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부처님은 어디로 출가 하였을까, 삼보는 없고 이보(二寶)만 있는 도시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09. 9. 5. 12:00

 

부처님은 어디로 출가 하였을까, 삼보는 없고 이보(二寶)만 있는 도시에서

 

 

 

 

 

 

도시에서 사찰 구경하기가 힘들다. 설령 보인다고 하더라도 상가건물에 세들어 있는 경우가 많아 보기에도 매우 옹색하고 빈궁해 보인다. 반면에 교회와 성당건물은 웅장하기 그지 없다. 따라서 드나드는 사람들 역시 성경찬송을 보라는 듯이 들고 잘 차려 입은 옷과 함께 들락 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시의 교회와 성당은 규모가 거대하고 웅장하다(군포).

 

 

 

도시의 하늘아래 보이는 것은 교회와 성당이고 사찰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도시에서 왜 이렇게 사찰을 보기 힘들까. 우선 살고 있는 곳의 종교시설장소를 조사해 보기기로 하였다.

 

사찰과 교회와 성당을 조사해 보니

 

안양시는 우리나라에서 표본도시로 알려져 있다. 서울 남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구도시와 신도시가 조화되어 있고, 서민과 중산층이 골고루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들 또한 골고루 분포 되어 있다. 따라서 항상 민심을 측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하는 지역이다.

 

 

 

 

다음 스카이뷰에서 본 안양권 도시.

안양, 군포, 의왕, 과천은 같은 생활권이다.

 

 

 

 

안양에 사찰은 몇 개나 되고 교회는 얼마나 될까. 조사를 위하여 전화번호부를 활용 하였다. 요즘은 책으로 된 전화번호부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전화번호부를 활용 하기로 하였다. 그런 서비스를 하는 곳이 있었다. 인터넷114라는 사이트 (http://www.114int.com/114int/index.php) 이다.

 

인터넷114 에서 조사한 결과 예상대로 이었다. 이왕 조사한 김에 같은 생활권인 군포, 의왕, 과천도 함께 알아 보았다.

 

 

 

 

 

 

 

 

 

61

50

24

471

 

 

27

10

10

171

 

 

13

14

12

103

 

 

7

7

4

52

 

 

108

81

50

797

928개소

 

비율

8.7%

5.3%

85%

100%

 

 

여기서 키워드는 기독교 같은 경우 교회, 불교는 불교, 천주교는 천주교를 사용 하였다. 사찰이나 로 하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불교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불교용품원불교도 함께 나오는데 이를 제하였다. 천주교의 경우 중복된 성당 이름도 제하였다. 다만 교회는 너무 많아 중복된 이름은 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비율은 매우 낮기 때문에 통계에 잡힌 숫자 그대로 실었다.

 

사찰대 교회의 비율이 5.6% 94.3%

 

표를 보면 안양권 전체사찰은 81개로서 교회와 성당을 모두 합한 928개에서 8.7%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성당을 빼고 교회와 단순 비교 하면 5.6%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전국적인 현상과 얼마나 벌어질까. 2008년도 매일경제의 보도(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8&no=526388) 에 따르면 한국불교의 총 사찰 수는 14000여개로 나와 있다. 그리고 승려수는 25000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신도수는 1,072만명이다. 반면에 개신교의 교회는 보통 5만개라 하고 교역자는 10만명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사찰대 교회의 비율을 따져 보면 사찰이 21%이고, 교회는 79%를 점한다. 안양권에서의 5.6% 94.4%와 비교 하면 꽤 높은 수치이다.

 

사찰비율이 도시에서현저 하게 떨어지고 전국적으로 높은 현상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찰이 산중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과 법의 2보만 있는 도시

 

안양권에 있는 사찰 81개소는 대부분이 산중에 있다. 도심에 포교당 형식으로 건립된 사찰은 드믈다. 안양의 한마음선원, 지장선원, 통도사 포교당인 보림사, 의왕의 용화사 정도이다.

 

불교 불모지나 다름 없는 안양에서 포교를 한다고는 하지만 요즈음 모 인터넷불교신문에서 주인공 문제로 이슈화 되고 있는 선원이 있는가 하면, 안양불교문화원 같은 대형불사가 지지 부진한 사찰도 있고 큰 사찰의 포교당은 스님들이 자주 바뀌어서 일관성이 없다고 한다.

 

 

 

 

안양불교문화원 공사 현장.

3년째 착공도 못하고 있다.

 

 

 

도심에서 가장 큰 문제는 기복과 방편으로 일관 하는 불교이다. 대로 변에 버젓이 사주 관상 구병시식 영가천도와 같은 문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에서 제대로 된 불교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불교에 불법승 3보가 있다면 도시불자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의 이보(二寶)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스님들은 도시를 떠나 어디에 가 있을까.

 

 

 

 

 

 사주, 관상, 풍수, 구병시식, 영가천도 한다는 사찰

 

 

 

스님들은 어디에 갔을까

 

아침에 불교방송을 듣는다. 6 이전에 불교강좌 시간이 있는데 비구니스님이 강의를 하고 있다. 그 비구니 스님이 한 말 중에 의미 있는 말을 들었다. 예로부터 큰 스님들이 이제 갓 들어온 스님들에게 하는 말은 세상에 나가지 마라 라고 했다고 한다. 세상은 온갖 오염원 투성이기 때문에 세상에 있으면 물들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말은 동영상 강의 시간에 들은 적도 있다. 출가수행자는 될수록 안 좋은 대상으로부터 피하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산좋고 물맑고 공기좋은 곳에 사찰이 있다.

