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반야심경을 보는 눈, 출발부터 다른 마하야나와 테라와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0. 5. 19. 14:58

 

 

반야심경을 보는 눈, 출발부터 다른 마하야나와 테라와다

 

 

 

경전공부와 불교강좌

 

이른 아침에 BBS불교방송을 듣다 보면 두개의 상반된 프로를 접하게 된다. 하나는 경전공부이고, 또 하나는 불교강좌이다. 두 프로 모두 스님이나 교수, 법사등 이 땅의 내노라하는 선지식들이 나와서 강의 한다.

 

이제까지 들은 바에 의하면, 5 35 시작 되는 경전공부시간은 주로 대승경전위주로서 강사는 스님들이다. 반면에 6 시작 되는 불교강좌는 매우 다양한 주제로 강의가 진행된다. 대승불교외에 밀교라든가 초기불교경전등 불교의 전반적인 주제가 강의의 대상이 된다. 또 강사도 교수, 재가법사등 매우 다양하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 경전공부의 경우 성정스님이 대승기신론강의를 진행 하고 있고, 불교강좌의 경우 묘원법사가 대념처경을 강의 하고 있다.

 

그런데 두 강의를 듣고 있다 보면 같은 불교라는 이름을 같이 쓰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그 내용은 완전히 딴나라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렇게 한지붕 두 가족처럼 전혀 다른 정신세계를 갖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대승기신론 강의를 듣다보면

 

대승기신론 강의를 들어 보면 진여불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리고 그 이론 적 토대로서 일심 이문 삼대.. 등으로 논리를 전개 시켜 나가는데 전형적인 여래장사상의 논리적 완결판이라 볼 수 있다.

 

사람이건, 축생이건 삼라만상 모두가 불성이 있어서 언젠가는 성불 하게 될 것이라 말하는 대승기신론에서 강조 하는 사항은 망념을 버리고 진여의 세계로 들어 갈 것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중생심이라 불리우는 하나의 마음 즉, 일심(一心)이 두개의 마음인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어 지는데 생멸문이 바로 망념 때문에 생긴 다는 것이다. 또 일심의 특징은 삼대로 표시 되는데 어떤 사물의 몸체와 외상과 활용이라 한다. 방송에서는 몸체를 진여문으로 보고 있고, 이를 진여체라 한다. 그리고 외상과 활용에 대하여 생멸문으로 보는 것이다.

 

강의를 듣다 보면 알아 듣기가 쉽지 않다. 우선 용어자체가 모두 한자체이다. 한자체용어에 단지 우리말의 조사'만 붙어 있는 강의를 하는 데, 이를 설명해 주지 않으면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실제로 우리나라 강원교육에서 한자를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원문을 해석해 주고, 또 그 다음에 적절한 예를 들어 설명해 주지 않으면 단 한 줄도 나갈 수 없다고 한다.

 

암호문을 해독 하듯이

 

그 정도가 어떠할까. 마침 블로그에 2005년도 올린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때 당시 개인적으로 대승기신론을 사경 하면서 공부 할 때이다. 서광스님의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불광출판사)’의 한 구절을 블로그에 올린 것이다. 그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1)원문

 

四者緣熏習鏡謂依法出離故 변照衆生之心 令修善根 隨念示現故

 

2)원문에 대한 해석문

 

집착함이 없이 인연 따라 물들이는 거울이다. 정서장애와 인지 장애가 모두 없어서 모든 현상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그들로 하여금 선의 뿌리를 닦도록 하기 위해서 각자의 수준과 상태에 맞게 필요한 모양과 형태로 드러내고 나타내어 보인다.

 

3)서광스님의 별도 해설문

 

자기 안에 집착하거나 착각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보는 눈 역시 오해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가 있다. 그래서 각자의 수준과 상태에 맞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지혜를 얻고 깨달아 갈 수 있도록 도울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어리석은 사람의 성장과 깨달음을 위해서 반드시 자비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냉정함과 무시 두려움도 필요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비의 관세음보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신장님과 사천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불교인들은 불교를 탄압하고 무시하는 타종교인들의 그릇된 행동을 보고도 침묵하거나 정치인들이 종교적으로 치우친 행동을 보고도 너그러움을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묵인과 너그러움이 만일 타종교인들의 그릇된 행동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정치인들의 종교적 편향을 돕는다면 그것은 악행이다. 또 종교적 평등함을 잘못 알고 불법을 전하지 않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인연따라 한다는 말이 그냥 무관심하거나 내버려 두라는 것이 아니다.불법을 전할 때 자기의 이익을 생각해서 집착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방법으로 전하라는 것이다.

