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서러운 중생살이에서 성자의 계보로,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로 본 사성제

담마다사 이병욱 2010. 5. 10. 15:11

 

서러운 중생살이에서 성자의 계보로,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로 본 사성제

 

 

 

 정체성을 거론 하는 이유는

 

불교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때문에 문제를 제기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웃 종교의 경우 기독교란 무엇인가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명료 하기 때문이다.

 

통불교를 지향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정체성을 거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언가 명료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스님은 불교가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교수는 불교가 저런 것이라고 말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고, 또 다른 이는 저렇게 말한다.

 

그런데 초기불교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 하고 있는 테라와다에서는 불교가 어떤 것이라느니, 깨달음은 또 어떤 것이라느니 하고 왈가왈부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명료 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는 오로지 고따마붓다의 가르침만 따른다. 따라서 깨달음도 고따마붓다가 깨달은 내용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고따마붓다가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그리고 그 실천 수행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명확하게 선언하였다. 부처님이 법의 수레바퀴를 처음으로 굴릴 때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사성제이고 이의 실천 수행 방법은 팔정도라고 명확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과 동일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개척해 놓은 길로 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닙바나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닙바나를 성취 하기 위하여

 

그 닙바나를 성취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까. 그 구체적인 수행방법이 나와 있는 것이다. 이를 칠정정과 16단계의 지혜라 말한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다. 각 단계를 거칠 때 마다 일어나는 독특한 경계를 체험 하게 되는데 최종적으로 도(magga)와 과(phala)를 성취할 때 까지 진행된다.

 

그 과정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칠청정과 16단계 지혜

 

칠청정

 

16단계 지혜

1

(sīla visuddhi)

 

네 가지 청정한 계

2

마음(citta visuddhi)

 

근접삼매와 본 삼매

3

(di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을 극복함

(kakhāvitara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와 견(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

(patipadā-ñāadassa visuddhi)

4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

6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paisa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na)

6 7사이에

13

종성의 지혜(gotrabhu ñāna)

7

지와 견

(patipadā-ñāadassa visuddhi)

14

도의 지혜(magga ñāna)

15

과의 지혜(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a ñāna)

2010-05-09 진흙속의연꽃

 

 

먼저 계를 청정하게 하고

 

닙바나를 향하여 갈 때 가장 첫번째로 해야 될 것은 무엇 일까. 그 것은 계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계는 감각적욕망으로부터 수행자를 보호 해 주는 첫번째 울타리인 것이다. 그런 계는 네가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계목의 단속에 관한 계이다.

둘째, 감각기능의 단속에 관한 계이다.

셋째, 생계의 청정에 관한 계이다.

넷째, 필수품에 관한 계이다.

 

 

순수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는

 

순수한 위빠사나의 길을 따르는 수행자는 사마타수행을 채택하지 않는다. 그대신 계를 청정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안에서 벌어지는 정신과 물질(명색, nama-rupa)의 변화에 대한 수관으로 바로 들어 간다.

 

이러한 수관은 근접삼매에 필적하고 이를 찰나삼매(khanika-samadhi)’라 한다. 순수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는 이를 마음의 청정(심청정)’으로 간주 한다.

 

그 어떤 움켜 쥠도 없이

 

수행의 목적은 무엇일까. 칠정정과 16단계의 지혜를 얻는 것이 목적일까. 청정범행(brahmacharya)을 하는 것이 목적일까. 수행의 목적을 정의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움켜쥠도 없이 모든 번뇌들을 완전히 절멸 하는 것이다.”

 

 

여기서 움켜쥠도 없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린다라는 말과 같다. 초전법륜경에서 말하는 오취온(五取蘊, pancupādānakkhandhā)’을 놓아 버리는 것을 말한다.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의 원천인 오취온을 놓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첫번째, 정신과 물질을 구별 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

 

나라는 존재가

 

16단계 지혜에서 가장 먼저 알아야 될 사항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이다. 나라는 존재를 이렇게 정신과 물질로 환원해 보면 영원한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를 청정하게 해 주는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견청정이라 한다.

