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구도(求道)인가 직업인가, 서울대공원의 탁발승을 보며

담마다사 이병욱 2010. 5. 31. 09:46

 

 

 

구도(求道)인가 직업인가, 서울대공원의 탁발승을 보며

 

 

 

종종 자주 찾는 곳이 있다. 서울대공원이다. 지하철로 불과 몇 정거장 가면 나오게 되는 대공원은 좋은 휴식 공간이다.

 

사시사철 찾는 대공원은 반드시 놀이시절을 이용한다거나 동물을 구경 하는 곳이 아니라 단지 주변에 있는 커다란 공원으로 생각 한다. 그래서일까 나이 드신 분들은 등산복 차림으로 왕래 하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구도(求道)인가 직업인가

 

그런 서울대공원의 길목에 항상 보는 광경이 하나 있다. 지하철역이나 주차장에서 나오다 보면 반드시 지날 수 밖에 없는 길이 나오는데, 그 목 좋은 곳에 벌써 수년 째 탁발을 하고 있는 어느 스님을 볼 수 있다.

 

 

 

 

 

 

 

그 스님을 볼 때 마다 느끼는 감정은 과연 저런 행위가 구도의 일환일까 아니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구도를 위한 탁발이었다면 일시적으로 하고 말았을 텐데, 매년 그 것도 주말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에 자리를 잡고 탁발을 한다면 그런 행위는 구도라기 보다 차라리 직업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오전에 사람들이 몰려 들 때는 전절역을 바로 보고 목탁을 두드리지만, 오후가 되어서 사람들이 몰려 나갈 때는 방향을 180도 바꾸어 대공원 방향을 바라 보고 목탁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벌써 수년 째 그런 장면을 보고 있는데, 그런 장면을 볼 때 마다 느끼는 감정은 불교의 이미지를 훼손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뜩이나 서울과 수도권에서 불교가 유일신종교 보다 신자 수도 적고, 사찰 또한 교회와 비교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보기 힘든 상황에서, 마치 걸인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탁발행위는 더욱 더 불교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 스님의 옆에 장애가 있는 걸인이 구걸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탁발과 불교이미지

 

대공원 길목에서 탁발행위를 하는 그 스님이 진짜 스님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비구계를 받은 스님이라면 그러한 탁발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결국 사이비승려라고 볼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사이비 승려로 인하여 불교의 이미지가 실추 된다면, 그는 대단한 훼불행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탁발을 하는 이유는 장사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보시함에 아무도 돈을 넣지 않는다면 매주말 출근하다시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가 출근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 그 보시함에 돈을 넣기 때문에 매번 나오는 것이다.

 

어쩌다 간혹 돈을 집어 넣는 장면을 보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주변을 피해 간다.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속으로 매우 불쾌하게 생각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불자인 사람이 그렇게 느낀 다면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불교가 구걸이나 하는 종교로 잘 못 인식 하게 하고 있다면, 그는 커다란 불선업을 짖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런 사람에게 보시 하는 불자들 역시 공덕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삭발을 하고 가사를 걸쳤다고 다 스님은 아닐 것이다. 무뉘만 스님은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구걸을 직업으로 하는 스님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이런 이들에게 보시 해 보았자 보시공덕의 효과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걸인들에게 돈 몇푼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

 

초기불교에서 출가수행자를 비구(bhikkhu)라고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비구라는 말은 윤회의 두려움 보는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왜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라고 하였을 까. 그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는 수행자들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사성제이다. 고통을 철저하게 자각 함으로서 다시 태어 나지 않은 길을 제시 한 것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윤회의 종식을 말한다. 비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처님이 깨달은 사성제를 철저하게 알아서 다시는 태어 나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래서 비구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라고 하였을 것이다.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라면 부처님의 설한 길을 따라 가야 한다. 그 길이 수다원이 되고, 사다함, 아나함이 되어 마침내 아라한이 되는 길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길을 가는 수행자가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이 계행을 지키는 것이라 한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자

 

수행자가 계행을 지키지 못하였을 경우 어떠한 모습일까. 그런 모습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다.

 

 

계행이 나쁜 사람의 견해를 따라 행하는 자들은 오랫동안 처참한 곳의 고통을 받기 때문에 그와 접촉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자기에게 시물을 보시한 사람들에게 큰 결과를 생기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다.

(청정도론 제1 154)

 

 

계행이 나쁜 자는 한 마디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승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도 아니어서, 승과 속으로부터 모두 제외 되는 자들에게 공양 해 보았자 그 어떤 좋은 결과도 기대 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 공양한다면 더 좋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될 지 모른다. 차라리 정직하게 구걸하는 걸인에게 보시 하는 것이 더 나을 지 모른다.

 

법구경에서

 

우리나라 불자들은 삭발을 하고 가사를 둘렀다면 무조건적으로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설령 비구계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계행에 어긋 나고 청정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를 진정한 수행자라 부를 수 없다.

 

그런 경향은 현대는 물론 고대에서도 있었던 것 같다.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는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경계의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머리를 깎은 것만으로 수행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가 계를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며

그에게 탐욕과 시기심이 가득하다면

어찌 그를 수행자라 부르겠는가?

(법구경 264)

 

 

머리만 깍았다고 해서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의 마음에 탐욕과 시기심이 가득 하다면 결코 수행자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노란 가사를 목에 닿도록 입고 있었지만

많은 남자들이 지옥에 태어났다.

나쁜 기질을 가져

자기의 행동과 언어를 다스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법구경 307)

 

 

노랑가사는 남방상좌불교 수행자들의 상징과도 같다. 그런 가사를 둘러 입고 있지만 자신의 행위를 다스리지 못하였을 경우 예외없이 지옥에 태어 날 것이라는 말이다.

 

 

남의 집 앞에 서서 탁발하는 것만으로

비구라 부를 수 없다.

계행이 없고 담마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그는 비구가 아니다.

(법구경 266)

 

 

탁발은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다. 지금도 남방상좌불교 국가에서는 이런 전통이 살아 있어서, 수행자는 탁발에 의지 하여 무소유의 소욕지족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데 탁발을 단지 생계수단으로 하였을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자들은 결코 부처님의 제자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공양해야 하나

 

그렇다면 누구에게 공양을 해야 할까. 그 답은 명백히 나와 있다.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공양을 해야 할 대상은 다음과 같은 수행자 일 것이다.

 

 

매달마다 백 년에 걸쳐

평범한 사람에게 일천 냥을 주는 것보다

신에게 백 년 동안 제사지내는 것보다

일념으로 마음 집중을 수행하는 비구를 찾아가

잠깐 동안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이 훨씬 낫다.

(법구경 106)

 

 

평범한 사람에게 큰돈을 백년동안 보시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신에게 백년 동안 제사지내는 것 보다 제대로 된 수행자에게 반배라도 올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 것도 사꺄무니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일념으로 알아차림을 지속 함으로서, 성스러운 도와 과를 이룬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하물며 계행도 지키지 않으면서, 승인지 속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공양한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2010-05-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