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백제권역에 왜 미륵신앙이 유행하였을까, 원초적 힘의 관촉사 은진미륵

담마다사 이병욱 2010. 6. 8. 08:50

 

백제권역에 왜 미륵신앙이 유행하였을까, 원초적 힘의 관촉사 은진미륵

 

 

 

부여 무량사 참배를 마친 순례법회팀은 논산으로 향하였다. 관촉사로 가기 위해서 이었다.

 

논산으로 접어 들자 산 보다는 들이 많았다. 그것도 멀리 있는 산이 가물거릴 정도로 넓은 벌판이다.

 

 

 

 

다음 스카이뷰로 본 관촉사의 위치

영문자 A라고 표시 된 곳이 관촉사이다.

관촉사의 주변을 보면 모두 드넓은 평지임을 알 수 있다.

 

 

 

논산과 관촉사

 

비교적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 논산은 남자들에게 있어서 훈련소로서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병역을 필한 사람들은 한 번쯤 거치는 곳이 논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산 하면 가장 먼저 훈련소가 떠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논산의 이미지는 아마도 은진미륵일 것이다.

 

 

 

 

은진미륵전경

높이 18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석상으로 보물 218호이다.

관촉사는 968년 고려시대 혜명대사가 창건 하였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사진과 함께 나오는 은진미륵은 논산의 관촉사에 있다. 함께 한 어느 법우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곳 관촉사로 수행여행을 오기도 했다고 한다. 수학여행지로서 또 관광지로서 잘 알려져 있는 관촉사는 처음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찰은 산중에 있다. 그 것도 누가 볼 세라 심산유곡에 꼭꼭 숨어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관촉사는 평야지대의 야트막한 산에 있다. 말이 산이지 동산이나 다름 없다. 아무리 보아도 해발 100미터도 되지 않은 곳 7~8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관촉사는 기와지붕과 은진미륵이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다 보인다.

 

관촉사가 있는 지역은 모두 평지인데, 그 평지에 돌출 되어 있는 산이 반야산이다. 그래서 관촉사는 저 들판 멀리서도 보이고, 특히 관촉사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미륵불도 아득히 먼 들판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관촉사에 내려다 본 논산평야

주변의 산들이 아득히 멀리 보인다.

 

 

 

그 옛날 왜 저 먼 들판에서도 볼 수 있도록 18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석조 미륵불을 만들어 놓았을까.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이 있는데

 

중생을 구제 하는 데 있어서 미륵신앙은 보통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미륵상생 신앙이고, 또 하나는 미륵하생 신앙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미륵신앙

구 분

  

 

미륵상생신앙

현재 미륵보살이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신앙

정토신앙이 흥성하면서 점차 쇠퇴

미륵하생신앙

미래에 미륵보살이 성불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할 때에 그 세계에 태어나 설법에 참여함으로써 성불하고자 하는 신앙

역사를 통틀어 면면히 이어져 옴

 

 

 

미륵상생신앙은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정토신앙이 융성함에 따라 점차 쇠퇴 하였고, 그 대신 미래에 미륵불이 하생하여 중생을 구원한다는 하생신앙은 역사를 통하여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후삼국시대의 궁예와 견훤을 들 수 있다.

 

미륵신앙과 메시아사상

 

미륵하생신앙이 상생신앙 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민중들의 삶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스러운 시대가 가고, 하루 빨리 평화로운 시대가 왔으면 하는 민중들의 간절한 바람이 오늘날 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배경이라 볼 수 있다.

 

미륵신앙은 일종의 메시아사상과도 같다. 미륵이라는 말이 산스크리트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인데, 이 말은 기독교의 메시아(mashiae)의 어원에 영향을 주었고, 또한 기독교의 메시아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외국의 압제에서 구원하고 황금기의 영광을 되찾아 주리라고 기대하는 유대교의 왕이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구원자를 뜻하고, 세계가 종말에서 더 나은 상태에 이를 것이라는 신념이나 이론을 언급 할 때 쓰는 말이다.