 

 

두번째,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paccaya pariggha ñāna)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니고,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니고

 

알어차림이 세밀해지면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먹을려고 할 때 먹으려는 의도가 먼저 일어나고, 이어서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상태가 원인과 결과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오온이 정신과 물질이 우연적으로 발생한 것도 아니고,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닌 연기법에 따라 원인과 결과의 산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세번째,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마치 도()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이 단계가 되면 뭉쳐 있던 개념이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무더기로 보인다. 또 세상이나 모든 존재가 조각 조각 부서져 보이는 것이다. 이 때 수행은 한단계 급격하게 향상된다. 수행이 잘 되어서 사띠와 사마디가 균형 있게 유지 되는 이 때 마라가 출현하는데 통상 10가지로 본다.

 

여기서 마라를 빠알리어로 낄레사(kilesa)라 하고 우리말로 장애라 한다. 10가지 장애는 무엇일까.

 

 빛이다

 

수행중에 빛을 보는 것이다. 빛을 보면 수행자가 , 이제 내가 깨달았구나!” 라고 생각 하기 쉽다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단순한 현상임에도 불구 하고 그 좋은 경험을 놓지 못하고 남에게 이야기 하지도 않고 혼자 즐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길이 아닌 길로 가기 때문이다.

 

지혜이다

 

특히 담마를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그래서 , 이게 이래서 그렇구나!”라고 너무 기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다는 기쁨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길로 따라 가면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가 아니라 비도로 가는 것이다.

 

환희심이다

 

고요함이다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고요함에 감싸이게 된다. 이럴 때 빠져 나올 생각을 않는다. 이것도 그 상황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조건에 따른 결과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그 어떤 것도 움켜 쥐지 마라라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고요함이라는 것도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는 것이다. 고요함은 잠시 일어나는 번뇌인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이다

 

행복함 조차도 번뇌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행복감이 일어나지 않으면 괴롭기 때문이다. 그런 행복감은 조건에 따라 조금씩 바뀌고, 행복감이 없을 때 고통을 느낀다. 행복감은 잠시 일어나는 현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이다

 

이 때 하는 말이 정말 부처님 말씀이 맞구나라고 말하며 아무나 붙잡고 전법 하려 하는 것이다. 오로지 이것 뿐이라는 믿음에 정복 당하는 것이다. 설령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집착하다 수행이 순조롭게 되지 않을 경우 그 믿음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잃어 버리게 된다.

 

분발이다

 

경행이 잘 된다고 해서 밤을 세워 하고픈 욕망이 생겨 나는 것이다. 좌선을 몇시간 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다가 뚝 떨어지면 힘을 잃게 된다. 그런 분발도 그런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엄청난 노력이나 에너지조차도 잠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확신이다

 

이 길로 가면 틀림없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확신도 조금이라도 미약하게 되면 힘을 잃게 된다. 그럴 때 나한테 이런 확신이 일어 났구나라고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평정심이다

 

우뻬카도 안된다는 것이다. 우뻬카의 상태도 다 다른데, 다 다름을 보지 못하면 무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평정심이 되었을 때 나에게 평정심이 일어났나보다하고 알아차리면 되고, 평정심이 깨졌을 때 억울해 하지 않고 가버렸나 보다하고 집착하지 않는다.

 

애착이다

 

잔잔한 기쁨조차도 되비치지 않는다면 애착이 된다. 그러므로 되비쳐 보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열가지 장애를 따라 가다 보면 길이 아닌 곳으로 빠지게 된다. 마치 도처럼 보이는 모든 현상들에 대하여 단지 현상으로 알아차리면 그 길에서 벗어나 도의 길로 갈 수 있다.

 

네번째,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얼굴표정이 맑고 온화하다

 

그 다음 한 단계 더 성숙되는 단계가 생멸의 지혜이다. 그 길로 잘 접어 들면 네번째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이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혜이다.

 

이 단계가 되면 모든 것이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들어 온다. 개념이 사라지고 일어남과 사라짐이 한눈에 들어 오는 것이다. 존재 하는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 수행이 성숙 된 것을 잘 아는 사람은 스승일 것이다. 생멸에 지혜에 이른 제자는 다음과 같이 스승에게 비칠 것이다.

