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문수스님과 틱 쿠앙 둑 스님의 소신공양

담마다사 이병욱 2010. 6. 1. 10:33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문수스님과 틱 쿠앙 둑(Thinch Quang Duc)스님의 소신공양

 

 

 

공양의 진정한 의미는

 

불교에 공양(供養)이라는 말이 있다. 공양이라는 말은 불자라면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친숙한 말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말이다.

 

흔히 공양한다고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절에 가서 밥을 먹는 것을 연상한다. 밥을 먹는 것이 곧 공양이라는 등식이 성립 될 수 있을 정도로 불자들은 물론 일부 일반인에게 까지 광범위 하게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공양이 절에 가서 단순히 밥을 먹는 행위에 그치는 것일까. 진정한 공양의 의미는 무엇일까.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법()·승()의 삼보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이란 뜻이다.

셋째, 봉사함을 말한다.

넷째, 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등을 말한다.

 

 

이렇게 공양을 네가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절에 가서 단순하게 밥을 먹는 것이 공양이 아니라, 재보시와 법보시를 포함하여 봉사 하는 것 까지 공양으로 보는 것이다.

 

스님은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4대강사업과 관련하여 충격적인 뉴스를 들었다. 경북의 어느 사찰에서 수행정진 하던 스님이 4대강 사업 반대유서를 작성하고 분신 한 것이다. 매스컴에서는 이를 소신공양이라고 표현 하였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이란 자신의 몸을 태워서 부처님에게 바치는 것을 말한다.

 

왜 이런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을까. 왜 소신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일반인도 아니고,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NGO단체의 일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도인도 아니고, 사찰에서 정진하던 수행자가 몸을 태웠을까. 그것도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바로 보여 주었다는 데 있어서 우리사회에 커다란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죽음으로써 의사표현을 하는 것은 가장 극단적인 수단이다. 백번 천번 말을 하여도 통하지 않는 다면, 자신의 몸을 던짐으로서 최후의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다.

 

스님은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했을까. 그리고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자 하였을까. 그 유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 즉각 중지하라”,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위선, 부조리가 고스란히 담긴 내용이다. 이 중 가장 핵심적인 강조사항은 4대강 사업을 중단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 하며 소신한 것은 이 사회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생각해서 일 것이다.

 

불교탄압에 항의 하기 위하여

 

소신공양의 전통은 불교의 전통에 있어서 종종 보여 진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소신공양은 1963년에 있었던 베트남스님일 것이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소신공양한 스님의 이름은 틱 쿠앙 둑(Thích Qung Đc, 1897~1963)’이다.

 

 

 

 

 

틱 쿠앙 둑(Thinch Quang Duc, 1897~1963)스님

고 딘 디엠 정권의 불교탄압에 항의 하여 분신 하였다.

사진 ; http://en.wikipedia.org/wiki/Th%C3%ADch_Qu%E1%BA%A3ng_%C4%90%E1%BB%A9c

 

 

 

틱 쿠앙 둑 스님은 베트남의 대승불교도로서 1963년 6월 11 사이공의 번화가에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태웠다. 주된 이유는 그 때 당시 남부베트남의 대통령이었던 고 딘 디엠(Ngô Đình Dim)의 불교도 탄압에 대하여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신공양하는 틱 쿠앙 둑스님

출처 http://www.youtube.com/watch?v=0fOt68fFQvo 

 

 

 

소신공양하는 사진은 금새 전세계로 퍼져 나갔고, 디엠정부의 대불교도 정책에 대한 변화를 가져 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진으로 인하여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사진작가인 Malcolm Browne은 풀리쳐 상을 수상하게 된다.

 

스님의 죽음후에 스님의 신체는 재처리되었으나 스님의 심장은 손대지 않은채로 남아 있게 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스님의 심장이 열정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또 스스로 보살행을 실천한 스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 때문이기도 하였다.

 

 

 

 

틱 쿠앙 둑 스님의 심장

The heart relic of Thích Qung Đc.

사진 http://en.wikipedia.org/wiki/Th%C3%ADch_Qu%E1%BA%A3ng_%C4%90%E1%BB%A9c

 

 

 

틱 쿠앙 둑 스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디엠정권은 국제적인 압박에 직면하였다. 그래서 불교도에 대한 박해 정책을 수정 하겠다고 공지 하였다. 그러나 그런 약속은 매우 느리게 진행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없던 일로 되어 버렸다.

 

이후에 불교도의 항의가 계속되었지만, 디엠의 동생이 이끄는 특수군에 의하여 사원이 파괴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사원 파괴 행위로 인하여 불교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항의 하기 위하여 수 많은 스님들이 틱 쿠앙 둑 스님이 했던 것과 똑같이 소신공양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디엠정권은 군사쿠데타로 넘어 지고, 그 해 1963 11월 디엠은 쿠데타세력에게 죽게 된다.

