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석가도 미륵도 오히려 그의 종이라는데, 그는 대체 누구 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0. 4. 28. 11:04

 

석가도 미륵도 오히려 그의 종이라는데, 그는 대체 누구 인가?

 

 

 

 

 

 

떡보살, 두부거사

 

요즘은 빵보다 떡을 더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빵집 못지 않게 떡집 또한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아는 법우 중에 떡집을 하는 분이 있다. 순례법회등 각종 행사가 있을 때 그분 집에서 만든 떡을 주로 사용 한다. 그 법우가 떡집을 해서 그런지 보통 떡보살이라 부른다. 물론 없을 때 부르는 명칭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하는 것은 아니다.

 

직업과 관련하여 또 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을 두부거사라 부른다. 두부공장을 하고 있는 그 거사는 행사가 있을 때 두부를 무상으로 보시하기도 한다.

 

법우들 마다 법명이 있긴 하지만 법명을 부르는 경우는 드물고 직업과 관련된 별명을 부르거나 실명을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 법우들은 불교교양대학에서 만났다. 만난지 만6년이 지났지만 열성적으로 나오는 사람을 중심으로 모임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법우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심지어는 얼굴만 익숙하지 이름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

 

법당에 앉게 된 연유

 

그런 법우들이 어떻게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종종 법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두다 하나 이상의 사연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다 보니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쳐서,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생겨서, 자녀의 대학입시 발원 때문에, 불교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서 등 여러가지 이유로 함께 배우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떡보살의 경우 자신이 떡집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동대문에서 남편과 원단장사를 했는데 거액의 보증을 서준 것이 문제가 되어 길거리에 나와 앉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 마음을 추수리기 위해 불교대학에 입학 했다는 것이다.

 

또 어떤 법우는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사람에게 전재산을 올인 하여 투자 하였는데 그만 잠적해 버리고 만 것이다. 졸지에 전재산을 잃게 되어 마음을 안정을 찾을 수 없어 법당에 앉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떡보살의 경우 떡집을 하면서 장사가 잘 되어 이제 안정권에 접어 들었고, 거액의 돈을 떼인 법우는 이제 더 이상 잠 못 자는 일은 없다고 한다.

 

불교대학에 다녔던 법우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가 중년의 나이라는 것이다. 왜 중년에 불교공부를 하게 되었을까. 그 것은 살아 온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살아 오면서 무언가 문제가 발생 하였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운 삶을 살아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락에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하여 안절 부절 못하고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아 누군가에게 의지 하여서 그 위기를 벗어 나기를 바래서 온 것이다. 그런 위기가 닥쳤을 때 교회로 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 쪽과 정서가 맞지 않은 사람들은 절로 찾아 온다. 그래서 불교교양대학의 연령대는 중년이 많다는 것이다.

 

신행생활을 하긴 하지만

 

불교란 무엇일까. 이런 주제로 수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의견을 내 놓고 있지만 딱 꼬집어 이야기 한다면 불교란 고통을 해결해 주는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지금 겪고 있는 근심, 탄식, 비탄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 연기의 연결고리를 추적 하다 보면 답이 나온다. 그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도를 제시한 분이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고따마 붓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교양대학에서 사성제나 팔정도, 12연기와 같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거의 언급 되지 않는다. 그 대신 열심히 기도 할 것을 주문 한다. 법회에 빠짐 없이 참석하고, 각종 재일이나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여 기도하면 불보살의 가피를 입을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돈을 때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안절부절 하지 않고, 떡장사를 하고 있는 법우는 이제 제법 안정권에 들어 갔다고 볼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이면에는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고, 더욱이 세월이 약이라고 세월과 함께 고통이 무디어 진 면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열심히 기도 하면 불보살의 가피를 입는다고 한다. 법우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관세음보살이나 산신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신심이 있는 불자들도 많다. 그래서 순례법회를 다닐 때 대법당 뿐만 아니라 관음전, 명부전, 삼성각등 왠만한 전각은 다 순례 할 뿐만 아니라 불사나 봉사, 절수행, 사경수행등 모든 면에도 매우 열성적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 관세음보살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아름다운 행위를 하는 자체가 관세음보살로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서 더 나아 가지 않는다. 6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또 절에 10년을 다니고 20년을 다녀도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절에서 스님들이 불교의 핵심교리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교리를 몰라서 못 가르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원인은 우리나라 불교가 선종인 이유도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항상 뒷전

 

선종에서는 교리에 대하여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선종의 특징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특징으로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교종에 대립하여 성립된 선종은 중국에서 발달한 독특한 중국불교이다. 그런 선종이 발달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한문을 들 수 있다.

 

한문의 한자(漢字)는 뜻 글자로서 글자 하나가 하나의이미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사람마다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고, 또한 격변화가 불문명해서 논리적인 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런 연유로 중국이라는 환경에서 선불교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당시부터 전승되어 오던 법의 종교로서의 불교가 신앙의 종교인 여래장사상으로 대체 된 것이다. 그런 여래장 사상을 대표 하는 것이 관음신앙, 정토신앙, 미륵신앙등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보살은 관세음보살이다. 또 가장 많이 찾는 부처님은 아미타부처님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3위 정도 될 것이다.

 

예로부터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은 늘 명호 되어 왔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항상 뒷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체 그는 누구일까

 

불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중국불교에서는 조사스님들의 가르침 보다 한 참 아래에 놓고 있다.

 

그 런 예중의 하나를 선사들의 화두수행에 대한 교과서와 같은 무문관(無門關)’에서도 볼 수 있다.

