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기도(祈禱)인가 불공(佛供)인가, 진정한 공양의 의미는

담마다사 이병욱 2010. 5. 6. 15:49

 

기도(祈禱)인가 불공(佛供)인가, 진정한 공양의 의미는

 

 

 

언제부터 인가 불자들에게 기도라는 말이 익숙하게 되었다. 각 사찰 마다 내걸려 있는 플레카드에 각종명목의 기도가 나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기도가 과연 불교적일까.

 

기도(祈禱)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말하는 기도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인터넷 백과사전을 찾아 보았다.

 

 

기도 (종교)  [祈禱, prayer]

 

사람이 하느님, , 초월적 영역, 초자연적 세력 등 신성하거나 거룩한 존재와 대화하는 행위.

 

 

한 문장으로 짤막 하게 언급된 내용이 기도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분명 하게 말해 준다. , 초월적 존재와 대화 하는 행위가 기도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인터넷백과 사전의 부연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도를 통해 신적인 존재와 나누는 대화는 그 신적인 존재가 자연 세력(예를 들면, 비의 신)이든, 인간행위의 수호자(예를 들면, 출산의 여신)이든, 조상이든, 만물 가운데 최고의 세력이든, 하늘의 신이자 창조주이든 간에 일상적인 사회접촉과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도에는 '아버지', '어머니', ''(), '' 같은 호칭이 쓰이며, 마찬가지로 죄의 고백, 간구, 감사, 찬송, 예물(제사)에 대한 말, 기도를 들어주면 예물들을 바치겠다는 약속(서원)을 한다. 원시시대 기도의 특징은 세상의 질병과 위험에서 벗어나고 현세적인 소유를 얻으려는 욕구에 있다.

 

 

기도는 초자연적존재 또는 초월적존재에게 자신의 죄의 고백을 한다든가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면 예물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일종의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 주고 받기)’라 볼 수 있다.

 

이런 기도의 가장 큰 목적은 세상의 질병,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소유를 얻으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기도는 유일신종교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왜 바라지 말라는 것일까

 

기도는 무언가를 바라는행위이다. 그런데 바라는 행위는 비불교적이라는 것이다. 왜 비불교적일까. 역사적 부처님은 고따마 붓다는 바라지 말라고 하였다. 바란다는 것은 윤회의 수레 바퀴를 굴리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론은 12연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윤회의 생성과 소멸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12연기에서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나는 순간에 업()을 짖는 다고 하였다. 업을 짖는 행위자체가 그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수반 하므로 원인과 결과에 의하여 다시 태어 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여섯감각기관이 여섯감각대상에 부딪치는 순간()은 부처님이나 아라한이라도 피할 수 없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부딪치는 촉으로 인하여 마음이 일어 나고 세상이 존재 하는 것이다. 만일 마음이 일어 나지 않으면 세상도 없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상태가 열반이라 한다.

 

촉은 반드시 좋은 느낌, 싫은 느낌, 덤덤한(무지한)느낌을 수반하게 되어 있다. 이런 느낌이 갈애로 발전 되었을 때 연기는 회전 하게 되고 결국 근심, 걱정, 탄식, 비탄, 슬픔의 결과를 낳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발견한 깨달음이라는 것이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나무아래서가 아니라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는 순간을 알아차려서,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작용심)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바라지 말아야 한다. 바랐다는 것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갔다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 단계는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되어 들러 붙는 단계에 이른다. 12연기에서 이를 취()라 말하고, 다른 말로 집착이라 한다. 집착의 단계가 되면 뗄레야 뗄 수 없게 된다.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님, 소원을 들어 주지 않는 부처님

 

기도를 열심히 하는 법우님이 있다. 그 법우님은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그 결과 이어서일까 딸은 결혼 한지 9년만에 아이를 얻었고, 아들은 그 토록 바라는 불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열심히 기도한 덕택에 불보살의 가피로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한다.

