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5온12처18계의 세상, 넷상에서 각묵스님의 교학과 묘원법사의 수행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0. 4. 20. 17:36

 

51218계의 세상, 넷상에서 각묵스님의 교학과 묘원법사의 수행이야기

 

 

 

 

 

 

인식을 벗어난 세계

 

천상과 지옥은 실재할까. 흔히 하는 질문이고 종종 생각나는 의문이다. 이런 질문과 의문에 대하여 종교인들은 틀림 없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어렴풋이 그런 세계가 있을 것이라 여긴다.

 

타종교와 달리 불교의 세계관은 무척 다양하다. 유일신 종교가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분법적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여 불교는 크게 크게 욕계, 색계, 무색계 이렇게 삼계로 나눈다.

 

삼계도 악처와 선처로 나누어 지는데 악처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와 같은 4악도가 있고, 인간을 포함하여 욕계천상 색계천상 무색계 천상과 같은 선처로 분류 된다. 그런데 사람이 살고 있는 인간계와 축생계는 알 수 있으나 나머지 세계는 진짜 실재 하는 것일까.

 

인간과 축생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래서 그런 세계를 인식을 벗어난 세계라 한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같은 공간에 사는 개미가 자신이 사는 세계 밖에 인식 할 수 없다고 해서 같이 사는 인간들의 세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지구 반대편에 존재하는 종족이 있는데 그들을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 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주 저 너머 어딘가에 존재들이 있는데 우리가 그들을 모르거나 설령 있어도 그들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단지 그들이 없는 것이라고 결론 낼 수 없을 것이다.

 

자주 찾는 단골사이트

 

글을 쓰는 것이 취미이고 낙이다. 일이 없으면 글을 쓴다. 글을 쓸 때 인터넷을 많이 활용 한다. 인터넷의 장점은 무어니 해도 검색기능이다. 어느 사이트이든지 검색창이 있어서 원하는 키워드를 입력하면 바라는 자료를 찾아 낸다. 우리나라에 없는 자료는 외국의 검색창을 이용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자주 가게 되는 사이트가 생긴다. 주로 초기불교와 관련된 단골사이트들이다.  

 

초기불교와 관련하여 자주 가는 사이트가 초기불전연구원(http://cafe.daum.net/chobul)한국명상원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이다. 이들 사이트는 하루에 한번 이상 방문 도장을 찍는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사이트를 자주 찾게 되는 이유는 공감하는 자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초기불전연구원의 주인장인 각묵스님과 한국명상원의 묘원법사의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두분 하시는 말씀이 어떤 경우 구구절절 가슴에 팍팍 꼽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트의 특징중의 하나는 묻고 답하기가 있다. 불교 전반의 궁금한 사항에 대해서 수년에 걸친 축적된 자료이다. 해당 사이트에서 키워드 검색을 하면 정성스럽게 작성된 답변을 읽을 수 있다.

 

각묵스님은 주로 초기불교의 교학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 하고 있고, 묘원법사는 수행에 관하여 친절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교학과 수행에 관한 대표적인 초기불교 사이트가 초기불전연구원과 한국명상원이라 볼 수 있다.

 

개념에 속지 않기 위하여

 

최근 각묵스님은 불교신문에 초기불교 산책이라는 칼럼을 연재 하기 시작 하였고, 묘원법사는 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우연일까 이들 두분의 선지식들이 이번에 공통적으로 언급 하고 있는 사항이 51218계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실재(實在, Reality)하는 세상이다. 그런 실재를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바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임을 느낀다. 이것이 세상이라 한다. 세상은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각묵스님은 자신의 칼럼에서 실재 하는 세상에 대하여 초기경전의 부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 (마음의 대상인) ,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다. 만일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S35:23)

 

 

이처럼 세상 또는 존재 하는 모든 것이란 모두 안과 밖이 만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 눈이 형색과, 귀가 소리와, 코가 냄새와, 혀가 맛과, 몸이 감촉과, 마음이 법과 조우하고 부딪히는 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12처의 가르침을 통해서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이 것이 바로 일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이비설신의라는 감각장소(육내처)가 색성향미촉법(육외처)라는 감각대상과 부딪칠 때 아는 마음이 생겨난다. 이를 알음알이라고도 하고 식()이라고도 한다. 그 종류가 안식, 이식, 비식등 6가지이다. 이렇게 6내처와 6외처 그리고 6식을 더하여 18계라 한다.