 

무문관 45칙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東山演師祖曰, 釋迦彌勒 猶是他奴. 且道, 他是阿誰.

동산연사조왈  석가미륵 유시타노  차도  타시아수


동산의 법연 선사가 말하였다.
석가도 미륵도 오히려 그의 종이다. 자아, 말해보라. 그는 대체 누구냐?”
(
무문관 45)

 

 

석가모니 부처님도 미래의 부처님으로 오실 미륵부처님도 그의 종이라 한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

 

삼매에 들어 가게 되면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 현재 미래가 구별이 없어지고, 공간 또한 한계가 없어져서 무한한 공간 속에서 노닐게 된다고 한다. 그와 같이 영원과 무한이 서로 교차 하는 그 곳은 성스럽고, 절대적이고, 삼라만상이 모두 그 곳에서 비롯되는 근원이기 때문에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고,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량분별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 한다. 마치 꿀 먹은 벙어리가 그 꿀맛을 다만 혼자서만 알 뿐 다른 이에게 말해 주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고 한다.

 

이렇게 언어가 끊어지고 분별이 통하지 않는 그런 경계를 그저 그것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참나(眞我, 大我), 성품, 진여, 자성, 평상심등으로 분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를 불성(佛性)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를 하느님, 야훼, 알라, 절대자, 창조주, 상제, 장군님, 동자님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들 명칭은 삼매의 경계에서 체험 하게 되는데 고대 우파니샤드 철할자들은 그 자리를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의 이법세계인 브라만(,)’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삼매의 경계는 만물이 비롯 되는 근원이자 궁극이며 일체의 분별적 인식이 태동 되는 것이라서 가 석가와 미륵의 아버지이자 모든 불보살을 종으로 삼는 자라는 것이다.

 

본래부터 나지도 죽지도 않은

 

그런 그는 한 물건(一物)’이라고도 표현 된다. 선가귀감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선가귀감)

 

 

본래부터 나지도 죽지도 않은 한 없이 밝고 신령스러운 것을 한 물건이라 표현 하였다. 선가귀감을 지은 서산대사는 또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석가도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전하랴(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직지심경 134)

 

 

한 물건이 동그라미로 표현 되었는데 그 것은 석가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 런데 한 물건이라는 것이 이름을 지을 수 없고 모양을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어떠한 이름도 붙일 수 있고 또 어떠한 모양도 그려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눈앞에 드러난 분별할 수 있는 현상계가 모두 한 물건에서 나왔고 내 몸과 마음을 포함 하여 전 우주의 삼라만상이 한 물건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한물건이 본마음이고 참나이고 불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선가에서는 부처님 보다 본마음과 참나와 불성에 대하여 더 강조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

 

참나와 불성에 대한 이야기는 BBS불교방송에서도 듣는다.‘마음으로 듣는 음악이라는 프로에서 정목스님이 나레이션 하는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비로 지켜 보는 의식이 있으니  항상 거기에 있어 왔고, 언제나 현존 하는 것이 참나이다.

그 것은 몸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참나는 영원히 현존하여 보는 자이고, 일어 나는 모든 것을 주시 하는 자이고, 모든 것을 지켜 보는 목격자이다.

 

 

불교방송은 불자라면 누구나 즐겨 듣는 라디오방송이다. 그런 인기 방송에 참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앞서 언급한 한 물건’ ‘동그라미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불성으로 표시 된다. 그래서 방송 말미에 거룩한 불성에 경배합니다라고 끝을 맺기 때문이다.

 

삼매상태에서 체험되는 ’ ‘한 물건’ ‘동그라미’ ‘참나’ ‘불성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하는 곡신과도 같다.

 

 

깊고 깊어서, 온갖 것이 비롯 되는 곡인 듯도 합니다. .. 맑고 맑아서, 마치 무엇인가 있는 듯도 합니다. 누구의 아들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늘님 보다 먼저임은 알겠습니다.

(노자 도덕경)

 

 

도덕경에 나오는 만물의 근원에 대한 설명이다. 무문관이나 선가귀감등에 나오는 한물건’ ‘동그라미와 너무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 모두가 내면의 삼매에서 체험 될 수 있고, 한번 마주치고 나면 그 경험이 너무 생생 하고 분명하여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경험은 초월적 변성의식에 따른 하나의 차원을 체험한 사건으로서 궁극적 진리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를 믿는 목적이 참나를 찾거나 불성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면 반쪽불교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다.

 

참나를 찾되 더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대자유를 찾는 것이다. 그 대자유란 무엇일까. 바로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그 방법을 분명히 제시 하였음에도 불구 하고 한국불교는 아직까지 반쪽불교인 상태이다. 그런 반쪽 불교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초기불교의 가르침으로 돌아 가는 방법 밖에 없다.

 

늦은 나이에 불교대학에 입교 하여

 

조계종에서 승가대학 교육과정을 전면 개편 한다고 한다. 이제까지 수백년간 내려 오던 서당식 교육에서 현대화된 교과로 바뀐 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조사스님의 말씀 대신에 부처님의 말씀이 대체 될 것이라 한다. 그 이야기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으로 되돌아 가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재가불자들도 이제는 참나 불성만 강조 하는 중국화된 반쪽불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불교교양대학에서도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등 불교의 핵심교리를 가르쳐서 고통에서 벗어 나게 해 주어야 한다.

 

늦은 나이에 불교대학에 입교 하여 법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심정적으로 절박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참나 주인공 불성과 같은 이야기는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들에게 지금 당장 고통을 해결 해 주려면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과 그 고통의 소멸, 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로 다시 태어 나게 될 것이다.

 

 

2010-04-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