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불사의 진수를 보는 듯한 축서사, 산중불교를 넘어 마을불교로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2. 1. 18:16

 

불사의 진수를 보는 듯한 축서사, 산중불교를 넘어 마을불교로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무상 고 무아이다. 이 말은 불교의 삼법인이라 불려 지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와 같은 뜻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 무상 고 무아는 그다지 인기 있는 키워드가 아닌 것 같다. 그 대신 이라는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 하고 있고, 또한 상좌불교에 없는 불성, 성품, 참나, 주인공과 같이 선종에서 많이 사용 하는 용어를 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천태대사의 교상판석에서 따르면 열반경에 나오는 열반의 뜻을 상락아정이라고 풀이 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 된다고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불교

 

불교인지 아닌지 파악 하는 잣대가 삼법인이다. 그러나 진리는 여럿일 수 있다는 불교의 독특한 진리관으로 인하여 상락아정도 하나의 시대의 산물로 간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대승불교권에서 여전히 남방상좌불교를 소승으로 간주 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상좌불교를 소승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디어 붓다에서 이제열 법사는 다음과 같이 비교(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4704&thread=24r25)하였다.

 

 

 

   

상좌불교

대승불교

오온(五蘊)

무상(無常) () 무아(無我)로 규정

()으로 봄.

무상, , 무아가 본래 있는 게 아님

마음

생멸(生滅)로 봄

본래 생멸이 아니라고 봄

열반(涅槃)

한 개인의 인격체에서 열반이 성취

개인의 인격체를 초월하여 세상의 모든 법이 그대로 열반이라는 사실이 성취

불타관

부처님은 다시는 생을 받지 않기 때문에 존재가 아니고 이 세상에 머물지 않음

부처님이 법계(法界)에 상주(常住)한다고 봄

갈애

극복해야 될 대상

갈애(渴愛)보다는 상()에 두고 상의 타파를 강조

이 세상

더럽게 보고 괴로움으로 보면서 벗어날 것을 요구

중생의 마음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것이니 그 본성을 깨달으라고 요구

대승에만 있는 것

 

불성설(佛性說), 아뢰야식설 ,법신설(法身說), 정토사상 , 불이(不二) 사상

수행법

(身受心法)을 모조리 관찰

마음하나만을 집중관찰

 

 

 

표를 보면 진리를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가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같은 불교임에도 불구 하고 상좌불교와 대승불교는 교리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 다는 것이다. 불타관도 다르고, 열반관도 다르고, 생사관, 마음등을 해석 하는 방법이 다를 뿐만 아니라 수행방법까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상좌불교와 대승불교는 서로 다른불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개인적인 해탈만을 목적으로 하는 상좌불교를 가리켜 소승이라고 부르고, 중생과 함께 하는 불교를 대승으로 부른다. 과연 현실은 그럴까.

 

한자어 대승은 큰 수레를 말한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버스나 기차와 같은 대중 교통수단이 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소승은 작은 수레를 말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택시 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 대승을 표방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과연 대승불교라고 볼 수 있을까. 산중에 있는 사찰에서 상구보리하다 평생을 보내는 수행자를 대승으로 볼 수 있을 까. 그런 경우 소승도 아니고 일승으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일인승 오토바이나 스포츠카 정도에 해당 다고 볼 수 있다.

 

축서사 가는 길에

 

순례법회를 다니다 보면 산중불교를 많이 접하게 된다. 우리나라 불교가 대승불교라고 하지만 선종만 살아 남아서 그 전통이 유지 되다 보니 좀처럼 사람이 사는 곳에 불교를 볼 수 없다. 불교를 접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심산유곡에 숨어 있듯이 좀처럼 모습을 드러 내지 않는다. 그런 사찰도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요즘은 사찰 입구까지 도로가 나 있어서 접근 하기 쉽다. 그런데 산중에 있는 사찰중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규모가 큰 절이 있다. 아마 축서사도 그런 사찰에 속할 것이다.

 

청량사 순례를 마친 순례팀을 태운 버스는 축서사로 향하였다. 간간이 비가 뿌리는 날이었지만 봉화가 고향인 법우님의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은 계속 되었다. 우측을 보시면 무엇이 보이고 좌측을 보시면 무엇이 보이는 식으로 설명하는  모습이 전문 가이드 같아 보인다.

 

그 법우님의 설명에 따르면 축서사가 유명해진 것은 한 분의 선사님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10대 선사중의 한 분으로 인정 받는 선사님의 원력으로 오늘 날의 축서사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축서사에 도착하자 한 분의 원력이 얼마나 대단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었다. 마치 불사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축서사 입구. 보탑성전이라고 쓰여져 있다.

