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한 존재가 사라질 때 우주도, 죽음과 재생으로 본 바왕가(bhavanga)

담마다사 이병욱 2010. 4. 14. 12:41

 

한 존재가 사라질 때 우주도, 죽음과 재생으로 본 바왕가(bhavanga)

 

 

 

 

 

 

한 존재가 사라질 때

 

천안함사건으로 몇 주째 뉴스의 대부분을 할애 하고 있다. 영문도 모르고 희생된 병사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 참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병사들과 직접적인 관련 있는 사람들의 심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수 많은 사건과 사고를 접하면서 단지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지 가슴이 에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들과 직접적인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디에서인가 누군가 죽어 나간다. 생명을 다해 죽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억울하게 죽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런 일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남의 일 같이 보이지만 내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한 존재가 이 세상을 살다가 사라지지만 살아 남은 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 간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 세상 또한 함께 소멸한다.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끝났을 때 자신의 주변은 물론 온 우주가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한존재가 사라질 때 우주 또한 함께 무너져 소멸 하지만,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면 우주 또한 새롭게 열린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죽기 이전의 존재와 새롭게 태어난 존재는 같은 존재일까.

 

부처님의 과거 전생의 이름은

 

남방 테라와다 불교가 소개 되기 이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생을 믿었다. 의식은 하나로서 동일하며 영구불변하다고 믿는 것이 환생의 개념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더라도 마치 사람이 옷을 바꾸어 입듯이 몸만 바꾸는 개념으로 생각 한 것이다. 이런 환생을 잘 못 이해하면 본생담에 나와 있는 보살로서의 부처님도 항상 같은 의식을 가진 존재로 오해 하기 쉽다.

 

본생담에서 부처님의 과거 전생의 이름은 떼미야, 자나까, 수안나사마, 부릿다, 짬뻬야, 위두라, 마호사다, 니미야, 나라다, 웨산따라 이었다고 한다. 이들 이름을 가진 보살로서의 부처님은 끊임 없이 윤회를 거듭하여 정신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부처님이 되신 것으로 잘 못 알 수 있다.

 

부처님이 과거 전생에 여러가지 이름을 가지고 보살행을 하였지만 동일한 의식체를 가진 존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 존재가 죽으면 원인과 결과라는 과보가 상속 되어 윤회를 거듭했을 뿐이지 고정된 자아가 있어서 몸만 바꾸는 윤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방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마음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 일 것이다. 테라와다 불교가 마음을 생멸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 비하여, 대승불교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다는 것이다.

 

마음을 생멸 하는 것으로 본다면 한 존재의 죽음과 재생 역시 같은 마음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생멸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짜 마음이 있다고 생각 한다면 죽어서 다시 태어 나도 그 변치 않는 영원불변한 마음이 계속 유지 된다고 생각 한다. 바로 그 마음이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트만일 것이다. 이런 아트만을 믿으면 참나, 본마음, 주인공이 있다는 사견(邪見)을 갖게 되는 것이다.

 

현생의 의식은 죽는 순간의 마음으로 종결된다. 내생에서의 새로운 의식은 재생연결식으로 일어난다. 부처님이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수 많은 존재로 살았었지만 그 존재가 죽음으로서 그 존재의 마음은 종결 된 것이다.

 

떼미야의 의식은 그가 죽었을 때 종결되었고, 새로운 의식이 다음존재에서 재생연결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나까, 위두라, 수안나사마, 웨산따라도 각각 생애에서 사몰심(死沒心, 마지막 죽음의 의식)으로 종결 되었고, 새로운 생에서 재생연결식으로 다시 시작된 것이다.

 

왜 악업을 지어서 안 되는지, 왜 자살을 해서는 안 되는지

 

사몰심과 재생연결식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또 그 사이에 어떤 마음이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죽을 때의 마음(사몰심)과 다시 태어날 때의 재생연결식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이고 그런 과정을 윤회한다고 말한다.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은 일생에 있어서 딱 한번만 일어 난다. 그런데 재생연결식도 마음이기 때문에 대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 나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죽기 직전의 마지막 죽음의 마음에서 일어 났었던 대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라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대상이란 어떤 것일까. 초기불교를 잘 계승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다음의 세가지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첫째, 살면서 지었던 행위의 회상인 업(kamma)이 나타난다(K).

둘째, 업과 관련된 주변 조건인 업의 표상(kamma-nimitta)이 나타난다(KN).

셋째,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난다(GN).

 

 

모두 업과 관련이 있다. 죽기 전에 지었던 삶의 과정에서 이나 가장 인상적이었거나 강렬하였던 사건이 죽음직전의 마음에 표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업이나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다음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 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죽음과 재생

 

전생

현생

대상

 

 

죽음 직전의 마음 (**K/ KN/ GN 중에 하나가 대상이 됨)

 

마음

Pt

···

···

Cc

Pt

···

···

B

A

C

U

P

E

Sp

St

V

J

J

J

J

J

Cc

 

 

 

 

 

 

 

 

 

 

 

 

 

 

 

 

 

 

 

 

 

 

 

 

내생

3

4

(**)가 대상이 된다

내생의 대상

 

 

 

Pt

B1

B2

B3

···

B16

M

J

J

J

J

J

J

J

B

···

···

Cc

Pt

···

···

Cc

Pt

···

···

Cc

 

 

 

 

 

 

 

 

 

 

 

 

 

 

 

 

 

 

 

 

 

 

 

 

 

 

 

B : Bhavaga (바왕가), A : Atīta-bhavaga (지나간 바왕가), C : bhavaga-calana (바왕가의 동요)

U : bhavaga-uccheda (바왕가의 끊어짐), P : Pañcadvārāvajjana (오문 전향), E : 전오식 중 하나

Sp : Sampaicchana (받아들임), St : Santīraa (조사), V : Votthapana (결정), M : Manodvārāvajjana (의문전향)

J : Javana (속행), T : Tadārammaa (등록), K : (kamma), KN : 업의 표상 (kamma-nimitta)

GN : 태어날 곳의 표상 (gati-nimitta), Pt : 재생연결식 (paisandhi), Cc : 죽음의 마음 (cuti-citta)

출처; 아비담마 길라잡이

 

 

이런 과정을 본다면 왜 악업을 지어서는 안되고, 자살을 해서는 안되는 지에 대한 이유가 분명한 것이다.