 

틱 쿠앙 둑 스님의 소신공양은 베트남정부의 불교도 정책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체제를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

 

불교를 탄압한 고 딘 디엠은 누구

 

그렇다면 베트남의 불교도를 탄압하여였던 고 딘 디엠이란 인물은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일까. 인터넷 백과사전을 참고 하였다.

 

 

 

고 딘 디엠

(베트남 정치가)  [吳廷琰, Ngo Dinh Diem]

 

 

 

  

 

 

1954년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어 독재정치를 하다가 1963년 암살되었다.

고 딘 디엠은 베트남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17세기 그의 선조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최초의 베트남인들 가운데 끼어 있었다. 젊은시절에는 베트남 황실과 절친하게 지냈고 1930년대 바오 다이황제의 내무대신을 지냈다.

 

1945년 호치민[胡志明]의 공산군에 체포되어 가톨릭의 지원을 얻어보려던 호치민으로부터 북베트남 독립정부에 가담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고, 거의 10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1954년 디엠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정부를 이끌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반정부집단과 정치당파들로 분열되어 있는 남베트남에 자신의 친족들을 중심으로 독재정권을 세웠다.

 

그는 자신이 믿는 가톨릭 신앙과 가톨릭교도에 대한 편애 때문에 남베트남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불교도들의 호응은 얻지 못했으며 토지개혁에 대한 공약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공산주의와 베트콩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공산주의 봉기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수많은 불교도들을 투옥·처형하자 미국도 지원을 중단하게 되었다. 군부 쿠데타 때 부하 장군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고 딘 디엠은 친미주의자로서 가톨릭신자이었고, 가톨릭의 편애 때문에 불교도를 탄압하고, 박해하고, 투옥 하는 가 하면 처형하기 까지 한 반 불교적 인물이다. 이유는 불교가 공산주의를 부추긴다는 명목이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디엠은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도 비슷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미국의 힘을 빌어 기독교를 편애하고, 불교정화를 목적으로 한다며 비구와 대처승의 갈등을 부추겨 결과적으로 불교의 발전을 저해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또 디엠정권이 불교가 공산주의를 부추겼다는 명목으로 탑압하였듯이, 현 정권에서 집권당의 원내대표가 좌파스님을 척결해야 한다며 종단의 인사에 개입 하는 것 역시 비슷한 불교탄압의 사례라 볼 수 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4대강사업에 반대하여 소신한 스님은 경북 군위군의 지보사의 문수스님이라 한다. 문수스님이 소신한 2010년의 상황과 틱 쾅 둑 스님이 소신한 1963년과는 시간적으로 47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고 보니 문수스님의 세납이 47세라고 하는데 우연치고는 기가 막히는 일치라 볼 수 있다.

 

문수스님이 소신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47년 전의 베트남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소신을 할 수 밖에 없는 주변의 환경은 놀라우리 만큼 비슷하다.

 

디엠정권이 가톨릭 편애라면, 현 정권은 기독교 편애적이다. 또 이들 정권의 공통점은 친미적이라는 것이다. 전통문화를 무시하고 철저하게 서구지향적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교의 탄압과 무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틱 쿠앙 둑 스님의 소신의 영향이어서 일까. 오늘날 베트남은 불교도 국가로 원상 회복 되었다. 한 때 프랑스식민지로 이었고, 그 후 식민지교육을 받은 부패한 관료집단이 가톨릭을 편애 하는 정책을 사용 하였지만, 통일된 베트남의 경우 현재 불교도가 대다수를 차지 한다.

 

1963년에 틱 쿠앙 둑 스님이 그렇게 하였듯이, 2010년의 한국에서 소신공양한 스님이 나왔다. 왜 스님은 소신공양을 하였을까. 말로서 현실을 고발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일까. 누구나 아끼는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태워 버린 스님을 찬양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소신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현정부는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

 

4대강사업, 정치논리인가 종교논리인가

 

단적인 예로 4대강 사업의 경우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종교적 결정이었다. 정치는 실종 되고 종교적 신념에 의하여 추진 된 것이다.

 

정치는 상대방이 있는 것이다. 또 정치는 상대방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는 타협을 해야 하고 협상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정치는 항상 차선책을 선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가 최선책을 선택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하면 이미 정치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1인지배나 1당지배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종교적 신념까지 더해 졌다면 어떻게 될까.

 

종교는 진리를 추구 하기 때문에 차선이 있을 수 없다. 항상 최선을 추구 해야 한다. 4대강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4대강 사업은 엠비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추진된 최선책이다. 정치논리가 아닌 종교논리로 4대강 사업을 추진 한 것이다. 그가 언제나 하는 말은 정치적, 정략적 논리를 배제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4대강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추진 한다고 여러 번 매스컴에서 밝혔다. 소명의식이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정치논리가 아닌 종교논리라는 것이다.

 

4대강 반대 사업에 정치권 보다 종교계에서 더욱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4대강 사업이 철저하게 종교적 소명의식으로 추진 되었기 때문이다. 불교계에서 소신공양이 나온 이유가 바로 그런 데 있을 지 모른다.

 

 

 

201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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