 

 

그의 얼굴 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하다. 그는 스승을 향해서 공손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할 것이다. 또한 스승에게 예의가 바르고 조용하게 보고 한다. 이는 매우 훌륭한 일이다.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수준에서 생멸의 지혜로 올라선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서)

 

 

생멸의 지혜에 이르른 제자가 스승에게 이야기 할 때 스승은 수행자를 보기만 해도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제자의 얼굴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다섯번째,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

 

보는 즉시 무너지니

 

변화하는 현상을 계속 보고 있으니까 이제는 일어남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라짐만 보이게 된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발을 디디면 발이 사라지고, 소리를 들으면 소리가 사라지고, 밥을 먹으면 밥이 사라지고 하는 식이다.

 

마치 자신이 발만 디디면 이 땅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붕괴가 일어 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 하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붕괴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자각 하지 못하면 거기서 헤어 나지 못하고 허무감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전에는 이런 감정이 나에게 없었는데 지금 일어 나고 있는 것을 보면 없었던 것이 일어나는 현상이구나”” 지금 나에게 붕괴가 일어 나고 있구나하고 모든 것이 붕괴 하고 있구나하고 되비쳐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이전(생멸의 지혜) 까지만 해도 사띠(알아차림)할 수 있었지만, 붕괴가 일어 나는 그 때 부터는 대상이 잘 보이지 않고 자꾸 사라지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 무너지는 구나하고 느끼는데 그 때 삼빠잔나(sampajañña, 확실한 앎)가 일어 나야 하는 것이다.

 

삼빠잔나를 하게 되면 대상이 무너지고 무너지고 하면서 그 대상을 보고 있는 정신상태가 아주 명료 하게 자각이 된다. “아 무너지는 구나하는 사띠가 보이고, “이것도 무너졌구나하는 그 사띠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붕괴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이해를 되비쳐야 한다. 이것을 빠띠위빠사나(pati-vipassana)라 한다.

 

무너짐 또는 붕괴, 소멸을 빠알리어로 방가(bhaga)’라 한다. 이 방가를 기점으로 수행에 있어서 하나의 큰 획을 긋게 된다. 16단계의 지혜 중에 붕괴를 자각 하면서 한 획이 그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첫번째 성자를 수다원이라 하는데 이 붕괴를 정확히 인지 하고 관찰 하는 사람을 준수다원이라 한다. 준 수다원은 아직 수다원이 되지 못하였지만 이대로 곧장 가게 되면 성인이 되는 것이다. 수행에 있어서 반은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준수다원을 빠일리어로 쭐라소따빤나(cula-sotapanna)라 한다. 이 시점부터 수행자의 급이 달라 지는 것이다.

 

여섯번째,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이 세상에 나 혼자이구나!

 

수행에 있어서 가장 핵심 포인트는 일어나고 사라짐을 아는 것이다. 그 것을 얼마나 명료하게 아느냐가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달 하는냐 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다면 수행자는 이제 안주 할 곳이 없게 된다. “어디 가서 의지 할 것이 없구나” “이 세상에 나 혼자이구나 하는 외로움이 엄습해 온다.

 

모두 다 사라지니까 어디 가서 도움을 구할 수 도 없다. 이때부터 공포가 밀려 온다. “이제 어떻게 될까하는 공포는 존재 자체에 대한 공포가 되는 것이다.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다. 죽어도 피난처가 없고, 살아도 피난처가 없다. 여기도 저기도 갈 곳이 없다.

 

이렇게 감각대상이 모조리 무너지지만 여섯감각기관은 모른다. 왜냐하면 관성에 의지 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상이 무너져 내리니까 어디에다 의지 할 지 몰라 공포가 밀려 오는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대상이 사라지고 자신의 상태가 드러난 것이다. 이 때도 없던 것이 일어 난 현상으로 관찰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침몰되어 다음단계로 넘어 갈 수 없다. 이 때 공포감이 일어나면 나에게 공포감이 일어 나는 구나하고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일곱번째,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존재한다는 것이 위험한 것이구나!

