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을 난자(亂刺)하는 기독교학자들, 무아 윤회 대신에 천지창조론의 진위여부를
어린 시절에 본 ‘미확인비행물체’
초등하교에 가기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같은 또래의 조무래기들과 들에서 놀고 있을 때 갑자기 굉음과 함께 동쪽 하늘에 이상한 물체가 나타 났다. 이제 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시커먼 물체 여러 개가 나타나서 하늘이 찢어 질듯이 소리를 내며 날아 가고 있었다. 이후로 그 물체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 나지 않았다.
흔히 하늘을 날아 다니는 이상한 물체를 ‘미확인비행물체’라고 한다. 영어로는 UFO이다. 그렇다면 어린시절에 보았던 그 물체는 UFO이었을까. 그런 의문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풀어 졌다. 그 미확인 비행물체는 ‘비행기’이었던 것이다.
시골에서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비행기와 마주 쳤을 때 그 인상은 너무 강렬하여 기억속에 매우 강렬하게 각인 되어 있었다. 마치 시진을 찍은 듯이 생생하게 각인 된 표상은 나중에 그 표상과 비슷한 비행기를 보고서 기종까지 알 수 있었다. 그 비행기는 C123라 불리우는 수송기이었다. 보통 군수물자를 나르거나 군인들이 점프 할 때 활용되는 덩치가 매우 크고 프로펠러가 달린 얼룩덜룩한 비행기이다. 이 비행기는 높이 날기 보다 저공비행이 특징이다. 그런 비행기가 있는 공군비행장이 시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어린시절 비행기가 무엇인지 몰랐을 때는 비행기는 없는 것과 같다.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행기가 있는 것을 알고 난후에 비행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식의 지평선이 넓어 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삶의 과정에 있어서 매 순간 수 많은 대상과 마주 친다. 그 대상은 눈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떠오르는 표상도 매우 많다. 이런 대상이 얼마나 많은지 손가락을 한번 퉁길 때 무려 960번 마음이 생멸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일어 나는 마음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강렬한 대상은 오랫동안 기억 나기 마련이고 특히 처음 경험한 대상은 더욱 더 강하게 표상으로 남는다.
이렇게 대상을 아는 것을 ‘인식’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대상도 무척 많다는 사실이다. 모르고 사는 대상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종족들은 보고 듣지 않으면 있는 줄 조차 모른다. 그런 종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그 종족은 없었던 것일까. 없는 것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는 사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분탕질을 하고 간 네티즌
최근에 올린 글에서 댓글란에 분탕질을 하고 간 네티즌이 있었다. 나름대로 초기불교에 대하여 소개하고 대승불교의 비불교적인 요소를 강력히 비판 하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돌변하여 부처님의 원음에 가깝다는 초기불교까지 비판 하고 나섰다. 대승에서 속고 또 초기불교에 속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장 하기를 부처님은 결코 윤회에 대하여 이야기 한 적이 없고 오로지 ‘무기’로 일관 하였다는 것이다. 또 부처님은 오로지 현실법인 오온 사성제 팔정도와 같은 현실법만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좌불교의 아비담마에 나오는 재생연결식과 같은 12연기는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말하는 육도윤회는 있을 수 없고 다만 ‘인간의 의식의 흐름의 변화’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예로서 뇌의학 정신과 전문의인 ‘
그가 주로 언급하고 있는 글은 교수들의 글이다. 그런데 교수라는 직업은 학문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인의 입장에서 글을 발표 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의 입장에서 학업의 성과로서 글을 쓰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입증 되는 사항만 언급 할 뿐이지 증명 되지 않는 정신적인 영역에 대하여 섣불리 이야기 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윤회와 지옥, 천상과 같은 주제가 될 것이다. 만일 어떤 교수가 지옥이 있다라고 논문을 발표 하였다면그 증거를 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은 모두 거론 할 수 있다. 특히 빠알리 삼장에 능통하고 수십년간 수행정진한 스님들이 2천년간 축적된 결과물인 논장과 주석서는 객관적으로 증명을 요구 하는 학문의 영역과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교수의 논문을 근거로 들어 불교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윤회와 업, 그리고 연기법을 부정 한다는 것은 당사자의 인식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오로지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의 한계를 보여 줄 수 있는 예로서 축생이 있다.
회의론자의 특징은
인간과 축생의 인식체계는 다르다. 비록 같은 공간에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고 있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개나 돼지가 생각하는 것이 같을 수 가 없다는 것이다.
