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성불할 것인가 아라한이 될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 22. 11:00

 

성불할 것인가 아라한이 될 것인가

 

 

 

 

 

 

 

아침 6에 진행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언제 들어도 새롭고 신선하다. 또한 그런 가르침은 아무리 들어도 식상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초기불교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다.

 

초기불교를 가장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곳이 아마도 인터넷일 것이다. 해당 사이트에 들어 가면 법문뿐만 아니라 영상으로 볼 수 있는 동영상강의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초기불교의 중요성을 인식 해서 일까 불교방송에서 초기불교에대한 강좌를 들을 수 있었다. 매일 아침 6에 진행하는 불교강좌(http://www.bbsi.co.kr/)’시간이 바로 그 것이다.

 

이번 강좌는 한국명상원의 묘원법사 2009년 12월 14일부터 진행 하고 있다.  이 프로에서 ‘12연기와 위빠사나라는 주제로 매일 20분간 강의를 진행 하는데 언제 들어도 가슴에 와 닿는 내용들이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는 강사의 개인적인 역량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은 확실히 변하고 있음에

 

묘원법사는 자신은 법사가 아니라고 주장 한다. 그저 불러 주어서 법사라고 할 뿐이지 법사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법사로서의 자격은 충분히 갖추었다고 본다. 우선 법을 전달 함에 있어서 쉽고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어조로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법사의 과거 경력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학창시절에 연극을 하였기 때문에 의사전달이 분명하다. 배우 들이 연기를 할 때 크고 또렸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해야 관중 들이 잘 알아 듣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다음으로 법사의 경륜이다. 미얀마에서 비구계를 받고 7년간 수행을 하였고, 한국에 돌아와서 수년간 수행지도를 하였기 때문에 초기불교의 수행과 교리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정통한 듯한 느낌이다. 더구나 60대 중반에 접어든 경륜 또한 중후함을 더해 준다.

 

특이하게도 천주교를 믿다 미얀마에서 불교 수행을 하면서 개종한 법사는 처음부터 상좌불교부터 접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1700년 전통의 한국불교에서 그다지 인정 받지 못하고 마치 이단 취급을 받기 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런 법사가 금년 들어 BBS불교방송에서 초기불교 강좌를 맡은 것을 보니 세상은 확실히 변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 없다.

 

당대 최고의 선지식들이

 

아침에 습관적으로 방송을 듣는다. 그 중에 5시 40 진행하는 경전공부 6 진행하는 불교강좌는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 한다. 우리나라 당대 최고의 선지식들이 전하는 보석과 같은 불교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귀중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놓쳤을 경우 다시 듣고 싶으면 불교  방송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다시듣기로 들으면 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위해서이다. 이번에도 역시 좋은 이야기가 있었어서 녹취를 하려고 들어 갔는데 고맙게도 누군가 매일 녹취를 해서 올려 놓았다.

 

그런 이야기 중에 붓다의 조건이 있다. 최고의 바라밀공덕을 쌓아야 그 과보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겉치레로 하는

 

우리 불자들은 서로 만났을 때 성불 하십시요라고 인사한다. 그런 인사말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하는 말일까, 아니면 겉치레로 하는 말일까. 분명한 사실은 한 분의 부처가 출현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까 이제 까지 세상에 출현한 부처님은 25분이라고 경전에 나와 있다고 한다. 빠알리어 소부경전에 있는 불종성경에 과거 25불이 기록 되어 있는데 고따마 붓다가 25번째 라고 한다.

 

그런데 더 상세한 기록은 디가 니까야에 나와 있는 과거 7불이라는 것이다. , 가장 가까운 시대에 태어난 일곱분의 부처님에 대한 기록이다.

 

부처가 될 사람은

 

그 일곱 분의 부처님에 대한 설명을 표로 요약 하여 보았다.

 

 

과거칠불의 특징

과거칠불

출현

사람수명

신분

나무

상수제자

시자

아들

위빠시

붓다

91겁전

84

왕족

바바라

나무

제사,

껀다

무후

방응

시기

붓다

31겁전

7만세

왕족

분다리

나무

아비부,

삼바바

인혜

무량

웨싸부

붓다

31겁전

6만세

왕족

싸라

나무

부유,

울다마

적멸

묘각

까꾸산다 붓다

현겁

4만세

브라만

치리사

나무

쌀리,

비루

선각

상승

꼬나가나마 붓다

현겁

3만세

브라만

오잡

나무

써반나,

울다루

안화

도사

까사빠

붓다

현겁

2만세

브라만

미구휼 나무

쩨사,

바바라

선우

집권

고따마

붓다

현겁

100

왕족

보리수

나무

사리뿟따,

목갈라나

아난

라훌라

 

 

 

표를 보면 과거 칠불중에 위빠시 붓다가 출현한 때가 91겁전이다. 이후 뜸 하다가 현겁시대에 무려 4분의 부처가 출현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처가 출현 할 당시 사람들의 수명이 모두 다르다. 84천세부터 100세까지 점점 수명이 줄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 부처가 될 사람들은 반드시 왕족이나 브라만으로 태어 났다는 사실이다. 즉, 부처가 될 사람은 낮은 계급이나 천민으로 태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는 것이다. 부처가 되려는 보살들이 그 만큼 큰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교리를 보면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생을 결정한다. 따라서 선업은 선업의 과보를 받고, 불선업은 불선업의 과보를 받기 때문에, 선업을 쌓은 보살이 부처로 태어 날 때 최상의 바라밀 공덕을 쌓은 과보로 최고의 신분으로 태어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부처의 특징은 반드시 나무아래에서 위 없는 바른 깨달음(삼마삼붓다,정등각)을 얻었고, 또 두명의 뛰어난 상수제자를 두었다. 그리고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진 제자를 시자로 두었다.