 

공포의 드러남이 극복 되자 이번에는 뭔가 대단히 위험하다는 느낌이 다가 온다. 이 존재계 자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 한다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구나하고 아는 것이다.

 

왜냐 하면 존재 한다는 것은 다 무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머리카락이, 이 뼈가 무너지는 고통을 겪어야 되겠구나하며 존재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위험 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존재 하는 곳이 욕계, 색계, 무색계인데, 정신만 있는 무색계에도 가 보았자 무너질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모든 존재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나만 몰랐을 뿐이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는 물론 미래도 그럴 것이다. 이런 통찰이 일어 나면서 위험 하다!”라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다.

 

여덟번째,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결국 고통이더라!

 

전에는 좋은 것에 매달렸는데 잘 보니 좋은 것도 고통으로 떨어 지는 것을 보고 ,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다 똑같구나하는 자각이 밀려 온다. 따라서 좋은 것에 매달릴 필요도 없고, 싫은 것에 매달릴 수 없어 더욱 더 위험 한 것이다.

 

이제 매달릴 것 조차 없는 것이다. 이러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가 오게 되는 것이다. “좋은 것이라고 매달렸더니 결국 고통이었더라하며,  그거 조차 사라지니 이제 무엇을 일으키려고 하는 의지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의지를 일으켜서 이루고자 하며 살아 왔고, 그리고 열심히 이루어 놓았지만 결국 모두 사라졌을 때 의도적인 형성을 이룬다는 것, 무지(무명)로 인한 행(상카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정말 위험 하구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홉번째,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벗어 나야 한다!

 

형성해보야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라는 의욕이 일어남과 함께 이 모든 존재에서 벗어 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로 하여금 자유를 향한 갈망이 일어 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무언가 고통에서 벗어 나고 싶다는 반작용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 모든 존재에서 확실하게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 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명상에 대한 집중이 안된다.

 

앉으면 무너지고, 앉으면 무너지고 하여 벗어 나야 된다된다 라는 현상이 발생 되었을 때 이를 잘 관찰 하면서 극복 해야 한다. 이 때 빠띠위빠사나(삼빠잔나)를 해야 그 상황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

 

 

열번째, 깊이 숙고 하는 지혜(paisakhā ñāna)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서 반조가 일어난다. 소리가 이렇게 사라졌으면 나를 구성 하고 있는 오온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느낌()이라는 것, 견해()라는 것도 현상에서 가차 없이 사라져 버리고, 순간 순간 일어나는 마음() 또한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색수상행식에 대한 반조가 일어 나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모두 변화 하는 것이다하는 반조가 일어 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있어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오온개공)’는 말과 같다.

 

 

열한번째,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

 

흐르는 물처럼

 

그러면서 무지로 인한 상카라가 이제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일어나면 금방사라지고, 일어나면 금방사라지고 하여 흐르는 물처럼 조용히 진행 되면서 우뻬까(평정)상태로 들어 간다. 이것이 상카라가 우뻬카 상태로 들어가는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이다.

 

 

열두번째,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na)

 

진리와 합일이 일어나며

 

이렇게 모든 형성이 진정되면서 진리와의 합일이 일어난다. 일곱가지의 깨달음의 요소가 자신에게 다 일어 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띠, 사마디, 우뻬카, 삐띠, 빳사디 등이다.

 

이 뿐만 아니라 37조도품을 자신에게 견주어 보니 그런 법과 내가 합일 하고 있구나하는 이해가 일어 나는 것이다.

 

 

열세번째, 종성의 지혜(gotrabhu ñāna)

 

서럽고 서러운 중생살이가 끝나고

 

그러면서 계보 변화가 일어난다. 서럽게 살아온 중생계보에서 성인계보로 족보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 도와 과가 일어 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하고 자기도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본인들은 그것을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에 일어 나기 때문이다. “, 정말로 내가 사라지는구나하고 자신의 전 존재가 사라짐을 딱 아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딱 사라지는 것이다.