 

불자라면 누구한테나 들을 수 있는 소박한 이야기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불보살이 그 법우의 소원을 진짜 들어 준 것일까. 만일 진짜 들어 주었다면 그 불보살은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임에 틀림 없다.

 

그런 바램과는 달리 소원을 들어 주지 않는 부처님도 있다. 어느 노보살의이야기이다. 그 노보살의 불만은 남편의 형제들이 바라기만 한다는 것이다. 어려서 9남매가 있는 집에 시집와서 그들의 뒷바라지를 다하고 모두 출가 시켜 놓았는데 여전히 손을 벌리는 것에 대하여 못 마땅하게 생각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발 형제들이 이제 더 이상 손을 벌리게 해 주지 말아 주십시요라고 부처님에게 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부처님은 소원을 들어 주지 않고 형제들은 여전히 바라기만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노보살이 사는 집이 망해 버렸다면 형제들이 손을 벌릴일도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그 노보살의 소원을 들어 주었더라면 망하게 하였을 텐데 소원을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지난 5 1일 법륜스님이 안양투어에서 한 법문의 일부 내용이다.

 

부처님은 한가하게 불자들의 소원을 들어 주는 분이 아니다. 이미 열반에 들어 존재 하지 않는 부처님이 소원을 들어 줄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것이 보살사상 일 것이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과 같은 중생을 제도 하기 위한 원력 보살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는 기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보면 기도라는 말은 찾아 볼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바라지 말라고 하였으니 기도가 있으면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북방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긴 하였지만 생사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항상 큰 자비와 지혜로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무주처열반(無主處涅槃)’사상이 있어서 남방 테라와다 불교와 크게 대비 된다. 남방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 따르면 될 뿐 어딘가에 부처님이 존재 한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기도가 없었다

 

불자들이 흔히 쓰는 기도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사용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옛날에는 기도라는 용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마성스님의 글을 보면 기도라는 말 대신에 불가에서는 불공(佛供)’이라는 말을 사용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공이란 무엇일까. 문자 그대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말한다. 불공의 원어는 빠알리어로  ‘붓다 뿌자(Buddha-pūjā)’이다. 불공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마성스님의 글을 참고 해 보았다.

 

 

“부처나 보살에게 음식·향·꽃 등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치는 의례,

또는 그것을 바치며 소원이 성취되기를 비는 의례”

(마성스님의 집에서 불공 올리는 방법에서)

 

 

불보살에게 음식, , 꽃등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치는 의례라 한다. 또 소원이 성취되기를 비는 의례라 한다. 여기서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은 유일신교와 같이 바라기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겠다발원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절에 가면 의례히 불공 드리러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일신교의 영향이어서 인지 요즘은 불공이라는 말 대신에 기도한다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기독교 용어화 되다시피한 기도 대신에 불공이라는 훌륭한 말이 있음에도 불구 하고 잘 사용 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기독교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교를 믿긴 믿되 무언가 잔뜩 바라고 믿는 다면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는, 바람으로 시작해서 바람으로 끝나는 기독교를 따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불공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불공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마성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는 직접 부처님께 음식과 의복, 의약품과 같은 필수품을 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육신을 가진 부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남방이나 북방 모두 불상이나 불탑에 공양물을 올린다. 그 공양물 내용을 보면 남방과 북방의 내용이 약간 다르다.

 

 

남북방불교에서의 공양물

 

공양물

  

남방 테라와다(상좌불교)

,

 

북방 마하야나(대승불교)

과일, 음식물

한국의 경우 육법공양

(향·등·차·과일·꽃·쌀)

 

 

남방불교의 경우 음식보다는 주로 향이나 꽃을 공양드리고, 북방불교의 경우 주로 과일이나 음식물을 많이 올린다. 우리나라의 경우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고 해서, , , , 과일, , 쌀을 올린다.