개나 돼지가 인식하는 세계는 오로지 본능에 지배 된다. 반면에 인간은 고도의 이성적인 사유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개나 돼지가 인식하는 세계와 인간이 인식 하는 세계는 다른 것이다. 개나 돼지는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를 확대 시켜보면 부처님과 같이 깨달은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범부들이 알 수 있을 까. 부처님이 설한 내용중에 오신통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중에 숙명통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량 없는 전생의 삶을 기억 할 수 있다. 한생전, 두 생전,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우주 수축의 여러 겁, 우주 팽창의 여러 겁, 우주수축과 팽창의 여러 겁 전 까지를 기억 할 수 있다. 용모는 어떠 했으며, 어떤 음식을 먹었고, 내가 겪은 즐거움과 괴로움은 어떤 것이었고, 수명의 종말은 어떠했고, 거기서 죽어서는 어디에서 태어 났으며, 거기서는 이름이 무엇이었고,… 거기서 죽어서는 여기에 다시 태어난 것까지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경전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진짜 그럴까 하고 의심을 하게 된다. 자신의 인식범위를 벗어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의론자가 되기 쉽다.
회의론자의 특징은 ‘지적수준’이 낮다는 데 있다. 즉 자신의 지적수준을 넘어서 버리는 삶의 본성에 대하여 추론 하다 보면 처음에는 의심을 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전도된 인식’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네티즌 뿐만 아니라 학자들에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후박나무님의 글에서
최근에 후박나무님이 올린 글 중에 ‘
저자에게서도 유일신을 믿는 사람이 갖는 마음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 보이는데 그것은 불교를 기독교와 같이 신의 은총영역에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는 부처가 연기 공 무아의 원리를 발견한 자연 그 자체는 신이 창조한 세계임을 강조하면서 “동양이든 서양이든 자연은 이미 거룩한 분에 의해 주어진 축복이며 은총이기에 부처님이 발견한 법도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자연현상이므로 신의 은총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불교의 장점에 대하여 칭찬하는 척 하면서 결론은 기독교의 신의 은총과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후박나무님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느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초기불교보다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대승불교의 사상과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여 불교의 무아사상을 전면 부인하고 불교를 힌두교와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이 책의 부록으로 실려진 2003년도에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수행]이라는 논문에는 오온 외에 초월적자아가 있다거나 ‘제 1원인’을 묻는 것이 지혜라는 등의 표현은 삼가고 있는데 이것은 스님들 앞에서 발표한 논문이라서 그러한 것인가? 자신의 신앙에 의거해서 다른 종교의 사상을 왜곡하기 보다는 차라리 “이런 정도로 서로가 차이를 보인다.”라고 차이점은 차이점대로 인정하려는 태도가 더 정직하고 학자다운 태도라 할 것이다. 저자가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하려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기독교인의 눈으로 해석하고 왜곡시킨 것은 다른 종교를 존중하는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불교학 분야 학술원 회원에 선출된
그런
어쩌다가 불교학 분야의 한국학계 대표자리가 불교인이 아닌 개신교 목회자에게 돌아가는 모양새가 좀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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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기독학을 대표하는 분야의 학술원 회원으로 불교학자, 그것도 절에서 법문을 하는 법사직을 겸한 학자가 선출되었다고 하면 기독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기독교 학계도 지금의 불교계처럼 조용하게,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는 듯이 지나갔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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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불교학 분야만큼은 불교학계, 또는 정통 불교학을 전공한 학자가 학술원 회원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불교학계는 분골쇄신해야 한다.
울산대
불교의 무아와 윤회에 대하여 부정 하는 또 한 사람의 학자가 있다. 울산대
모든 것이 불성을 가진 존재이고 모든 것이 순간적 잘못으로 사악한 존재로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왜 하나의 우주적 전체일 수 없는가? 분명한 것이 있다면 현상 속에 드러난 존재진리는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현상 속에 내가 있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나의 존재가 무엇으로 되는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든지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험철학적 깊이의 문제만이 남게 된다.