 

 

고귀한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

 

다음 표는 출세간의 도와 과를 인식하는 과정을 보인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jetavana

 

 

 

 

아비담마 길라잡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만일 수행자가 출세간의 도와 과의 증득을 목표로 한다면 위빠사나를 닦아서 그런 경지에 도달 하도록 한다.

 

표에서 출세간의 도의 인식과정을 보면 보통의 경우와 예리한 경우가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바왕가의 동요(V)와 바왕가의 끊어짐(A)이 일어나면서 의문전향(D)이 일어 난다. 보통의 경우 준비(Pa), 근접(Up), 수순(An)순의 단계를 거쳐 종성(G)이 일어난다.

 

종성은 고뜨라부(gotrabhu)라 하는데 근접삼매에서 본삼매로 들어가는 심찰나를 말하고, 계통을 바꾸는 마음을 말한다. 이것은 욕계의 범부의 혈통에서 고귀한 마음의 혈통으로 바뀌기 때문에 종성(種姓)이라는 표현을 사용 한다. 종성의 마음 바로 다음에 다섯번째 자와나에서 본삼매에 속하는 첫번째 자와나가 일어난다.

 

이것은 5가지 색계의 유익한 마음이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들 가운데 하나이거나(10), 4가지 무색계의 유익한 마음이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들 가운데 하나 이거나(8), 4가지 도나 과의 마음 가운데 하나이다(8). 그래서 모두 26가지가 된다.

 

여기서 위빠사나의 도와 과를 목표로 한다면 위빠사나가 무르익어 본삼매가 일어날 그 순간에 잠재의식을 뚫고 의문(意門)전향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둘 혹은 세개의 위빠사나의 마음이 무상등의 특상중 어떤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다. 여기까지가 준비(Pa), 근접(Up), 수순(An)과정이라 한다. 그 다음에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종성의 마음이 일어난다. 바로 이 단계가 범부에서 성자로 됨으로써 고귀한 존재가 탄생 되는 것이다.

 

 

 

열네번째~열여섯번째, ‘도의 지혜(magga ñāna)’ ‘과의 지혜(phala ñāna)’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a ñāna)

 

모든 것이 사성제로 보이고

 

무엇이 일어 났는지 자기는 잘 모른다. 그런데 뭔가 일어 났는지는 모르는데 거기서 깨어나면 세상이 변해 있는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는 것이다. 마치 새로운 아기가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순간에 일어난다. 그래서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에 들어 서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자가 되는 것이다. 고통이 소멸되고 있다는 것이 성자이다. 팔라()를 얻게 되면 그 때 부터 모든 현상이 사성제로 보인다. 연기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깨달았는지 알려면 이야기 할 때 얼마나 연기에 달통해 있느냐로 알 수 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연기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서럽고 서러운 중생살이가 끝나고 밝고 빛나는 희망적인 성자의 길로 접어 들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 고통의 소멸로 가는길 팔정도

 

도와 과를 얻으면 도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도와 과에서는 성자의 지위를 네단계로 나눈다.

 

 

첫번째가 수다원이다.

두번째가 사다함이다.

세번째가 아나함이다.

네번째가 아라한이다.

 

 

수다원을 빠알리어로 소따빤나(sotapanna)라 한다. 여기서 소따는 흐름을 말하고, 빤나는 들어섬을 말한다. 따라서 흐름에 들어 섰다는 말이다. “고통의 소멸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하여 이를 한역 하면 예류자또는 입류자라는 뜻이 된다. 그 길이 무엇일까. 바로 팔정도이다. 왜냐하면 팔정도는 고통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성스런 길이기 때문이다.

 

사다함은 빠알리어로 사까다가미(sakadagami) 라 한다. 여기서 사까는 한번 이라는 뜻이고, 아가미는 온다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한번 오는 자라 해서 일래자라 한다.

 

아나가미(anagami)는 아가미에 부정 접두어 안(an)이 붙어서 다시 이세상에 오지 않는 이라는 뜻이 되어 불환자라 한다.

 

아라한(arahan)완전하다’ ‘완성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어디에도 오지 않는 것이다.