 

 

 

 

 

 

안쪽에서 바라 본 보탑성전

 

 

 

 

불사의 진수를 보는 듯한

 

축서사를 보면 마치 대궐이 연상 된다. 첩첩산중에 고래등과 같은 전각들이 즐비한 모습이 궁궐을 연상 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대웅전을 바라 보고 좌측에 있는 전각들을 보면 경복궁의 교태전을 떠 올리게 한다. 이런 깊은 산중에 어떤 용도로 사용 되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마치 궁궐을 연상시키는 전각들이 즐비 하다.

 

 

 

 

 

 

 

경복궁에 있는 교태전

 

 

 

 

 

 

 

종루 우측에 있는 전각

 

 

 

 

 

 

 

 

3칸으로 된 종루

 

 

 

 

 

 

 

종루가 있는 곳의 전각

 

 

 

축서사는 스케일이 큰 사찰이다. 너른 터에 전각 하나를 지어도 큼지막 하게지어 놓았다. 종루 같은 경우도 3칸이나 된다. 대웅전의 경우도 전면5칸 측면 3칸으로 웅장한 자태를 자랑 한다. 넓은 터에 지어진 대부분의 전각들이 최근에 지어졌는지 단청 또한 매우 화려 하다.

 

 

 

 

 

5층탑의 좌측에 있는 전각

 

 

 

 

 

 

5층탑의 우측에 있는 전각

 

 

 

 

 

 

 

대웅전 입구에 있는 사자상

 

 

 

 

 

 

 

 

계단을 올라 가면 대웅전 나온다.

 

 

 

 

 

 

 

 

전면5칸 측면3칸의 웅장한 대웅전 전경

 

 

 

 

 

 

 

 

대웅전 현판

 

 

 

 

 

축서사에서 가장 볼 만한 구경거리는 석탑일 것이다. 5층 석탑이지만 높이가 무척 높은 거탑이다. 또 매우 정교하게 조각 되어 있어서 마치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것 같다. 안내 하는 법우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석탑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주지스님이 스리랑카에서 직접 가져 오셨다는 것이다.

 

 

 

 

 

 

5층탑. 이 안에 부처님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5층탑 상부

 

 

 

 

 

 

 

 

5층탑 하부

 

 

 

 

 

축서사는 전통사찰이다. 전통사찰임을 보여 주는 것이 있다면 비로자나불상이다.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되는 비로자나불은 대웅전을 바라 보고 우측의 보광전에 모셔져 있다. 그런데 비로자나 부처님의 상호와 몸전체가 백색이다. 백색인 경우 약사여래나 미륵불이 많지만 이곳 비로자나불은 특이 하게 백색이다. 원래는 금색 이었는데 한국전쟁 이전에 백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웅전 우측에 있는 보광전

 

 

 

 

 

 

 

 

보광전에 모셔진 비로자나불. 9세기에 조성 되었다고 한다. 백색칠을 한 것이 특징이다.

 

 

 

 

부산 몸빼아줌마들이 출현하면

 

축서사가 전통사찰이지만 최근 중창불사를 하여 오늘날의 축서사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은 불과 5년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불과 5년 만에 대가람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되기 까지 부산 몸빼아줌마들의 역할이 컷다고 안내 하는 법우님은 말한다. 부산몸빼아줌마들이 움직여야 대규모의 불사가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부산을 불도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인구 대비 불자들이 가장 높은 곳이 부산이라서 불교의 수도라는 명칭을 붙여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산의 불자들이 불사에 동참 하면 불사가 성공 한다는 것이다. 그런 부산몸빼아줌마들이 부산과 경남을 거쳐 경북까지 오게 되었고 이제는 불교의 불모지나 다름 없는 호남지역까지 간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날의 축서사가 있기 까지 주지스님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한다. 명문대 법학과 출신인 스님은 원래 재력 있는 가문출신이라고 한다. 따라서 지금의 불사도 개인적인 재력이 뒷받침 되었다는 것이다.

 

 

 

 

비오는 날의 축서사 전경

 

 

 

 

 

 

 

축서사 전경

 

 

 

 

마을불교로

 

깊은 산중에 거대한 가람을 보면 한국불교가 중흥 하고 있는 것 같다. 비록몇 명 밖에 살지 않을 지라도 대궐 같은 가람을 보면 한국 불교가 전성기를 구가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규모에 비하여 너무 한적 하다. 사람 구경 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사찰이 사람 사는 곳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도 생각해 본다. 사람사는 곳을 떠나 대궐 같은 가람을 지어 놓았어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대승이라는 말이 무색 하다.

 

 

불교의 교주 고따마 붓다는 출가를 마을로 했다고 한다. 설산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에 가서 세상속에서 깨우쳤다는 것이다. 또 늙어 열반에 들 때 까지 길에서 보낸 분이 고따마 붓다라고 한다. 그런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소승이라 말하고 중국의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대승이라고 말 하고 있는 것이 한국 불교의 현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에 민중과 함께 하는 불교가 진정한 대승일 것이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의 불교는 소승일 것이다. 그런데 나 홀로 있는 불교는 무슨 불교라 불러야 할까.

 

 

 

2009-12-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