 

이렇게 부처님이 우리의 몸을 오온으로 분해하고 또 18계로 나누어 설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 알음알이라 불리우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만나 조건적으로 발생하고 사라지는 찰나적인 흐름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 하거나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아이니 영혼이니 하는 개념에 속지 말자는 것이다.

 

괴로움의 바다에서

 

각묵스님이 18계를 주로 교학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과 달리 묘원법사는 수행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런 수행을 요점정리하여 매일 카페에 올리고 있는데 이를 옹달샘이라 한다. 마치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의 짤막한 게송을 연상 하는 옹달샘은 수행에서 우러나온 경험의 산물일 것이다. .

 

묘원법사 역시 18계를 벗어난 것에 대하여 대상으로 삼지 말 것을 강조 한다. 법문의 내용은 대부분 모곡사야도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법문집을 인용 하고 있지만 초기불교의 법사들은 철저하게 초기경전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살아가면서 행복한 날이 더 많을까 괴로운 날이 더 많을까.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괴로움이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세상을 괴로움의 바다라고 하였다.

 

괴로움의 바다에서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느낄 뿐이지 그 행복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괴로움이 지금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 된다면 과연 괴롭고 싶을까. 어떻게 해서든지 괴로움으로부터 탈출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신에게 의지 해야 할까. 불보살의 가피를 받아야 할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지옥은

 

가장 괴로운 세계는 지옥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지만 반신반의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지옥은 불교의 31개의 세계 중에서 가장 비참한 곳이다. 오직 고통만 있고 행복이란 찾아 볼 수 없는 지옥은 지은 업에 따라 가게 되고, 수명 또한 업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이런 지옥은 우리들의 인식을 벗어난 외부의 세계로서 우리 마음에 있는 여러 현상이 밖으로 반영된 것이라 보고 있다. 이 외부세계라는 곳이 다름이 아닌 우리 마음에 미세한 여러 계층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세계가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라거나 비실재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그 외부세계는 엄연히 실재 하는 세계이며 객관적인 사실로 존재 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외부 세계는 항상 마음으로 이해 되는 세계라는 것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유형의 마음들이 외부의 세계를 결정하기 때문에 마음이 없으면 외부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떤 중생은 천상에 태어나고, 또 어떤 중생은 지옥과 같이 특정한 세계에 태어 나는 것일까. 이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전생에 그가 그 세계에 태어나기에 적합한 업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세계와 마음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관점에서 본 다면 중생들이 사는 모든 세상은 중생들의 정신적인 행위가 만들어내고 지탱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이들 세계는 마음으로 하여금 새로운 환경 하에서 새로운 인격을 형성 하도록 향상을 계속 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고통을 겪는 이유는

 

그런데 그런 지옥을 지금 살아 가는 존재들도 살면서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와 비교 하여 인간만이 유일하게 살고 있으면서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지옥을 체험 하는 것이다. 그렇게 체험한 지옥은 죽은 다음에 바로 떨어지는 지옥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으면서도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겪는 이유는 무엇 일까. 이를 단지 불선업(不善業)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도 있지만 근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사견(邪見)때문이라 한다.

 

사견은 삿된 견해 또는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이런 사견이 있어서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고, 죽어서 그런 세계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타난 것은 무명과 갈애로 인한 불선업이지만, 진짜 범인은 숨어 있는 사견이라는 것이다. 사견이 있음으로 해서 무명과 갈애가 생기기 때문이다.