 

한 존재의 일관성을 유지 시켜 주는 것은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면 물질과 정신을 만들어 내어 한 존재가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된 존재는 죽을 때 까지 그 틀을 유지 하게 된다. 한번 사람으로 태어 났으면 죽을 때까지 사람의 모습을 유지 하고, 한번 개구리로 태어 났으면 죽을 때까지 개구리 모습으로 유지 하지는 것이다. 도 중에 사람이 개구리가 된다든가, 개구리가 사람이 된다든가 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 나도 그 사람임을 알 수 있는 얼굴형태나 축적된 성향은 바뀔 수 없다. 죽어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 나지 않는 한 그 얼굴, 그 신체조건, 그 성향은 그대로 유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존재의 일관성을 유지 시켜 주는 것이 바왕가이다.  그 도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가지 마음

전생

현생

내생

재생연결식

바왕가

죽음의 마음

재생연결식

바왕가

죽음의 마음

재생연결식

바왕가

죽음의 마음

단한번

전생애 걸쳐

단한번

단한번

전생애 걸쳐

단한번

단한번

전생애 걸쳐

단한번

일생동안 모습과 성향을 유지

일생동안 모습과 성향을 유지

일생동안 모습과 성향을 유지

떼미야

자나까

수안나사

사람

개구리

천인

 

 

 

바왕가는 잠재의식로서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이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에 부딪치면 마음이 일어 나는데 그 과정이 을 짖는 것이다. 대상이 사라져 마음 또한 사라지면 다시 잠재의식으로 들어 가게 된다. 이렇게 일생 동안 수도 없이 반복하다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일어 날 때 이제까지 지은 업을 대상으로 하여 다음생의 몸과 마음이 결정 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지금 형성된 얼굴모습과 축적된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뜯어 고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전생의 업을 조건으로 하여 태어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생에 더 좋은 조건으로 태어 나기 위해서는 선업을 지어야 한다. 지금 비록 인간으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생에 무엇으로 태어 날지는 철저 하게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극단적인 예을 들자면 다음생에 축생으로 태어 날 수도 있고 개구리와 같은 파충류로도 태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비록 현생에서 개구리와 같은 파충류로 태어 났을지라도 다음생에 천상에 태어 날 수 도 있다. 그런 좋은 예가 하나 있다.

 

 

어떤 개구리 한 마리가 부처님의 설법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듣기가 좋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듣고 있다가 목동의 뾰족한 지팡이에 찔려

우연히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 개구리는 욕계 천상의 33천의 천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묘원법사의 불교방송 12연기와 위빠사나의 녹취록에서 참고한 글이다. 이런 예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개구리의 의식이 천인의 몸을 따라간 것도, 몸 안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직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법이라는 것이다. 그 개구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 충만한 마음으로 33천에 새로 태어난 과보를 받은 것이다.

 

불교에서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이 몸 저 몸으로 옮겨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환생이라는 개념이 철저히 부정 되는 것이다. 개구리에게서 일어난 것은 개구리의 영혼이 다음생의 천인으로 옮겨 간 것이 아니라 죽음의 마음이 선행하는 원인이 되어 천상에 태어 난 것이다.

 

비록 개구리 일지라도 목동의 칼에 찔려 우연히 죽음을 맞이 하는 그 순간에 부처님의 설법인지도 알지 못하고 듣기가 좋아서 충만한 마음을 낸 그 상태가 다음생을 결정 한 것이지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천상에 태어 난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천인의 마음과 개구리의 마음이 하나라거나 동일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작용만 하는마음을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 갈 때 변치 않은 마음이 있다거나 하나의 의식이있다고 생각 하는 것이 상견(常見)’이다. 반면에 한 존재의 죽음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이를 단견(斷見)’이라 한다.

 

불교에서는 이들 상견과 단견을 모두 배격한다. 이들 두가지 극단에서 벗어나 도와 과로 인도 하는 중도(中道)’만 있을 뿐이다. 이 중도가 8정도이고 이를 실천수행하는 것이 위빠사나라 한다.

 

사람으로 태어 났든지 개구리로 태어 났든지 업에 대한 과보로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 한번 결정된 이 몸과 성향은 죽을 때 까지 바꾸어 질 수 없다. 비록 몸과 성향은 바꿀 수 없다 할지라도 수행을 통하여 습관은 바꾸어 나갈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업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업을 짖지 않는 것이다.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짖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부처님이 제시한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고 바라지 말아야 한다.

 

가장 좋은 예가 좋은 일을 했어도 했다는 티를 내지 않는 것이다. 금강경의 무주상보시와도 같은 말이다. 이를 일컬어 무인작용심(無因作用心)’이라 한다. 대상과 마주 쳤을 때 단지 작용만 하는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업을 짖지 않는다면 재생으로 연결 되지 않아 다시 태어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2010-04-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