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아름다움에 성(聖)스러움이, 육체자본주의와 마음의 등급

담마다사 이병욱 2009. 7. 4. 10:17

 

아름다움에 성()스러움이, 육체자본주의와 마음의 등급

 

 

 

 

 

 

3년전 중국 동관에 공장 셋업하러 갔었을 때 대만 관리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재키요이었다. 영어로는 Jackeyo라고 쓰는데 특이한 영어식 이름이다.

 

미국유학파인 그는 영어가 매우 능숙한 전형적인 비즈니스맨이다. 짧은영어로 그와 여러대화 중에 얼굴성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대만에서는 해마다 여름 휴가때 여자들이 단체로 서울로 몰려 가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TV에서도 나오는 이런 장면은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의 여자들은 90%이상이 다 성형미인이 아니냐고 이야기한다. 반면에 대만 여자들은 성형 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한국여자들 보다 더 순수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육체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

 

토요일 아침에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육체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모와 육체가 아름다워야 대우를 받는 시대라는 것이다. 면접을 하여도 미모가 뛰어나면 더 합격할 가능성이 높고, 반면에 첫인상이 좋지 않다면 면접관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결혼시장에 있어서도 미모에 따라 등급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정치판도 마찬가지이다. 탤런트 빰치는 대변인을 앞세우는 것 역시 이미지정치를 하기 위한 수단 이라는 것이다.

 

이런 외모지상주의는 영상시대에  접어 들면서 특히 심화 되었고 자신의 외모와 몸매를 가꾸는데 있어서 공을 드리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외모를 수정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이는 곧 육체가 재산인 육체자본주의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은 서로 통한다는데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은 같은 개념일까. 최재목님의 글(http://blog.daum.net/bolee591/13452006)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아름다움의 수준이 그 사회의 수준이다. 그 사회를 알고자 하면 그들이 어떻게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지를 보라. 아름다움엔 사람다움과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은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닌 불상을 예로 든다면 미학자의 눈에는 단지 아름다음()’로 비칠 수 있겠지만, 불교신자의 눈에는 성스러움()’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와 성은 다른 것이 아닌 불이(不二)라는 것이다.

 

또한 얼굴을 으로 비유 하기도 하였다. 인간을 제외한 만물에서 아름다움은 에서 발견 된다는 것이다. 화엄경의 제목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화엄경(華嚴經)》을 중국에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 번역한 것은 ‘화엄(혹은 佛華嚴)’이 갖는 두 가지 뜻 즉 ① 간다 비유하(gan.d.-vyu-ha: 雜華-嚴飾→華嚴),19) ② 아바탐사카(avatam.-saka: 꽃 장식 즉 꽃으로 만든 冠 또는 귀걸이)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해서 번역이 되었는가 하는 경위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명백한 것은 지고의 성스러운 부처()와 아름다운 꽃()을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편집한 것이냐 하는 그 핵심적인 문제, 즉 ‘인도적 성()/()가 중국적 사유 속에 수용되어 어떻게 재편집되었는가’를 물어 볼 만한 것이다. 그 재편집의 근저에 있는 ‘성·미의 불이(不二)’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화엄경의 제목인 화엄(華嚴)의 뜻이 꽃으로 만든 장식인데 이것은 성스러운 붓다와 아름다운 꽃이 서로 다르지 않은 불이(不二)라는 말이다. 즉 성스러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성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과 예쁜 것은 다르다. 예쁜 것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고 또한 성스러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얼굴을 수정 하여 성형수술을 하여 예쁜 얼굴이 되었더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설령 성형수술을 하여 아름다운 얼굴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것은 정신이다. 즉 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이란

 

외모와 마음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수마나 김한상님의 생활속의 아비담마(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를 보면 마음에도 등급이 있다고 나온다. 우선 마음의 성질에 대하여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일까. 아비담마에서는 대상이 있어야 마음이 일어 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과 부딪쳣을 때만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섯가지 감각대상과 다른 모든 인지 대상을 인식할 때 아는 마음(意識)’이 일어 나는 것이다. 그래서 관련 대상을 아는 능력을 마음(찌따,citta)’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의 성질에 관해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마음은 저 멀리까지 갈수 있으며,

혼자서 떠돈다.

마음은 물질적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보통은 동굴 속에 산다.(법구경 37게송)

 

 

대상을 알게 되는 마음은 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 있으면서 부산에 있는 어떤 물건이나 어떤 사람을 생각 한다면 실제로 부산에 간 것이나 다름 없다.

 

또 마음은 혼자 떠 돌아 다닌다는 것이다. 즉 마음은 매우 빠르게 일어 났다 사라진다는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도 수백만의 마음이 일어 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떠 도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마음은 형상이나 모양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하얐다거나 검다거나 뚱뚱하거나 훌쭉 하다고 말할 수 없고 단지 그저 대상을 인지 하는 능력만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마음은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과 부딪쳤을 때 일어나지만 그 토대는 심장을 토대로 일어 난다는 것이 동굴속에 머문다는 말이다.

 

마음에도 등급이

 

마음은 형태가 업지만 모든 감각대상을 인지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있는 것이고 사람의 생김새나 외모가 다르듯이 사람의 마음도 모두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무겁고 형편 없이 생긴 몸은 힘과 활력이 넘치는 몸과 아주 다르다. 마찬가지로 둔감하고 굼뜬 마음은 명랑하고 재기 넘치는 마음과 완전히 다르다.

 

다른 사람보다 미모와 몸매등 육체적 매력이 월등히 아름답고 잘 생긴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추함에 있어서도 아귀나 아수라만큼 흉측하고 혐오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있어서도 다양한 등급의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데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평범한 사람에서부터 뛰어난 사람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하다. 또한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 역시 다양한 등급에 따라 사악함과 아둔함이 다를 수 있다.

 

미모와 육체적 매력이 가장 뛰어 나다는 영예를 얻은 몸매에서도 다양한 품위 등급이 있는 것처럼 가장 추악한 아귀와 아수라에도 다양한 등급의 흉칙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선한 마음의 범주에도 평범한 사람에서부터 아주 예리한 지성을 지닌 가장 성스로운 인물까지 다양한 등급이 있으며, 불선한 범주에 드는 마음의 등급도 사악하고 못되고 혐오스러운 부류에서부터 극도로 아둔하고 가장 사악무도한 부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성()스러움이

 

아름다움에 성스러움이 있고,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은 서로 통한다고 하였다. 단지 육체적인 외모만 가꾸고 수정하여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마음을 가꾸고 수정 하지 않는 다면 성스럽다고 볼 수 없다.

 

시골에서 태어 나고 자란 어떤 사람이 도시인의 유행과 삶의 방식을 따라 배우고, 몸과 마음을 스스로 길들이면 자신의 신체적 외모도 바뀌며 일이년 안에 주변 사람들이 몰라 볼  정도로 세련되고 멋지게 변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매일 관찰하고 날 뛰어 다니는 마음을 길들인다면 고귀한 마음의 소유자가 될 것이고 이삼년 뒤에는 자신도 몰라 볼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아름다움이 성스러움 아닐까.

 

 

 

2009-07-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