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관스님과 비교되는 자승스님, 봉은사 사태와 8.27범불교도대회의 대응을 보면
정권의 하수인으로
설마 했더니 역시 그렇나 보다. 몇 일 전 어느 칼럼니스트가“봉은사를 흔드는 검은 그림자는 종단 외부에 있을 수도 있고 종단 안팎에 걸쳐 있을 수도 있다”는 글을 발표 하였다. 뒤이어 교계신문에서는 ‘정권외압설’을 주장 하였다.
이런 말을 뒷받침 이라도 하듯이 명진스님은 봉은사의 일요법회에서 집권당 원내대표의 압력이 있었고, 총무원장 스님이 이를 받아 들여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만들었다고 주장 하였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무엇 보다 충격적인 것은 불자들을 대표 하는 한국불교의 수장이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 되었다는 사실이다.
최선책과 차선책
정치와 종교는 추구 하는 목표가 다르다. 모두 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 하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정치가 현실을 추구 한다면, 종교는 이상을 추구 하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로 ‘차선책’과 ‘최선책’을 들 수 있다.
정치는 차선책을 추구한다. 그 이유로서 정치는 상대방이 있어서 항상 대립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다수의 의견을 존중할 수 밖에 없고, 다수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 갈 수 밖에 없다. 거기에는 항상 ‘표’를 의식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반대편이 존재 할 수 밖에 없는 정치판에서 지도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차선’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다르다. 종교가 추구 하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신념은 종교의 교주가 말하는 진리가 될 수 있고, 경전상에 나오는 경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신념은 항상 ‘최선’의 추구이다. 차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최선을 고집 할 수 밖에 없고 차선을 위하여 적당히 타협 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인이 정치를 하면
그럼에도 불구 하고 불교계의 최고수장이 집권당의 원내대표의 건의를 받아 들여 타협의 산물인 정치적인 판단을 하였다면 그 것은 ‘차선’을 선택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치를 한 것이다.
종교인이 정치를 하면 어떻게 될까. 최근에 벌어진 정치적 사태들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국민들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하는 ‘4대강 사업’을 밀어 부친 것은 정치적 차선이 아니라, 거꾸로 ‘종교적 최선’으로 본다. 왜냐하면 추진자는 항상 ‘소명의식’을 강조 하였기 때문이다.
입적한 법정스님도 4대강 사업은 큰 ‘재앙’을 가져 올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재앙이 환경오염에 따른 재앙 보다,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였을 때 볼 수 있는 낭비와 국론분열이다. 결국 항상 최선을 추구하는 종교의 논리를 정치에 접목 하였을 때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업을 소명의식 하나로 밀어 붙이는 것이 커다란 재앙이라는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 하는 분이다. 스님은 단지 불교만 대표 할 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자존심’까지 대표 하고 있다. 그런 스님이 집권당 원내대표의 정치논리에 휘둘리어 최선책이 아닌 정치적 타협의 산물인 차선책을 내 놓았다는 것은 불자들의 자존심을 손상 하였다는 것이다.
8.27범불교도대회를 기억해야
불자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은 정권의 외압설 보다 불자를 대표 하는 불교계의 최고수장이 정치권에 휘둘렸다는 사실이다. 그 것도 매스컴에서는 ‘자승원장이 하수인 노릇을 했다’고 보도 되고 있는 것을 보니 불자들의 자존심을 더욱 더 상하게 만든다.
자승스님은 지난 2008년도 8.27범불교도대회를 기억해야 한다. 그 때 당시 시청 앞에 수십만이 모여서 외친 내용은 한마디로 ‘불교의 자존심’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천명의 스님들과 평일임에도 불구 하고 멀리 지방의 조그마한 사찰에서 단체로 올라온 노보살들에 이르기까지 한마음이 되었던 것이다. 그 대회의 맨 앞에는 그 때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지관스님이 있었다.
2008년 8.27 범불교도대회.
지방각지에서 올라온 노보살들이 천수경을 외고 있다.
범불교도대회 단상 아래에서 맨 앞에 자리잡은 지관총무원장 스님.
앞장서서 거리 행진 하고 있는 지관스님
새로 선출된 자승총무원장스님은 정치권에 휘둘리지 말고 불교의 ‘중도(中道)’를 실현해 주기 바란다. 불교에서 중도란 가운데 길이 아니고,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바른길 즉, 정도(正道)를 말한다. 그리고 손상된 불자들의 자존심을 회복 시켜 주어 이를 끝까지 지켜 주기를 바란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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