 

 

 

 

출가수행자들이 세상을 피해 다니다 보니 도시에서 사찰 보기가 힘든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불교를 믿고 싶어도 믿을 만한 마땅한 장소도 없고, 불자들은 본격적으로 공부 하고 싶어도 공부 할 곳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도시에서 생겨 나는 곳은 교회와 성당 뿐이다.

 

불교가 없는 도시는 마치 무주공산과 같다. 그런 도시에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 하는 현대인들을 끌어 잡기 위한 교회의 노력은 매우 집요 하다. 아파트 앞에는 종종 자신들의 교회를 소개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교회끼리 경쟁인 것이다. 팜플렛과 사탕은 기본이고 어느 경우는 비싼 과일까지 돌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천주교도 끼여 드는 것을 보았다. 전도와는 거리가 있을 것 같은 천주교인들이 거리에서 전도 하는 장면을 목겨 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찰에서 전법 하는 장면은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전법은 고사하고 사무실을 돌아 다니는 탁발스님과 전철 입구에서 보시함을 놓고 목탁을 두드리는 승려차림은 볼 수 있었다.

 

불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스님들이 도시를 등지고 깊은 산중에서 삼매의 경지에 빠져 있을 동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불자들은 방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점집이나 기웃거리고 영가천도와 같은 방편에 빠지기 쉽다. 한 마디로 도시에 불교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출가수행자들이 도시에 돌아 와서 전법해 주기를 바라지만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고 산속에 들어간 출가수행자들이 세상에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세상속에 남겨진 불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도시에 사는 불자들의 심정은 홀로 남겨진 자식들과 같은 느낌이다. 부모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부모가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고 집을 나갔다. 그런데 가족은 그 부모가 돌아 오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러나 세상은 오염되고 더러운 곳이라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은 부모는 결코 되돌아 오지 않는다.  그러나 남겨진 가족은 살아 가야 한다. 어쨌든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숙명이다. 아무리 세상이 오염되고 더러운 곳 일지라도 단 한시도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때로는 실망도 하고 때로는 좌절도 하고 온갖 근심과 탄식과 비탄이 있는 세상이지만 이 세상을 결코 떠 날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과 부딪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어디로 출가 하였을까

 

세상 사는 법을 제시한 분이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결코 세상을 등진 적이 없다고 어느 스님의 동영상 강의에서 들었다.

 

부처님은 어디로 출가 하였을까. 흔히 설산으로 출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찰의 대웅전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설산수도상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사람 사는 세상을 떠나 설산에 간 적이 결코 없다고 한다. 설산수도상은 8상도와 함께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을 신격화 하여 만들어 놓은 픽션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사람이 사는 마을로 출가 하였지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산속으로 출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관악산 남사면에서 바라본 안양권 전경

 

 

 

부처님은 항상 세상속에서 세상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그런 이야기는 초기경전에 많이 나온다. 결코 나홀로 출가가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법을 펴 나갔다. 한시도 세상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말이다.

 

한국불교에서 출가의 의미는 세상과 등지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세상에 돌아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결과가 도시에서 사찰 부재로 나타났다. 도시불자에게 있어서 부처님과 부처님법의 2보만 있을 뿐이지 3보는 없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불교의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쓰리쿠션 먹은 불교가 아닌 자주불교를

 

승가가 없다고 해서 낙담 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불교 운동을 펼쳐 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런 대안은 마련 되었다. 부처님의 원음인 니까야와 수행방법은 위빠사나가 바로 그것이다. 도시에서 사찰 구경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초기불교는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초기불교는 한국불교 1700년보다 더 앞선 2500년이나 되는 불교전체역사라 볼 수 있다. 더구나 투쿠션 쓰리쿠션 먹은 중국불교가 아니라 직수입한 불교로서 자주불교을 실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포대기만 있지 정작 그 안에 아기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 아기를 데려 왔으니 잘 키우는 일만 남았다. 그 아이가 잘 성장 하게 되면 도시에서 사찰이나 수행센터 구경을 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그러나 도시포교가 부재한 현실에서 도를 구하는 출가수행자에게 들려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전에 보았던 영화 삼사라(samsara)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세상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

 

 

어디에서 깨달아야 하나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 한다. 궁극적으로 열반하고 해탈하는 것이다. 그런데 깨닫기 위하여 인간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다고 한다. 재가불자들이 보시하고 지계하여 욕계천상에 태어나고, 출가수행자들이 선정삼매에 든 힘으로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태어 났다고 하더라도 그 곳은 수행할 분위기가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수행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에 지옥과 같은 4악도에 태어 나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수행할 겨를이 없다고 한다. 행복과 불행이 적절히 교차 하는 인간만이 수행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따마 붓다를 비롯한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이 인간에서 깨우치셨고 또 부처님의 제자들 역시 인간에서 깨우쳤다. 지금은 부처님이 남겨 주신 부처님의 법에 의지 하여 깨닫는 시대이다. 따라서  부처님 법에 의지하여 성자들이 나오는 시대가 정법시대’이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은 선정삼매 상태에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며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2009-09-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