(http://blog.daum.net/bolee591/4872785)

 

 

우선 한문 경전의 난자(難字)를 먼저 익혀야 하고, 다음에 마치 암호문과도 같은 문장을 해독 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적절한 예를 들어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재차 삼차 해설 해 주어도 알아 듣기 힘든 것이 한문경전이다. 이런 한문 경전을 이제까지 스님들을 배출 한다는 강원에서 수백년간 변함 없이 강의 하고 있었으니, 불교발전의 최대 걸림돌이 한문경전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우주관

 

반면에 6시에 진행 하는 묘원법사의 대념처경의 경우 한문투의 말이 별로 없다. 거의 대부분 알기 쉬운 우리말로 되어 있어서 그저 듣기만 하면 된다.

 

양쪽 강의를 들으면서 같은 불교이지만 서로 다른 정신세계에 산다는 것을 확인 하였는데 그 좋은 예가 우주관일 것이다.

 

경전공부에서 성정스님은 개인이 사는 세상을 소우주라 하였고, 소우주 바깥에 대우주가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개인이 죽는 것에 대하여 소우주가 사라지는 것으로 표현 하였고,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대우주로 복귀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 대우주가 바로 진여이고 불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묘원법사의 불교강좌에서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개념을 이야기 하지 않고, 단지 여섯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가 여섯감각대상인 색성향미촉법에 부딫쳤을 때 아는 마음이 우리가 보는 세상의 전부라고 하였다. 그 외 별개의 세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사람의 세상이 있고, 개에는 개의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인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열반에 대해서도

 

이런 차이는 또한 깨달음에 대한 내용에 대하여 극명하게 들어난다. 여래장사상을 기반으로 한 대승불교에서는 본래 마음자리 즉, 진여 불성 자성청정심등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말하지만,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닙바나(열반)’를 이야기한다.

 

대승불교의 주요관심사가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 부증불감 하는 무언가 변치 않은 영원한 그 무엇인 진여, 불성, 참나와 같은 개념을 이야기 하지만, 테라와다의 관심사는 열반이다. 그런데 그 열반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기(無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의 대상이 사라져 버리면 더 이상 세상이 존재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존재 한다는 것을 말하고, 마음이 있는 한 항상 세상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더 이상 일어 나지 않는다면 세상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중에 닙바나에 드는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몸이 사라짐à호흡이 사라짐à아는 마음이 사라짐à닙바나

 

 

마음이 있는 한 세상은 항상 존재한다. 그 마음이 인간의 마음일 수 있고, 아수라의 마음일 수 있고, 축생의 마음 일 수 있고, 천상의 마음 일 수 있다. 어느 마음이든지 업을 짖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나기에 적합한 세상에 대한 업을 짖고 태어 난다.

 

지금 살인을 하였다면 그 업에 대한 과보로 태어나기 적합한 세상에 날 것이다. 바로 그 세상은 지옥과 같은 세상이 될 것이다. 반면에 도덕적인 삶, 봉사하는 삶을 살아 간다면 그 업을 지은 적합한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그세상은 천상과 같은 곳이 될 것이다.

 

마음이 일어 나지 않으면

 

이렇게 마음이 있는 한 지옥에서부터 천상에 이르기 까지 돌고 도는 것이 세상이다. 그런데 그 세상은 항상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6문과 6경이 부딪쳐서 인식하는 세상이 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실존 하였던 고따마붓다의 가르침이고, 이를 잘 계승 하고 있는 불교가 테라와다인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은 마음의 대상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가장 혼란을 느끼는 부분이다. 왜냐 하면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마음을 생멸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철저하게 마음을 생멸로 보고 있다. 마음은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만 일어 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란 무엇일까. 바로 여섯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가 여섯감각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에 부딫쳤을 때 인식하는 그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그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은 결국 마음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 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마음이 일어 나지 않으면 세상이 존재 하지 않게 되는데 이를 닙바나(열반)라 한다.

 

마음이란

 

결국은 마음을 어떻게 해석 하느냐에 따라 남방과 북방불교가 갈렸고, 전혀 다른 세계관이 형성 된 것이다. 특히 북방대승불교에서 한계를 느껴 남방 테라와다 불교를 접한 선지직들이 마음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을 때 그 것은 환희 그 자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번뇌망상이 손님으로 오면 ‘망상’이라고 알아차리면 믿지 못하겠끔 곧 사라진다. 그것은 마음은 한 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 알아차림 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하면 앞서 일어났든 괴로움이나 번뇌망상은 사라지게 된다. 마음의 본성품과 생멸법(生滅法)을 알았을 때의 법열(法說)이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도이거사의 미얀마 수행기 ,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3567&thread=23)

 

 

교계신문에 난 기사의 일부이다. 마음에 대한 본성품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때 그 법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뻣고, 그 후에 수행이 급진전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초기불교를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일까.