불교의 무아사상을 전면 부인하고 대신에 나가 있다라는 영혼불멸사상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험철학적 깊이의 차원에서 새로운 불교해석의 지평을 여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칸트의 요청적 사유방법론을 통하여 불교철학의 실천적 변증론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칸트는 이론이성의 비판을 통하여 가능한 지식의 한계를 설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론적인 이성사용의 측면에서는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이성의 대상개념들을 도덕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명제로서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요청명제에는 자유의 요청, 영혼불멸성의 요청, 그리고 신 존재의 요청이 속한다. 새롭게 기술되어야 할 불교철학의 변증론은 무아설과 윤회설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좌초될 수밖에 없는 불교적 최고선을 실현 가능하게 하는 조건명제로서 실천적 행위주체의 요청, 자유존재의 요청, 그리고 니르바나적 세계질서의 요청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철학인 칸트사상과 더불어 현란한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내린 결론은 무아와 윤회설의 모순으로 ‘불교철학이 좌초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 하고 요청명제로서 ‘영혼불멸성’과 ‘신의 존재’를 이야기 하고 있다.
본문의 장황한 논리전개가 결국은 영혼불멸의 자아가 있다는 것과 신이 존재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논리를 전개한
울산지법, 교회법을 유린하다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
http://www.ulsanfocus.com/www/bbs/board.php?bo_table=column4&wr_id=59&sca=&sfl=wr_name%2C1&stx=&sop=and
[영상] 기독교 "신뢰의 위기"...하루 빨리 극복하자!!!
토론의 마무리한
http://www.cbs.co.kr/chnocut/show_ch.asp?LocalCD=10201130&NewsCD=945890
울산 ‘처용문화제’ 명칭 논란
실행위원장인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224593.html
불교학을 난도질 하는 기독교학자들
첫째, 불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를 철학적 수준으로 고착화 하려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 하는 논리는 부처님을 단지 성인으로 간주 하는 것이지 종교의 교주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윤회와 내생, 업사상이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무아와 윤회가 양립할 수 없고 결론은 무아가 성립 할 수 업기 때문에 윤회도 있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들의 논리대로 무아가 없고 윤회가 없는 불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다. 인류의 위대한 성인중의 한사람의 가르침일 뿐이다. 부처님을 소크라테스와 같은 위치로 격하 시키는 것이다.
둘째, 무아와 윤회의 모순점을 밝힌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종교의 우월성을 강조 하는 것이다. 그들의 책이나 논문의 말미에 결론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무아는 없고 따라서 윤회도 없다는 것이다. 다면 영원불멸하는 영혼이 있어서 신과 함께 한다는 논리전개를 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을 강조 하기 위하여 남의 종교를 기웃거리는 거린다고도 볼 수 있다.
기독교를 신앙으로 하는 학자들이 불교학을 연구 하는 것을 보면 단지 학문적 취미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철저하게 종교적인 요소는 배제 되고 철학적 주제만 관심사항일 뿐이다. 그래서 오로지 인식 할 수 있는 대상만 연구 하게 된다. 그 결과 불교학은 이들 기독교 학자들에 의하여 난자되고 난도질 당하게 된다. 그런 그들의 글에 놀아나는 네티즌 또한 매우 많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해도 큰 거짓말을 해야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이 말씀 하신 내용의 핵심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이야말로 우주의 근본 법칙이고 이 법칙에 적용 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불교의 견해이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연기법에 따르면 신도 변화하는 신만 있을 뿐이지 창조신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신의 축복과 신의 은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인과의 법칙만 적용 되게 되어 있다. 만일 이세상을 누군가 창조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대망어(큰 거짓말)죄를 짓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이다.
자재화작인설은 신의설(神意說)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통 바라문의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이 세계도 인간의 운명도 모두 범천(梵天)이나 자재천(自在天) 등의 최고신이 화작창조(化作創造)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신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받는 행복과 불행의 운명은 모두 우리가 과거세에서 행한 선(善), 악업(惡業)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며,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운명은 전세(前世)의 업의 결과로서 우리가 태어난 때에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숙작인설(宿作因說)도 부정 하였다.
다음으로 길흉화복은 일정한 원인이나 이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우연한 기회에 의해 일어나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 하는 우연인설(偶然因說) 또한 부정 하였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잘못된 견해에 대하여 연기법이라는 지혜의 칼로 잘라 버렸던 것이다. 그런 잘못된 견해를 부처님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이명박정부가 4대강 살리기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거짓말을 해도 작은 거짓말은 먹혀 들어 가지 않는다. 그러나 큰 거짓말은 먹혀 들어 간다. 천지창조와 같은 큰 거짓말이다.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에 브라만들이 주장하는 천지창조론에 대하여 대망어죄(大妄語罪)를 짓는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이런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불교학에 대하여 난도질하고 있는 기독교학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중의 하나인 ‘천지창조론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 먼저 밝히고 남의 종교의 교리에 대하여 이야기 하라는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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