 

아난다의 경우 고따마 붓다의 시자로서 25년간 시봉 하였는데 그 이전의 20년간 시봉하지 못한 법문은 다시 들어서 모두 기억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경전은 반드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 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반드시 결혼을 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이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부처가 될 사람은 정상적인 신체구조를 가진 사람이었다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일 것이고, 둘째는 결혼을 해서 인생의 희로애락과 고()를 맛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은 업대로 살아야 하는

 

표와 같이 모든 부처님들은 한결같이 공통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내용은 어떠 할까. 그 깨달음의 내용 또한 동일 하다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들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내용은 연기법이다.

 

부처님만이 연기법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8정도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불사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런데 부처가 출현 하기 이전에는 사마타 수행만 있었다고 한다.

 

사마타 수행을 통하여 올라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라 한다. 그 곳의 수명은 84천대겁이라고 한다. 그 곳에 사는 존재들은 수명이 다하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

 

부처님의 정법시대에 태어 나지 않은 존재들은 다음과 같은 삶을 살아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은 자기가 지은 업대로 살아야 하고,

천상에 사는 존재는 자기가 사는 세상의 수명대로 살아야 한다.

 

 

인간 이하의 존재는 자신의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업의 과보에 따라 살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천상의 존재는 선정수행을 한 과보로 수명이 보장 되어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그토록 오랫동안 살고 있는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들도 한 분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 하면 신통으로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행 하던 시절에 정법이 없었고 오로지 사마타수행만 있었기 때문에 그 선정 수행의 공덕으로 엄청난 수명을 누리고 있었지만, 암흑과 같은 영겁의 시간 속에서 한 분이 부처님이 출현 하였다는 것은 우주의 빅뉴스 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분의 부처님이 출현 하였다는 의미는  다시 태어 나지 않은 불사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정법시대는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영겁의 시간 속에서 잠시 반짝이다 다시 끝 도 알 수 없는 암흑이 시대가 계속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 법이 살아 있는 시대를 행운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런 행운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성불할 것인가 아라한이 될 것인가

 

정법이 살아 있는 행운의 시대에 부처님이 걸었던 길을 다시 갈 것인가 아니면 부처님이 깨달은 법에 의지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렸다. , 성불할 것인가 아라한이 될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이다.

 

부처가 되기를 서원한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가 되고 싶다고 해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희귀한 것이라고 한다. 이 우주 역사에 있어서 이제까지 25분의 부처님 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방송에 따르면 한분의 부처가 출현 하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세월동안 끊임 없는 바라밀 공덕을 쌓아서 살아 있는 생명 중에서 최고의 바라밀 공덕을 쌓은 과보로 부처가 출현 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축생으로 태어 났어도 그 서원을 잊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부처가 되겠다고 서원도 하지 않고, 또한 바라밀행도 하지 않으면서 부처가 되겠다고 말로만 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라는 것이다.

 

부처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따라서 실현 가능성이 결여된  부처가 되기 보다 부처님이 닦아 놓은 길을 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다.

 

 

부처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탐진치 번뇌를 불태우는 것이 중요하다.

 

 

닙바나에 들면 부처나 아라한이나 똑 같은 것이다. 부처가 되기를 서원 하는 사람들은 큰 마음을 내야 한다. 그런 큰 마음이 없다면 쉽고 빠른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 누구나 자신과 같은 부처가 되라고 하셨을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부처님은 탐진치 삼독의 번뇌를 해결하여 우리 모두를 다 행복으로 이끌어 주기 위하여 자애로운 마음으로 법을 펴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아라한이고, 모두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하라고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부처가 되기를 서원 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다. 까마득한 세월에 하기 힘든 부처가 되기 보다, 탐진치 번뇌를 불태우는 아라한이 되는 것 또한 본인의 선택의 자유가 될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반열반에 드는 것은 똑 같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삶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자연의 현상계를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 결과로 위 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그 것이 부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팔정도,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것이다.

 

길을 모를 때는

 

우리는 길을 잘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길을 개척 해 놓은 분의 선언을 믿고 따라 가야 한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체험을 통하여 판단 해야 한다.

 

그런 길을 제시 한 분이 고따마 붓다 한 분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역대 부처님들이 한결 같이 갔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 길을 믿고 따라 가는 것이다.

 

고따마 붓다를 포함하여 모든 부처님들이 깨달은 법은 다음과 같이 숫따니빠따 게송에 잘 나와 있다.

 

 

나는 알아야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할 것을 버렸느니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다.

(숫따니빠따 558)

 

 

부처님들이 무엇을 알았을까. 알아야 할 것을 알았다는 것은 고성제(苦聖諦), 닦아야할 것을 닦았다는 것은 도성제(道聖諦)를 말한다.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집성제(集聖諦).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꿰뚫어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부처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그런 길을 우리는 따라만 가면 되는 것이다.

 

 

 

 

2010-01-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