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부처님도 몰랐던 본마음 참나, 어느 스타스님의 법문을 듣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 23. 16:15

 

부처님도 몰랐던 본마음 참나, 어느 스타스님의 법문을 듣고

 

 

 

 

 

 

 

스타스님은

 

불자들이 즐겨 듣는 방송은 아마 불교방송 일 것이다. 실재로 아는 사람들의 차를 타면 채널은 항상 불교방송에 고정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불교방송에 스타가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스타 중에 스타스님도 있다.

 

불교방송의 스타스님을 꼽으라면 누구나 세분을 든다. 이 세분의 스타스님은 다름 아닌 월호스님, 성전스님, 정목스님이다.

 

이들 세분의 스님은 지난 수년간 불교방송에서 고정적으로 출연해 왔다. 그래서 어느 다른 스님들 보다 인기가 높고 사람들을 몰고 다닌다.

 

그래서일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 세분의 스타스님들이 지난해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장충체육관에서 애청자들을 대상으로 공개방송을 한 적도 있다.

 

월호스님의 행복창조 10선을 보면

 

세분의 스님 중에 월호스님이 있다. 주로 경전을 공부 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박사출신인 스님의 강의는 언제 들어도 시원하고 유쾌하다.

 

어려운 한문경전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가 하면, 때로는 너털웃음을 떠 뜨리기도 해서 무애행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런 스님의 강의를 최근 불교tv에서 보았다. 스님의 인기는 라디오를 넘어 영상매체까지 확대 된 듯하다. 불교tv의 포교프로그램에서 간판으로 소개 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tv에서 법문하는 스님의 프로그램명은 월호스님의 생활법문 행복창조이다.

 

스님은 이 프로에서 법문에 들어 가기 전에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하고 10번 큰 소리로 외친다. 그 다음에 스님이 만들었다는 행복창조 10선을 모여 있는 불자들과 함께 또 큰 소리로 복창한다.

 

그 행복창조 10선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2009년11월30자법문,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1&PID=P597&DPID=55911).

 

 

행복창조 10

 

1. 행복도 불행도 내 작품이다.

2. 내가 인()이요 남이 연()이다. 과거의 인()이 현재의 연()이다. 현 재의 인()이 미래의 연()이다.

3. 구걸하지 말고 창조하자

4.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 할 수 없다면 언제 어디서 행복 할 수 있으랴

5. 나는 억세게 재수 좋은 사람이다.

6. 모든 것은 한 때이다. 걱정할 시간에 기도 하자.

7. 걸림돌이 디딤돌이다. 잡초가 약초다.

8.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를 비교하자.

9. 판사가 되지 말고 관찰자가 되자.

10. 언젠가 이 세상에 없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쉬운 말이다. 어려운 불교경전을 이와 같이 설명한다면 불자들이 기복에 빠지지 않고 올바른 신행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창조 10선을 믿으면 수다원이 된다니

 

그런 자신감에서 이었을까 스님은 법문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수다원과 이르려면 무엇을 믿으면 될까? 행복도 불행도 내작품이다. 이 것만 확실히 믿어도 수다원과에는 진입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것만 확실히 믿어도 더 이상 살생, 투도, 사음, 망어, 이 네가지는 안하는 것입니다.

 

 

수다원과에 이르려면 행복창조10선 중에 첫번째 항목인 행복도 불행도 내 작품이다라는 말을 믿으면 된 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다원과에 이르려면 초기불교의 경전(니까야)과 논서(아비담마)에 다음과 같은 3가지 족쇄가 극복 되어야 한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유신견(有身見)이다. 빠알리어로 삭까야디티(sakkaya-ditthi)라 한다.

개아가 있다는 믿음이다.

 

둘째, 회의적 의심이다. 빠알리어로 위찌낏차(vicikiccha)라 한다.

불법승 삼보와 연기법에 대한 회의론적 의심을 말한다.

 

셋째, 계금취(戒禁取)이다.빠알리어로 실랍바따 빠라마사(silabbata-paramasa)라 한다.

형식적 계율과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유신견, 법에 대한 의심, 계금취견등은 언급 하지 않고 행복창조 10선을 믿으면 수다원이 된다 하니 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법일까. 그러나 불교tv의 자막서비스는 수다원과에 대하여 스님의 의견과 다르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수다원과

사과(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하나.

그릇된 견해, 진리에 대한 의심 따위를 버리고

성자의 무리에 들어 가는 성문의 마지막 지위.