 

초기불교의 전통에 따라 마음의 특징을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 난다.

둘째, 마음은 한 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못한다.

셋째,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넷째, 마음은 과보를 남긴다.

 

 

어떤 마음이든지 마음의 대상이 없으면 저절로 홀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 마음이고, 그 마음은 오로지 한 순간에 한가지 일 밖에 하지 못하고, 그 마음은 일어났다가 곧 바로 사라지는데 그 때 마음의 과보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의 마음과 이어지는 마음이 같지 않아서 무아라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은 연속되어 있는 한마음이 아니라, 마음의 과보가 상속 되어 점점이 연결된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북방대승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의 마음에 대한 가장 큰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 한마음인가 생멸인가

 

마음을 한마음을 보는 북방불교와 마음을 단지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멸로 보는 방법에 따라 추구하는 목적도 달라 진다.

 

한마음으로 보는 대승불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청정무구한 진여를 추구 하고, 마음을 단지 생멸로 보는 테라와다의 경우 마음의 과보만 없애 버리면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에 세상 또한 사라진다는 닙바나로 보는 것이다.

 

이를 표로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남북방의 마음에 대한 입장

구 분

마 음

비 유

목적지

대승불교

한마음

직선

진여, 불성, 본마음, 참나

테라와다

생멸

점들의 연속

닙바나

 

 

 

마음을 한마음으로 볼 것인가 생멸하는 마음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테라와다와 대승불교가 갈렸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네티즌의 주장을 보면

 

대승불교국가로 분류 되는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예불을 올릴 때 빠짐 없이 독송 하는 경전이 있다. 흔히 대승경전의 정수라 불리우는 반야심경이 바로 그 것이다.

 

최근 모 인터넷카페에 반야심경에 대한 비판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느 네티즌이 작성한 글(http://cafe.daum.net/chobul, 반야심경과 초전법륜경-너무나도 멀고 먼 사이)을 보면 반야심경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모조리 부정 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 글의 내용을 표로 만들어 보았다.

 

 

초기불교의 교리와 반야심경의 입장

 

초기불교의 교리

반야심경의 입장

1

5(색수상행식)

()

2

제법(82법들의 자상)

공상(空相)

3

법인(무상, , 무아)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4

12(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

5

18(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

6

12연기(노사생유취애수촉육입명색식행무명)

()

7

4성제(고집멸도)

()

8

8정도(중도)

반야

 

 

 

오온을 비롯하여 제법이 모두 공하고, 부처님이 가장 강조한 불교의 핵심교리인 사성제와 팔정도, 12연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지 없다라고만 한다면 불교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 하는 외도의 가르침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교수는 말하기를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과 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올바른 해석이라는 것이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5, 13, 18계도 없고,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도 없다.

 

 

이렇게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를 집어 넣고 해석 하면 틀림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면 포커스가 반야에 맞추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야에 의지 하여야 구경열반을 성취할 수 있고, 이제까지 모든 부처님들이 바로 이 반야에 의지 하였다고 나오는 것이다. 결국 의반야(依般若)’를 말하기 위해 초기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조리 부정 하였다는 오해를 받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반야의 위치는

 

반야란 무엇일까.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반야는 통찰지를 말하는 데, 빠알리어로 빤야(panna)라 하고 82개의 구경법 중의 하나이다. 또 반야는 테라와다불교의 37조품에 들어 가 있는 수행수단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반야는 37조도품에서 그다지 비중이 있는 수행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위치가 어디쯤 될까.

 

37조도품에 대한 표를 보면 가장 많은 나오는 수행수단이 정진이다. 이를 순서별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37조품에서 반야(통찰지)의 위치

순위

구 경 법

37개중 합계

1

정진(위리야, viriya)

9

2

알아차림(사띠, sati)

8

3

통찰지(빤야, panna)

5

 

 

 

37개의 수행수단 중 정진이 9개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알아차림으로서 8개인데 비하여, 대승불교에서 가장 소중 하게 여기는 반야는 5개로서 3위인 것을 알 수 있다.

