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만(卍)자 붙은 점집을 보며, 무늬만 불교인 시대에 신불교 운동할 사람들은

담마다사 이병욱 2009. 8. 23. 11:17

 

만(卍)자 붙은 점집을 보며, 무늬만 불교인 시대에 신불교 운동에 나서야 할 사람들은

 

 

 

스포츠 신문을 우연히 보다 보면 신문의 한쪽 면을 도배 하다시피한 광고를 볼 수 있다. ‘()’을 보라는 광고이다. 거기에는 역술인들의 이름이 죽 나열 되어 있고 심지어는 사진까지 올려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이름 중에는 ‘~보살식의 이름이 많고 때로는 승려의 이름을 올려 놓은 경우도 있다. 이런 식의 점보라는 유혹이 스포츠신문에 만 있을까.

 

도처에서 보는 점집

 

수도권 시민들이 즐겨 찾는 유원지 가보면 역술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역술인 중에 승복차림의 역술인이 눈에 뜨인다. 회색승복을 걸치고 모자를 쓰고 있는데 진짜 스님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다만 승복을 입고 있어서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스님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주 보는 값이 다른 곳 보다 더 비싸다. 바로 옆의 일반인 복장을 한 사람은 5000원을 받는데 비하여 승복을 입은 사람은 ‘7,000을 받기 때문이다. 아마도 '승복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 같다.

 

 

 

유원지에서 볼 수 있는 광경 

 

 

 

점 보는 집은 유원지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든 지 볼 수 있다. 점집은 주로 빨간 깃발로 표시 하고 있고 간판에는 만()자가 붙어 있다. 이름도 대부분이 ‘~보살하는 식이다.

 

그런 점집을 보면 허름한 주택가나 상가의 한 귀퉁이를 차지 하고 있어서 매우 옹색해 보인다. 그런데 대로 변에 만()자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점집을 볼 수 있었다. 창문에 사주역학 풍수지리 제자상담 이름작명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만 본다면 흔히 말하는 동네점집보다 더 큰 철학관 수준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바로 옆 창문에 기공퇴마 기공치료 영가천도 구병시식 빙의치료와 같은 문구가 더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아서 철하관 보다 더 큰 집이라 볼 수 있다. 점을 보는 것은 물론 기치료와 영가천도까지 하는 일종의 백화점과 같은 종합 철학관이라 볼 수 있다.  그 종합철학관과 같은 단체의 이름은 간판에 대한불교OO이라고 붙어 있었다.

 

 

 

 도심 대로변에서 볼 수 있는 광경

 

 

 

 

 

 창문에 다양한 항목이 나열 되어 있다.

 

 

 

그 종단을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보았다. 어엿한 불교종단중의 하나이다. 종지는 불타의 부처님 법에 의지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 한다는 대승보살도를 구현한다는 내용으로 나와 있다. 소의 경전은 대승불교의 대표경전이라고 볼 수 있는 금강경과 화엄경이 들어가 있다. 또한 대한불교 사암연합회소속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처님 법을 따르는 불교종단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창문에 적혀 있는 내용만 본다면 무뉘만 불교이지 점집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 차라리 당당하게  점보는 집이라고 써 놓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점집도 나름대로 사회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알아야 될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은

 

이제 까지 점을 본 적이 없다. 점을 보려면 태어난 시간을 알아야 하는데 가르쳐 주어도 자꾸 잊어 버린다. 점을 보러 가는데 있어서 태어난 연월일(年月日)과 시()가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시를 어렴풋이 알고 있으니 정확한 점괘가 나올 것 같지 않아 보지 않는 이유도 있다.

 

점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면서 점에 대하여 거론 하는 것이 바람직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점집 체험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은 마치 연애에 대하여 글을 쓰려면 연애를 해 보아야 하고, 감옥에 대하여 글을 쓰려면  감옥에 가 보아야 된다는 이야기와 같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또한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대사의 예를 들 수 있다.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될 것도 있지만...포기 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죠.”

 

 

티벳영화 삼사라에 나오는 대사이다. 주인공 승려가 은사스님에게 한 말이다. 포기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이란 다름아닌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포기 하기 전에 체험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결국 환속을 하고 사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식까지 생긴 상태에서 재출가를 결심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 갖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몰라도 될 것을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리고 반드시 다 체험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수 많은 생을 살아 오면서 이미 다 겪은 일인지 모른다. 그런 일을 모르기 때문에 반복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알면 당하지 않는다. 알면 속지 않는다. 어떻게 알아야 할까. 그 것은 정진(精進)’이라는 말로 요약 될 수 있을 것 같다. 초기불교를 공부 하면서 가장 뇌리에 남는 말은 정진이다. 비록 이 말을 인터넷 강의를 통해서 들었지만 매우 의미 있는 말이라 여겨진다.

 

정진이 왜 중요한지 잘 몰랐으나 각묵스님의 인터넷 강의를 듣고 나서 알았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나의 마음에서 일어 나는 심리현상을 파악 하여 그 현상이 나에게 유익한 것인지 또는 해로운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 것이 선법이면 증장시키고, 불선법이면 가차 없이 쳐 내야 한다.”

 

 

또한 이 정진이라는 말은 상좌불교의 실천수행법인 37조도품에서 가장 많은 9번이나 나오는 핵심 중의 핵심항목이다.

 

일부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는 점집

 

물질만능주의시대에 제도권 종교에서 자신의 고민이나 의견을 들어 줄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같은 신자라도 시주를 많이 하는 사람,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 더 우대를 받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돈을 많이 내고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스님이나 목사, 신부와 대면할 기회도 많을 것이다. 또한 단체 내에서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소속감도 높을 뿐만 아니라 남 다르게 신심도 높을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대분의 신자들은 용기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보시금이 적어서 일까 대면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찾아 가는 곳이 부담 없는 점집이라고 한다.

