봉지 하나 아니면 과일 한 두개가 전부이다. 술은 다 마셨는지 병은 비어 있고 그 남자는 한 없이 거리를 응시 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 한 두번 보았을 때는 특이하게 술을 마시는 것으로 생각 하였으나 나중에 자주 목격 하게 되자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 졌다. 그런데 어느날 그 남자가 보이지 않게 되자 어떤 일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귀가 하는 길에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장면은 치킨을 파는 사람이다. 차에다 전기구이 통닭시설을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차량이나 사람들에게 파는 것이다. 그런데 파는 장소가 사람들의 왕래가 그 다지 많지 않은 다리 위라는 것이다. 심야에 보는 그 남자는 항상 라디오를 듣고 있다. 그리고 마치 도를 닦고 있듯이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하루일과를 마무리 하는 시간은 거의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다.

 

니트족이라는 말을 뉴스에서 들었다. 니트족은 나라에서 정한 의무교육을 마치고 난 뒤에도 진학이나 취업을 하지 않고 또한 직업훈련을 받지 않으면서 놀고 먹는 젊은 실업자를 말한다. 이들의 숫자가 113만명이라고 한다. 청년실업자가 공식적인 통계로는 30만명 가량이라고 하지만 이 보다 4배나 많은 수치인 것이다.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수입이 별 볼일 없는 계층과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노는 계층이 통계수치 보다 훨씬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자영업자와 실업자, 비정규직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을 서민 또는 소시민이라고 말한다. 이들 돈 없고 힘없는 서민들을 위하여 엠비가 친서민정책의 일환으로 중도실용주의를 표방 하고 나섰다. 잊을만 하면 한번씩 재래시장을 둘러 보면서 민생쇼를 하고 있는 중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중도란 무엇일까

 

불광사의 불광법회가 있다. 인터넷으로 본 동영상 법회중에 마성스님의 법문(http://www.bulkwangsa.org/movie/, http://www.ripl.or.kr/)이 있었다. 그 법회에서 스님은 중도를 명확히 정의 하였다.

 

중도는 크게 정치에서 사용 되는 중도와 종교에서 사용 되는 중도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말은 같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첫째, 용어해석의 차이이다.

 

정치권에서의 중도는 극좌도 아니고, 극우도 아닌 중간정도의 길을 의미하고 있다. 이념적으로 너무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 다 포용 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불교에서의 중도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불교에서의 중도는 중간정도의 길이 아니라 바른길이라는 뜻이다. 대표적으로 팔정도를 들고 있다.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 하지 않아야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경(S56:11) §§1~4)

 

 

부처님은 팔정도를 설하기전에 먼저 중도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먼저 쾌락의 탐닉과 자기학대에 몰두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 극단에 의지 하지 말고 중도로 가라고 말한다. 결국 이 중도는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부처님은 왜 쾌락의 탐닉과 자기학대에 몰두 하지 말라고 하였을 까. 그 것은 바로 경험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행이나 쾌락의 추구가 반드시 잘못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고행을 해도 고행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말고 해탈열반에 도움이 되는 고행을 하라는 것이다. 까샤파 존자의 두타행을 칭찬 하는 것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수경스님의 오체투지 역시 생명과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기 위한 설득력 있는 고행으로 받아 들여진다. 따라서 고행자체를 목적으로 여기는 자이나교와 같은 고행은 해탈열반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정수행 또한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선정에 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정을 통해서 지혜를 깨우쳐 진리를 바로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알라라 깔라마웃타카 라마뿟타와 결별 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는 바로 보는 눈과 지혜를 만들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서 열반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팔정도에는 항상 바른()’이라는 말이 들어 간다. 즉 정견(正見: Samma-ditthi), 정사유(正思惟: Samma-sankappa), 정어(正語: Samma-vaca), 정업(正業: Samma-kammanta), 정명(正命: Samma-ajiva), 정정진(正精進: Samma-vayama), 정념(正念: Samma-sati), 그리고 정정(正定: Samma-amadhi)이다. 빨리어 삼마(samma)바른()’ 이라는 뜻으로 각 용어의 앞에 항상 위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방법론적인 차이이다.

 

정치나 종교가 추구 하는 목표는 이 사회를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방법론에 있어서는 매우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먼저 정치권은 제도와 법을 고쳐서 이 사회가 행복 하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한다. 반면에 종교는 인간 개개인의 심성을 일깨워서 모든 사람들이 착하게 살 수 있도록 이상사회를 실현 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정치권은 왜 법과 제도에 의지 할까. 그것은 정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항상 반대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여가 있으면 야가 있고, 보수가 있으면 진보가 있다. 영원히 상대세력이 존재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항상 대립 하게 되어 있고 적당히 타협 할 수 밖에 없고,  정치지도자가 취할 수 있는 길은 항상 차선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정치로 말미암아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고, 반대로 피해를 보는 집단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정치인은 항상 다수의 의견을 따를 수 밖에 없고 많은 사람들의 이익이 되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바른정치를 한다고 생각 한다. 따라서 정치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가는 차선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종교는 다르다. 그 종교가 추구 하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신념은 교주가 말한 진리가 될 수 있고 경전상의 교리가 될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차선은 없다. 최선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종교는 최선을 고집하고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예를 든다면 동성간의 결혼문제가 대표적일 것이다. 정치논리로 본다면 지지 하는 사람이 많으면 합법화 할 수 있다. 선거에서 표를 의식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종교에서는 용납 되지 않는다. 차선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박쥐와 다를 바 없는

 

정치권에서 중도의 의미와 불교에 있어서의 중도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전체다수가 인기에 영합되고 현혹 되어서 잘 못 된 길로 가고 있을 때 단 한사람이라도 잘 못 되었다고 지적 하는 것이 불교적 중도이다. 차선책이 아닌 최선책의 바른길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닌 중간에 있는 중도라면 박쥐와 다를 바 없다. 보수면 보수, 진보면 진보 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 보다 명확한 것이 훨씬 낮다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입장차이가 크고 소통이 되고 있지 않다. 또한 보는 시야도 정 반대이다. 이와 같은 극도의 편가르기를 불러 온 것은 전적으로 통치를 잘 못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00만명이 애도 하고 조문한 것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인지, 또 용산참사로 인한 가슴의 멍든 상처를 모르고 있다면 탐진치의 3독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과 직결 되는 것 만 본다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의미의 중도는 항상 차선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바른 정치는 다수의견을 따르고 다수의 이익이 되는 정치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니고 양다리를 걸친 중도라면 박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엠비가 추구 하는 중도실용주의 라는 것이 박쥐와 같은 양다리 걸치기 중도를 말하는 것인지 두고 볼일이다.

 

 

 

2009-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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