 

 

 

 

상좌불교인 스리랑카 사원의 공양물

사진 ; http://www.pbase.com/kaso/lanka

 

 

 

 

 

대승불교인 한국사찰의 공양물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불공이 꽃, 과일, 음식물, , , 쌀과 같은 물질적인 것만 있을까. 남방 상좌불교 전통에 따르면 불공을 크게 둘로 구분한다고 한다.

 

 

상좌불교에서 불공의 의미

 

 

공양의 의미

아미사-뿌자

(āmisa-pūjā)

재시(財施) 혹은

재공(財供)

향과 꽃, 음식·의복·의약등을 불전 혹은 불탑에 올리는 것

담마-뿌자

(dhamma-pūjā)

법시(法施) 혹은

법공(法供)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거나 법을 설하여 널리 전파하는 것

 

 

우리나라의 경우 대체로 공양은 꽃, 과일, 음식물, , , 쌀을 불전에 올리는 것을 말하고 기도는 별도로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남방상좌불교 전통에서는 대체로 재물을 올리는 재시와 법을 되새기거나 전파하는 법시를 불공의 개념으로서 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양과 보시 또한 같은 개념으로 사용 하고 있는 것이다.

 

보시와 같은 개념으로서의 공양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법()·승()의 삼보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이란 뜻이다.

셋째, 봉사함을 말한다.

넷째, 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등을 말한다.

 

 

절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의 공양을 제외 하면 보시와 같은 개념의 공양은 첫번째에서 세번째까지 해당 될 것이다.

 

천배 만배를 바라는

 

테라와다(상좌불교)와 마하야나(대승불교)의 불상을 보면 차이점이 몇가지 보인다. 테라와다의 경우 오로지 고따마붓다 한 분을 모시고 있는 것에 비하여, 한국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하여 비로자나 부처님, 아미타부처님, 약사여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등 여러 부처님과 보살을 모시는 경우를 알 수 있다. 그런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 테라와다의 부처님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경우가 많으나, 우리나라 불보살은 눈을 지긋이 내려 뜨고 측은한 눈으로 중생을 내려 보고 있는 모습이다.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공양물도 테라와다의 경우 주로 꽃을 공양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꽃을 포함하여 떡, 과일, , , 초등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마도 불전함일 것이다. 복전함이라 불리우는 불전함은 어느 법당에 가나 다 있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테라와다의 경우 비록 사진으로 확인한 경우에 지나지 않지만 불전함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 불전함에 돈을 넣고 복을 비는데 천배나 만배를 바란다. 실제로 불교교양대학의 교재에 그런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만원짜리 한장을 넣고 10000배의 복이 오기를 바란다면 1억원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대체로 부처님과 보살들에 대하여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불전함에 돈을 넣는 행위자체가 무언가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무언가를 바라기 때문에 기도를 하게 된다. 그 기도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소박한 기원일 수 있고, 자녀의 수능고득점이나 대학입학과 관련된 입시기도일 수 있고, 공개입찰경쟁에서 낙찰되기를 바라는 사업목적 기도일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초월적 존재의 전지전능한 힘을 바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그와 같은 경우를 신의 은총 또는 은혜를 입었다  말하고, 불교에서는 불보살의 가피를 받았다라고 말한다. 신의 은총이든, 불보살의 가피이든 바래서 이루어 지게 하려는 의도는 모두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보살의 가피를 바라는 것이 불교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는

 

기도가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은 될 수 있지만 본질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까. 더 이상 기도를 하지 말고 불공을 드려야 한다.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위는 무언가 바래서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하기를 원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은 향과 꽃, 음식·의복·의약등을 불전에 올리는 재보시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거나 법을 설하여 널리 전파하는 법보시의 형태로 나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자라면 이렇게 재보시와 법보시를 하는 것이 진정한 불공이라는 것이다.

 

기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비불교적 행위이다. 이제 비불교적이고 기독교 따라하기의 전형인 기도라는 말을 폐기 할 때가 되었다. 불자라면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불공을 드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들이 아닐까.

 

 

2010-05-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