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법정스님은 초기불교의 개척자, 무소유에서 발견한 숫타니파타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0. 3. 25. 10:05

 

법정스님은 초기불교의 개척자, 무소유에서 발견한 숫타니파타를 보고

 

 

 

무소유를 법보시 받고

 

평소 알고 지내는 법우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선물은 법정스님의 책인 무소유이다. 무소유는 절판 된다고 하여 값이 치솟아 8000원짜리가 15만원까지 간다는 바로 그 책을 말한다. 그 법우는 법정스님이 입적한 당일 서점에서 5권을 구입 하였는데 평소 알고 지내는 법우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샀다고 한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그 법우로부터 받은 무소유는 일종의 법보시이다. 법보시를 받기 전에 먼저보시를 한적이 있었다. 음성 보시라고 할까 좋은 불교음악CD를 선물 하였기 때문이다. 서로 선물을 주고 받았으니 빚을 갚은 셈이다.

 

무소유책은 매우 작고 부피가 얇은 책이다. 159페이지에 불과한 무소유는 초판인쇄가 1976년으로 되어 있고, 이번에 선물받은 책은 2009년 12월 10자로 인쇄 되어 있는데 3 85쇄라고 나와 있다. 1976년에 무소유가 나왔다면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일이다. 법정스님이 43세 되던 때이다. 그 때가 법정스님이 불일암에 머물던 때이다.

 

난초생각이 나서

 

무소유책을 열어 보았다. 예전에 한 번 보았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무소유라는 말이 어떻게 나왔는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스님이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스님을 뵈로 떠났는데 갑자기 난초생각이 났더라는 것이다. 햇볕을 쪼이기 위하여 밖에 내 놓았는데 깜박 잊고 떠난 것이다. 난초가 햇볕에 말라 죽을까 걱정이 되서 길을 가는 도중에 되돌아와 물을 주고 정성껏 돌 보아 주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스님은 집착과 소유욕이 마음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음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소유에서 해방 되고자 아는 지인에게 난초를 주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그렇게 홀가분 할 수 없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소유를 실천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했다고나 할까.

 

 

화엄경에 심취하기도

 

무소유의 글 중에 1972년에 쓴 그 여름에 읽은 책이라는 매우 짤막한 글이 있다. 이 글에서 스님은 화엄경을 읽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글을 쓴 1972년을 기준으로 8~9년전 일이라 하니 1963~1964년이 될 것이다.

 

1963년이면 스님의 나이 31세 때 이다. 그 때 당시 해인사의 소소산방이라는 곳에서 화엄경의 십회향품을 읽으면서 여름 한철을 보냈다고 한다.

 

운허선사로부터 화엄경 강의를 듣다가 십회향품에 이르러 지극한 보살의 구도 정신에 감동을 받아 읽기 시작한 화엄경은 그 때 당시까지만 해도 한글 번역이 없었기 때문에 실차난타의 한역목판본을 읽었는데, 경을 읽을 때 장경각에 올라가 업장을 소멸하는 참회예배를 하고, 가사장삼을 입고 단정히 앉아 향을 사르고 개경게부터 왼 다음 목청을 돋우어 한자 한자 의미 하면서 10여회 독송 했다고 한다.

 

화엄경과 관련하여 스님이 번역한 신역 화엄경이 있다.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이책의 해제(1988)를 읽어 보면 스님이 화엄경을 처음 접하던 때를 ‘20대 후반해인사 강원에서라고 쓰고 있다. 이런 사실로 보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화엄경에 심취 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은 1985년 동국역경원으로부터 청탁을 받아 80권 화엄경을 우리말로 번역 하였는데 해제에서 말하기를 30년 세월을 두고 다시 읽는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무소유책에서 말하는 1964년에 해인사에 십회향품을 읽었으니 정확히 계산이 맞아 떨어진 다고 볼 수 있다.

 

신역 화엄경의 해제에서 스님은 80권에 달하는 방대한 화엄경을 읽어내기란 어지간한 인내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순 한자로만 이루어진 80권 화엄경을 읽어 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다.

 

 

80권 화엄경을 읽어내기란 어지간한 인내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설처럼 재미 있는 글도 아니고 비현실적인 묘사에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놓는 장광설에 질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화엄경의, 구름 일 듯 2백 가지로 물으면 병에서 물을 쏟아 내듯이 2천 가지로 대답을 하는 그 요설 변재를 감내 하기란 참으로 힘이 들다.

 

 

신역화엄경을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 한 글이다. 번역자가 솔직하게 표현한 해제의 글이 사실 화엄경의 본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스님이 번역한 신역 화엄경을 읽어 보아도 표현한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초기불교의 흔적을

 

스님의 무소유 책에서 초기불교의 흔적도 발견 하였다. 1971년에 쓴 불교의 평화관이라는 글에서 숫타니파타의 게송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인용된 게송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가 자기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 없는 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

(숫타니파타 149)

 

 

스님은 이 게송을 소개 할 때 초기불교라는 용어를 사용 하였다. 또 스님은 장로니게와 밀린다왕문경, 법구경, 상응부 경전을 이용하여 불교의 평화관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의 영화를 인용하여 설명 하는데 그 영화의 제목은 솔저블루이었다. 솔저불루라는 영화가 언제 만들어 졌을까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여 보았다.

 

놀라웁게도 스님이 글을 쓴 1971년 바로 이전인 1970년 미국영화 이었다.내용은 미국의 기병대가 인디언 학살을 자행 하였던 작품이라 한다.

 

 

 

 

솔저 블루(1970년작)

 

 

 

스님이 언급한 숫타니파타, 법구경, 장로니게, 밀린다왕문경은 지금으로부터 40년전에는 매우 생소한 경전 들 이었을 것이다. 특히 숫타니파타와 장로니게는 한역아함경에도 나오지 않은 순수한 남방불교경전이기 때문이다.

 

남방불교경전인 니까야는 디가 니까야, 맛지마 니까야, 상윳따 니까야, 앙굿따라 니까야, 쿳다까 니까야 이렇게 5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함경에 없는 경전이 마지막 쿳다까 니까야이다. 이 쿳다까 니까야에 앞서 언급된 숫타니파타, 법구경, 장로니게, 밀린다왕문경등이 들어 있는 것이다.

 

스님이 언급한 숫타니파타가 지금으로부터 40년전인 1970년에 한글로 번역되어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스님이 언급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일본에서는 이미 20세기 초에 빠알리어 5부 니까야가 모두 일본어로 번역 되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숫타니파타와 관련하여 법정스님이 최초로 소개한 책으로 알고 있다. 1970년대 중반에 나온 이 책은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책으로도 유명하다. 무소유책에서 1971년 작성된 글에서 이미 숫타니파타의 게송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스님은 초기불교에도 매우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법정스님은 초기불교의 개척자

 

스님이 마지막으로 머물다 가신 길상사의 대웅전에는 오로지 한 분의 부처님 만 모셔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사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여 부처님을 바라 보았을 때 우측이 관세음보살, 좌측에 지장 보살을 모셔 놓고 있는데, 이런 인기 있는 보살을 일체 모셔 놓지 않고 오로지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만 모셔 놓은 것으로 보아서 초기불교에 더 가까웠지도 않았나 생각 해 본다.

 

 

 

 

길상사의 부처님상

 

 

40년 전부터 초기불교 경전을 접하고 더구나 숫타니파타를 번역하여 우리나라에 부처님의 원음을 본격적으로 알렸다는 의미에서 스님은 초기불교의 개척자의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201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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