 

 

자막서비스를 보면 계금취의심에 관한 언급은 있어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유신견(有身見)’을 누락 시킨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알면서도 누락시켰을까 아니면 몰라서 그랬을까.

 

또 수다원을 성자의 무리라고 표현 점도 매우 특이하다. 보통 무리들이라고 말하면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수라 무리, 도둑의 무리와 같은 어감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수다원에 대한 평가치고는 매우 가혹하고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수다원이라면 초기불교에서 추구 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성자의 반열에 들어 가는 예류자로 인정하여 복전으로 간주 되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는 법문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아래와 같은 도식 때문이다.

 

축생à인간à천상à해탈à보살

 

, 해탈 보다 보살로서의 삶을 강조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폄하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기조는 동아시아불교의 특징이다. 특히 선불교에서 그런 경향은 더욱 더 심화 된 듯하다.

 

부처님도 몰랐던 본마음 참나

 

그런 기조에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월호스님의 10회법문(14일자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1&PID=P597&DPID=56402)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선가귀감)

 

 

여기서 한 물건이란 무엇일까. 바로 이런 것이 화두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이뭐꼬화두라는 것이다. 이 게송에 대한 설명으로서 서산대사는 동그라미를 하나 크게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석가도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전하랴(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직지심경 134)

 

 

이 말뜻에 대한 월호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그 한 물건이라는 것이 이름을 지을 수 없고 모양을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어떠한 이름을 붙일 수 있고 또 어떠한 모양으로 그릴 수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눈앞에 드러난 현상계가 모두 불성이고, 내 몸뚱아리를 포함하여 전 우주가 본마음’ ‘참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게송에서 충격 받은 것은 모든 부처님이 출현하기도 전에 동그라미가 있었는데 그 동그라미는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부처님도 몰랐고 하물며 그 부처님의 제자가 알리 있었겠느냐는 내용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석가모니부처님을 포함한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능멸당한 느낌이다. 부처님도 모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 것을 선사들은 알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들린다.

 

더구나 석가모니부처님을 단지 석가로 호칭한 것 또한 매우 모욕적인 표현이다. 보통 외도들이 부처님을 부를 때 부처님또는 부처라고 하지 않고 석가라고 한다. 그런 내용은 인터넷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사항이다.

 

그런데 이미 수백년 전에 선가에서 부처님에 대한 호칭을 생략하고 부처님 이름을 막 바로 불렀다는 것은 김씨” “박씨하고 부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조선초기 정도전의 작품중의 하나인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부처님을 폄하하여 부처님을 불씨(佛氏)”라고 부른 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월호스님의 법문 중에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주로 조사스님들의 어록이나 자신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아마도 본마음’ ‘참나가 일정한 모양이 없으니 어떠한 이름을 갖다 붙여도 무방할 것이라는 스님의 말 처럼 누구든지 자신이 체험하고 경험한 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듯 하다.

 

그래서 월호스님이 주장 하는 행복창조 10또한 경전과 무관하게 불자들의 신행지침으로서 활용 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직무유기인가 한국불교의 수치인가

 

초기불교 신봉자들은 철저하게 부처님이 설한 경전(니까야)을 바탕으로 법문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가급적 개인적인 견해 보다 경전을 바탕으로 하여 법문을 한다.

 

만일 경전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면 그 이야기는 부처님이 설한 법문이 아니라, 개인이 생각 하는 개인적인 견해를 전달하는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불교, 특히 선불교에서는 경전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은 듯하다. 자신이 체험하고 경험한 바가 부처님의 법과 같다고 보는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또 동아시아 불교의 특징은 부처님의 제자에 대하여 보살보다 못한 성문으로 본다든가, 부처님 또한 본마음 참나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 된 것을 보면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동아시아 불교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 시각으로 보는 동아시아 불교 특히 선불교의 선사들은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의문 스럽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앞서 언급한 수다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다원이 되려면 행복창조 10선 중의 첫번째 항목인 행복도 불행도 내 작품이다라는 말을 믿으면 된 다는데, 과연 그 말이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알고나 하는 말일까 아니면 몰라서 하는 말일까.

 

만일 알고서도 그와 같은 말을 하였다면 종교인으로서 직무유기라 볼 수 있고, 몰라서 그랬다면 한국불교의 수치라 볼 수 있다.

 

 

 

2010-01-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