 

점집에 가면 다 들어 준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고 즉석에서 처방까지 내려 주니 점집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삼분의 일은 운명론적이라고 한다. 운명이나 숙명을 쉽게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점집이 성행하는 이유의 근거이기도 하다. 운명론적이고 숙명론적인 사람이 삼분의 일이라면 무려 1500만명이 잠재적인 고객이되는 것이다. 그런 거대한 시장이 있기에 점집이 성행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점집을 가장 두려워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유일신교이다.

 

유일신교는 왜 점집을 두려워 하는가

 

유일신교에 바라 보는 점집은 불교 보다 더 극복해야 될 대상을 점집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 목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기독교의 교회가 전국적으로 5만개에 달하고 거기에 해당 되는 종교인만 해도 30만명이라 하는 데 거기에 버금 가는 것이 점집이라는 것이다. 즉 점과 같은 역술로 영위해 가는 곳이 교회보다 더 많고, 또 그 역술로 삶을 영위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기독교의 종교인 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1500만명이라는 잠재적인 수요을 가지고 있으니 종파로 따진 다면 최대의 신자를 가진 종교단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점집은 또한 기존 제도권 종교가 하지 못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점집이 유일신교의 가장 두려운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도시에서 사찰은 볼 수 없지만 점집은 교회 숫자 만큼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대상이 겹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역술인에게 빼앗길 것 같아서이다. 그래서 그들이 항상 들고 나오는 것은 미신행위론과 우상숭배론이다

 

사찰아 무너져라했을까

 

몇년전 부산의 해운대 백사장에서 유일신교의 기도회가 열렸었다. 그 자리에서 유일신교의 청년들은 사찰아 무너져라하고 외쳤다고 한다. 부산에 있는 유명사찰 이름을 하나씩 거명 하면서 없어지기를 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때 당시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고 당사자 중의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공식적인 사과는 아직까지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 때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을까. 그들은 사찰과 점집을 같은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 점집은 작은집이고 사찰은 큰집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무종교인도 일부 그렇게 생각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점집에 만()자가 붙어 있다든가 ‘~보살하는 식의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또 일부 사찰에서 점집과 같은 비불교적인 행위를 하는 곳도 있는 곳도 사실이다. 아예 노골적으로 대로변에 대한불교OO라는 간판을 붙여 놓고 갖은 비불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매일 지나면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보고 유일신교에서 점집과 사찰을 같은 개념으로 보고 미신행위우상숭배를 한다고 간주하고 사찰아 무너져라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같다고 해서

 

새정부 들어 종교편향이 갈 수록 심화 되어 작년에 대규모 불교도 대회가 두 번 열렸었다. ‘7.4시국 법회‘8.27 범불교도 대회이다. 그 때 당시 목사들은 노골적으로 불교비하 발언을 서슴치 않았고 불교를 미신행위나 하고 우상숭배나 하는 저급한 종교로 매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열린 불교도 대회는 호응이 대단 하였다. 그 동안 억눌린 감정이 일시에 폭발 하는 듯 하였다. 다시는 종교편향과 불교비하 발언이 일어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정부에 강력란 경고의 메세지를 날리기도 하였다.

 

 

 

 2008년 8.27 범불교도대회

 

 

 

그러나 그런 대회가 열렸다는 것은 거꾸로 불교가 대단히 큰 위기를 맞고 있다는 반증이다. 기반이 탄탄하고 거리낄 것이 없다면 굳이 그런 대회를 열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범불교도대회라고 하면 불교와 정서를 함께 하는 단체도 포함 되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불교와 같이 보이지만 속으로는 부처님법과 동떨어진 점보는 행위나 각종 기복과 방편이 판치는 행위를 하는 무뉘만 불교인 단체를 말한다.

 

이렇게 비불교적인 요소를 가진 단체를 끌어 안는 다면 여전히 시비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일신교의 눈으로 보았을 때 여전히 미신행위나 하고 우상숭배나 하는 작은집과 큰집 차이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신불교 운동에 나서야 할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는 불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세를 업고 들어온 유일신교와 공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종교의 눈을 항상 의식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들 종교는 또한 매우 공격적이다. 틈만 나면 불교를 무너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의 공격적인 용어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미신행위우상숭배로 요약 된다. 전가의 보도 처럼 써 먹는 이런 용어에 불교는 속수무책이다. 불교도 대회를 열어 항의도 해 보지만 그 때 뿐이다.

 

앞으로 이들 유일신교의 공격은 더욱 더 거세질 것이다. 더구나 장로 대통령까지 배출한 마당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공격적인 전도를 할 뿐만 아니라 공직사회에서는 노골적으로 성시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결국은 기독교국가의 완성을 위하여 나아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때 불교가 살아 남으려면 정법(正法)으로 가는 길 밖에 없다. 그 정법은 부처님법을 따르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충실 하는 것이다. 신격화된 부처님이 아니라 인간적인 부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 하신 법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유일신교와 차별화가 되어야만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유일신교와 비슷하게 가게 된다면 결국 흡수 되고 말것이다. 옛날 인도에서 유일신을 가진 이슬람교가 침공 해 왔을 때 힌두화된 불교가 대응하지 못하고 맥없이 멸망하였듯이 불교가 불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 하였을 때 그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점집인지 불교인지 구분이 안 되는 현실에서 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남겨 주고 있다. 그런 신불교 운동에 나서야할 사람들은 불교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 네티즌이다. 네티즌은 스님이나 교수와 같이 어떤 단체에 소속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해관계에 있어서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2009-08-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