 

최대 일곱생이다

 

16단계의 지혜를 거쳐 수다원이 되었지만 아라한이 되기 까지는 7생이 남아 있다. 7생을 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최대 7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수다원인 채로 죽으면 최대 일곱생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있어서 감각적 욕망에 사로 잡힐 수 있고 절대자에게 귀의 할 수도 있다. 또 완전한 열반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도망다니거나 피해 다닐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닙바나를 성취한 이상 반드시 일곱생 이내에 해탈을 얻게 되어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다원과 다른 성자들과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일까.

 

중생을 옭아 매는 10가지는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10가지 족쇄가 있다. 이를 빠알리로 삼요자나(samyojana)라 한다. 그런 요소 때문에 윤회하고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하면 윤회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중생을 옭아 매고 있는 족쇄를 풀어야 하는데 그 10가지는 다음과 같다.

 

 

 

존재를 윤회 하게 하는 10가지 족쇄(samyojana)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구분

1

유신견

personality-belief (sakkāya-ditthi)

풀림

풀림

풀림

풀림

거친

(오하분결)

2

법에 대한 의심

sceptical doubt (vicikicchā)

풀림

풀림

풀림

풀림

3

잘못된 수행

clinging to mere rules and ritual (sīlabbata-parāmāsa; s. upādāna)

풀림

풀림

풀림

풀림

4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탐심)

sensuous craving (kāma-rāga)

 

옅어짐

풀림

풀림

5

악의(진심)

ill-will (vyāpāda)

 

옅어짐

풀림

풀림

6

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craving for fine-material existence (rūpa-rāga)

 

 

 

풀림

미세한

(오상분결)

7

무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craving for immaterial existence (arūpa-rāga)

 

 

 

풀림

8

들뜸

restlessness (uddhacca)

 

 

 

풀림

9

무지

ignorance (avijjā)

 

 

 

풀림

10

아만

conceit (māna)

 

 

 

풀림

2010-05-09 진흙속의연꽃

 

 

 

첫째, 유신견이다

 

유신견은 빠알리로 사까야딧띠(sakkāya-ditthi)’라 한다. 까야는 우리말로 을 말하고, 여기에 sat라는 존재한다라는 뜻이 붙어 몸이 있다는  견해가 유신견이다. 우리 몸이 있다라는 견해는 삿된견해(邪見)이다. 왜냐하면 우리 몸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윤회 하기 때문이다.

 

 

둘째, 법을 믿지 않는 것이다

 

존재 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법 즉, 연기법을 믿지 않고 의심 하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어 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왕따 당하는 듯한 이유는 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해도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범부가 욕하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셋째, 잘못된 수행이다.

 

누군가에게 빌거나 외부적 요소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잘못된 수행의 원인이 된다. 신에게 빌고, 공양물을 올리고 자신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수행이 중생을 윤회하게 만든 다는 것이다.

 

 

네번째, 감각적쾌락에 대한 욕망이다.

 

이것은 탐심(욕심내는)을 말한다.

 

 

다섯번째, 악의이다.

 

이것은 진심(성내는)을 말한다.

 

 

여섯째, 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색계는 욕계보다 순화되고 정화된 존재들이 사는 세계를 말한다. 색계를 영어로 fine-material existence 라 한다.

 

 

일곱째, 무색계에 존재 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무색계는 색계 보다 더 정화된 정신체(formless material)가 사는 세계을 말한다.

 

 

여덟째, 들뜸이다.

 

아홉째, 무지이다.

 

열째, 아만이다.

 

 

수다원이 얻는 지혜는

 

수다원이 될 때, “모든 존재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구나라고 이해 하고 정말 자기가 딱 사라진다고 하였다. 그 때 무엇을 알게 될까.

 

몸과 마음이 영원한 것이 아니구나라고 알며 첫번째 족쇄가 끊어 지는 것이다. 이렇게 유신견이 끊어지면 법에 대한 의심을 할 수 없다. 자기가 직접 경험 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찾아 보아야 그 것 밖에 없더라하고 의심하지 않게 된다. 이 때 의심이 툭 끊어지고 또한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도 끊어 진다. 그러면서 누구 한테 기도를 한다거나 의지 해 보아야 그것이 안되는 것을 알고 나 스스로 이렇게 일어나는 구나하고 잘못된 수행에 대한 집착이 툭 끊어 지는 것이다.