 

제법이 공하다는데

 

반야부경전에서 그토록 반야를 강조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단서를 각묵스님의 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초기불전연구원카페의 묻고 답하기 (http://cafe.daum.net/chobul)에 나온 내용을 보면, 제법의 공성(空性)을 강조 하다 보니 부처님이 설한 오온, 12, 18, 4, 12연기 등의 제법들 각각이 본래 실체가 없는(무아) 공한 것이라 주장 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아비담마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제법의 고유성질(自性)과 보편적인 성질(共性)마저 공 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제까지 부처님이 초기경전에서 수없이 5,12, 18, 사성제, 팔정도, 12연기등의 제법을 설하였고, 이런 제법을 분석적으로 이해하여 무상, , 무아를 역설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토대로 열반을 성취 할 수 있다고 84천 법문을 설하였지만, 반야부 계열의 경전에서는 모두 공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법이 공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바로 그것은 제법의 고유의 성질과 보편적인 성질을 부정 하는 것이다.

 

고유성질은 다름 아닌 법마다 고유의 특성을 갖는 특징을 말한다. 예를 들어 법중에 탐욕은 거머쥐려는 속성이 있고, ‘성냄은 내밀치는 성질이 있다. 이런 법들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법이 총82 구경법 중에 열반과 추상적인 물질 10가지를 제외한 71가지 법에서 볼 수 있는데 이를 법의 자성(自性)이라 한다.

 

이런 71법들의 특징은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법의 보편적인 특징인 공성(共性)이다.

 

71법의 특징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공하다고 하는 것은 제법의 고유한 특성인 생멸을 부정 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테라와다 불교의 특징이 마음을 생멸로 본다고 하였는데, 마음이 생멸한다는 그 자체를 부정 하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마음을 한마음으로 보는 것이고, 그 이론적 토대가 여래장사상의 논리적 체계인 대승기신론이라 볼 수 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사상은 일심(一心) , 한마음 사상이기 때문이다.

 

무아만을 강조 하는

 

테라와다불교의 전통에서는 무상, , 무아를 강조 한다. 왜냐하면 제법이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법을 단지 공한 것으로 보고, 제법의 고유의 성질인 일어나고 사라짐을 인정 하지 않는 반야부 경전에서는 제법에 대하여 무아를 주로 강조 한다. 무상과 고에 대하여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반야부 계통의 경전에서 무아위주로 강조 하다 보니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과 같이 모든 법을 공상로 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공상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여이고, 불성, 본마음, 참나라고 볼 수 있다.

 

 

무상 고 무아와 제법

구 분

무상 고 무아

제 법

 

대승불교

무아를 강조

모든 법이 실체가 없는 공한 것으로 봄(諸法空相)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테라와다

무상, , 무아의

3특상을 강조

법마다 고유의 성질을 갖는 자상(自性)과 모든 법은 생멸한다는 보편적 성질인 공상(共性)으로 봄

염오, 이욕, 해탈의 길로

 

 

 

왜 반야부 경전을 만들어 냈을까

 

부처님이 제법을 설한 초기 경전이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대승논사들은 왜 반야부 경전을 만들어 냈을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묻고 답하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아비담마는 초기경에 대한 이해를 아비담마의 전부로 하고 있는 반면 반야부는 초기경을 제쳐두고 따로 경을 결집하고 있다는 중요한 차이점을 들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주장이 초기경과 그대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들 스스로가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승논사들이 별도의 경전을 만들어 낸 이유가 부처님이 설한 오온 12 18계 사성제 12연기를 공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경의 그 어디에서도

오온 12 18계 사성제 12연기가 공 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대승 반야부 경전은 제법이 무아라는 한쪽 면만 강조 한 것이고, 또한 법을 직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표로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특 징

제 법

 

반야부 경전

(대승불교)

직관적

제법의 한 가지 단면만을 강조

신비적,

추리/추론/논리에 의존

이비담마

(테라와다)

직관적,

분석적

고유성질과 보편적인 성질의 두 측면을 강조

초기불교를 원만하게 잘 설명

 

 

 

완전히 다른 불교

 

법을 보는 관점에 따라 경전이 달리 결집되고, 그에 따라 깨달음으로 가는 기준도 달라졌을 때 같은 불교라고 볼 수 있을까. 더구나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인 법의 고유의 성질과 보편적인 성질을 모두 공상으로 보았을 때 다다를 수 있는 종착지도 다른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묻고 답하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비담마와 반야부는 그 근본 출발점부터가 다릅니다. “

 

 

이말의 뜻은 결국 대승불교와 테라와다 불교는 서로 다른 불교라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법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시작된 불교가 종착지 역시 같을 리 없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대승불교와 테라와다는 완전히 다른 불교인 것이다.

 

 

 

 

 

 

 

 

2010-05-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