 

왜 사견이 근본원인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보통 먹고 싶고, 자고 싶고, 말하고 싶다고 할 때, 내가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내가 먹고 싶고, 내가 자고 싶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으로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내가 하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의식이 생겨서 자아가 있고, 더 나아가 영원히 변치 않는 진짜 나가 있다는 진아로 발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가장 경계한 상견(常見)이다. 그러다 보니 보아도 내가 보는 것이고, 들어도 내가 듣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은 조건과 결과에 따라서 아는 것이다. 즉 안이비설신의라는 감각기관이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감각대상에 부딪쳣을 때 아는마음(알음알이)이 일어나는 이것이 18계이다. 18계를 떠나서 보 는자, 듣는자, 행위를 하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

 

고통의 극복을 위하여

 

아는 마음은 단지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일 뿐이다. 바로 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성내는 마음이 일어날 때 내가 성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조건에 따른 성내는 마음일 뿐이라고 알아차리면 괴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예를 물질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물질적 정신적 현상으로 분리하여 알아차리기

현상

태도

알아차리기

실천

몸이 아플 때

마음까지 아프지 말고

물질적 현상으로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이것은 물질적 현상이네!”

배가 고플 때

배가 고프다가 괴로워 하지 말고

마음이 괴로울 때

괴로움 때문에 고통을 겪지 말고

정신적 현상이라고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지금 괴로워하고 있네!”

마음이 슬플 때

비탄에 빠지지 말고

지금 슬퍼하고 있네!”

 

 

 

이렇게 물질적 정신적 현상으로 분리하여 알아차려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것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나타난 현상에 내가 개입되면 갈애가 생긴다. 내가 몸이 아프고, 내가 배가 고프고, 내가 괴롭고, 내가 슬픈 것이다.

 

이럴 때 무대응하는 것이다. 무관심이 아니라 무대응이다. 무대응은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갈애을 일으키지 않고 단지 지켜만 보는 것을 말한다.

 

한량 없는 윤회속에서

 

12처가 일체이고, 18계가 세계라면 모든 존재는 순간 순간 조건에 따라 매번 일어 났다가 사라진다. 이것이 찰나윤회이다. 그런데 한 존재가 태어나서 죽는 일생을 살다 죽어서 다른 존재로 재생 하게 되면 일생윤회이다. 이렇게 찰나윤회와 일생윤회를 반복 하는 것이 모든 존재들의 숙명이다.

 

그런 나고 죽고 하는 과정 자체가 거시적으로 본다면 고통이라는 것이다. 지금 즐겁다고 해서, 지금 행복하다고 해서, 그 즐거움과 그 행복이 오래 가지 않는다. 일시적 즐거움일 뿐이고, 일시적 행복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 한다면 일시적 즐거운 느낌이고, ‘일시적인 행복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끊임 없이 윤회하며 태어나는 존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Anekajātisasāra   아네까자띠삼사랑

sandhāvissa anibbisa   산다위쌍 아닙비상

gahakāra gavesanto   가하까랑 가웨산또

dukkhā jāti punappuna   둑카 자띠 뿌납뿌낭.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둑카였네.

(법구경 153게송)

 

 

결국 태어나고 죽어서 윤회 하는 것 자체가 고통(둑카)’이라는 것이다. 그런 고통에서 탈출 하기 위하여 해법을 제시한 분이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설한 84천 법문을 다 읽어서 이해 하기란 쉽지 않다. 또 읽을 시간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법문을 알기 쉽게 요약하여 현대인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시절 인연이 도래하여서 인지 남방에서 공부 하고 되돌아 온 선지식들의 활약에 따라 육체적 고통, 정신적 괴로움, 육체적 불쾌감, 정신적 불만족등 지옥에서나 겪어야 할 사항에 대한 해법도 제시되고 있다.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비록 불행한 곳, 처참한 곳, 파멸처에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생사의 기로에선 절박한 심정일지라도, 비록 넷(Net)상에서나마 선지식들의 귀중한 가르침에서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발견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2010-04-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