 

이 세가지 족쇄가 끊어 지면서 동시에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면 얻는 지혜는 무엇일까. 굉장한 지혜가 있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매우 단순 하다.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진다이것이 성자의 흐름에 들어선 수다원이 자각 하는 지혜이다.

 

7생을 1생으로 줄이려면

 

그러나 수다원은 나머지 7생을 더 살아야 한다. 7생을 1생으로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서 존재 하는 모든 것은 매우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7생을 더 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생각이 들까.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이생에서 즉시 끝내려 할 것이다.

 

그런데 수다원 과를 얻었음에도 불구 하고 여전히 탐심과 진심은 변함이 없다. 그럼 뭐가 달라진 것일까. 여전히 좋아 하는 것에 대하여 애착은 하지만, 애착 하는 것에 다가 갔다가 결과가 예상 되면 딱 하고 돌아 온다는 것이다.

 

중생은 그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업을 짖지만 수다원이 비록 그 관성에 의하여 나가지만 그렇게 하면 고통이 일어나겠구나하고 알기 때문에 얼른 되돌아 온다는 것이다. 그 얼른 되돌아 오는 기간이 관성을 갖기 까지 7생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은 내가 이렇게 원인을 일으키면 그 결과에 의하여 고통을 받겠구나하고 알기 때문에 원인을 짖지 않는다. 의지적 행동으로 인한 업형성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때는 남이 때려도 맞는다. 왜냐하면 일으키면 자기만 괴롭기 때문이다. 스스로 일으킴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일으키는 대상에 대하여 치려 하지만 성자는 자기자신 안에서 해결 하는 것이다. 놓고 또 놓고 그러는 사이에 어느 순간 편안함이 온다.

 

그런데 그런 탐심과 진심이 남이 볼 때는 잘 안 일어 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뿌리는 남아 있다. 화가 나지만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안에서는 미세하게 일어 난다. 단지 화를 내는 경향이 약해진 것이다. 그래서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남아 있다. 이 상태가 사다함이다.

 

그런데 탐심과 진심이 약해 진 것만으로 무려 6생이 줄어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사다함은 한 생만 더 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수다원까지는 탐심과 진심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유추 해 볼 수 있다.

 

 

사다함이 한 생을 더 와야 하는 이유

 

사다함이 한 생을 더 와야 하는 이유는 해결할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을 오상분결이라 불리우는 5가지의 미세한 요소와 오하분결이라 불리우는 것 중에 거친 탐심과 진심의 2가지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성자인 사다함은 할일이 많이 남아 있다. 경계가 오면 미세한 번뇌가 일어 나니까 여전히 자기만 고통 스럽다. 그 고통을 없애는 쪽으로 움직이다 보니 그 고통의 뿌리 쪽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것이 무상한 것이고, 일으켜 보아야 소용 없는 것이라는 명료한 자각이 일어 나게 된다.

 

그러면서 뿌리가 딱 끊어진다. 뿌리가 끊어졌다가 느낄 정도로 정말 딱 끊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깊은 식의 상태에서이다. 의지적 작용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거친족쇄인 오하분결이 끊어 지면 아나함이 되는 것이다.

 

아나함 정도 되어야 안심

 

아나함 정도가 되면 이제 안심이 된다. 왜냐 하면 더 이상 욕계에 다시 올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가지 거친족쇄(오상분결)가 완전히 끊어 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색계에 나고, 무색계에 나고 싶은 욕망은 무엇일까. 아나함쯤 되면 욕계의 모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모두 끊어 졌기 때문이다.

 

아나함이 되면 세속적인 쾌락을 누릴 수 없게 된다. 여섯가지 감각기관으로 들어 오는 대상에 대하여 흥미가 없어 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요하고 평화로움에 집착 하게 된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쭐라웨달라숫따(Cūlavedalla Sutta, 有明小經, SN 41.6)에 나오는 부부이야기 일 것이다.

 

아나함이 되면 세상에 나가고 싶어 하지도 않고 세상일에 관심조차 없다. 그런데 아직 미세한 족쇄는 남아 있다. 미세하나마 편안해지고자 싶어 하는욕망, 그것도 족쇄가 되어 한 생을 더 살아야 되는 것이다.

 

만일 아나함으로 이 세상을 떠나면 색계 정거천에 태어 날 것이다. 그 곳에서 서서히 족쇄가 해소 되면서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것이다.

 

그러나 욕계에서 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극이 많기 때문이다. 자극이 많아서 번뇌가 빨리 일어나야 놓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상은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하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생에서 끝내는 것이 훨씬 더 유익 하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더 고요하고 정화된 세계에서 존재 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각 하면서 극복 하는 것이다.

 

되비치고, 또 되비치고

 

아나함이라는 높은 경지의 성인이라도 들뜸은 있다. 그것은 어떤 들뜸일까. 그 들뜸을 찾아 보려 하면 사라져 버린다. 이거 하려다 말고 저거 하려다 말고 하는 들뜸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들뜸을 극복 하여 해야 할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원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나를 위해서 할 일은 더 이상 없는데 무언가 남을 위하여 일을 하려 할 때 모든 것을 극복 하려는 에너지가 일어 난다.

 

그 들뜸이 극복 되고 무지가 극복 되면 아만도 극복 된다. 여기서 아만은 자만과 다르다. 자만은 나를 내세우는 것(잘난체)을 말하지만, 아만은 , 내가 여기까지 왔다” “이러한 존재가 나다라고 하는 기쁨을 말한다.

 

아만을 되비치라는 것이다. 아만이 남아 있는 한 무지(무명)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되비치고, 또 되비치고 해야 완전한 고통의 소멸에 이른 다는 것이다.

 

한 순간에 일어 날 수 도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설법만 듣고도 4과를 순식간에 깨우쳤다는 경전상의 기록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인지작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좌선을 통해서만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후대로 내려 올수록 근기가 약해져서 한번 들으면 이해 하지 못하고 몇 년, 몇십년을 공부 하여도 깨달을까 말까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알기만 하면 그대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명료 하게 아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고통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게 되고 닙바나를 이루었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단계가 다 다르다. 단계가 뭉뚱 그려 될 수도 있고, 순식간에 일어 날 수 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16단계의 지혜가 한 순간에 일어 날 수 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수행이 한 순간에 그 말을 들으면서 무르익은 것이다.

 

닙바나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 할 수 있지만 길은 이렇게 명료한 것이다.

 

이상 깔라야나미따카페 (http://cafe.daum.net/kalyanamitta)의 아눌라 비구니 스님의 법문을 녹취하여 표를 집어 놓고 자료를  보충 하여 작성한 글이다. 인터넷에 훌륭한 법문을 법보시한 스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참고로 음성파일을 링크 하면 다음과 같다.

 

위빠사나 16단계 도와과

 

 

사성제와 팔정도가 성스런 이유

 

불교의 핵심사상은 무엇일까. 주저 없이 사성제와 팔정도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부처님이 가장 강조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사성제는 빠알리어로 짜따리 아리야삿짜니(cattāri ariyasaccāni)’이다. 영어로는 Four Noble Truths 이다. 팔정도는 빠알리어로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Ariyo aṭṭhagiko maggo)’이고, 영어로 표현 할 때는 Noble Eightfold Path이다.

 

사성제와 팔정도의 빠알리어 제목을 보면 모두 성스럽다라는 아리야(Ariya)’가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영어로 표현할 때도 반드시 성스럽다라는 뜻의 노블(Noble)’이 들어 가 있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성스런 법이다그 성스러운 법으로 깨달았다면 성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제자중에 누가 가장 먼저 성자가 되었을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 처음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콘단냐를 비롯한 다섯수행자들에게 설 하였다. 그 때 콘단냐가 최초로 이해 하였다. 이렇게 하여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한번 굴러간 법의 수레바퀴는 끊임 없이 굴러 왔고, 또 끊임 없이 굴러 갈 것이다. 

 

 

 

 

2010-05-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