 

백제권역에 왜 미륵신앙이 유행하였을까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 된 이래 여러 사상이 전승 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상이 관음신앙과 정토신앙일 것이다. 이외도 문수신앙, 지장신앙등이 있지만 미미하다.

 

한편 관음신앙이나 정토신앙 못지 않게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이 미륵신앙이다. 그런데 미륵신앙이 가장 융성한 곳이백제권역 이라는 것이다.

 

백제권역은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이다. 이 지역의 특징은 넓은 평야지대가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호남평야(만경감, 동진강)와 논산평야(금강)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지역에 미륵성지가 있다는 점이다.

 

호남평야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한다. 그런데 평야지대에서 하나의 돌출된 산이 있다면 어디서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모악산이 그런 케이스이다.

 

평지돌출형의 전형적인 케이스인 모악산에는 금산사가 있다. 금산사는 백제시대부터 미륵성지이었다 한다. 평지돌출형산에 왜 미륵성지가 생겨 났을까. 아마도 민초들의 삶과 관련 있을 것이다.

 

김제평야와 같이 넓은 곡창지대에 사는 민초들은 예로부터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었다.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리고, 지주들로부터 착취 당하여 고통스럽게 살아온 그들은 또한 역사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백제가 망하고 난 뒤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또 후백제가 망하고 고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그들은 항상 피지배인으로 살아 갔다. 그리고 곡창지대라는 이유로 갖은 수탈과 착취를 당하고 살아온 그들은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 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구원자를 간절히 바랬을 지 모른다. 후백제의 견훤이 궁예와 마찬가지로 미륵불의 현신으로 자처 하였던 것도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미륵신앙의 영향이었다고 본다. 

 

미륵신앙의 본거지로서 곡창지대는 조선말에 이르러 동학운동으로 불타오르게 된다. 마치 평지에 평지에 돌출 되어 있는 산과 같이 일시에 타오른 것이다.

 

평야지대는 산간지대와 달리 거칠 것이 없다. 한번 타오른 불꽃은 삽시간에 퍼져 나간다. 그래서일까 호남과 충청지방에서 동학농민운동이 활발 하였던 이유도 평야라는 곡창지대와 거기에서 일어난 수탈과 착취, 그리고 현실의 고통에 대하여 구원자를 바라는 미륵신앙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은진미륵도 논산평야의 한 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고통받고 있는 민초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구원자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민초들이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으로 삼국시대부터 미륵신앙이발달 되었는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근대에 접어 들면서 이들 지역은 기독교세가 우리나라 그 어떤 다른 지역 보다 유난히 강하다. 미륵신앙이 메시아신앙으로 바뀐 것일까.

 

토속적인 신상을 보는 듯

 

불상을 보면 자비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종종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은지미륵의 경우 무뚝뚝한 표정이다. 또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지나치게 크게 부각 되어 있어서 대체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은진미륵상

토속적인 신상모습으로서 매우 강렬한 이미지이다.

은진미륵은 1006년에 완성 되었다. 

 

 

무뚝뚝한 얼굴 표정을 보면 어떤 위압감을 느끼기도 한다. 표지판에는 이를 두고 토속적인 신상모습이라고 써 놓았다. 그렇다면 은진미륵은 미륵불이면서 동시에 그 지방의 민초들의 염원이 담긴 상징물일 수 있다.

 

 

 

 

은진미륵의 얼굴

불상 전체에서 풍기는 모습이 강한 원초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토속적인 신상모습은 원초적이고 초월적인 힘을 의미한다.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 줄 것 같은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그것은 거대함이다. 높이 18미터에 이르는 은진미륵을 보면 커다란 바위 하나가 대지에 단단히 뿌리박고 불쑥 솟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바로 이것이 원초적인 힘을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런 힘은 민초들이 바라는 다산, 장수, 무병등의 바램을 충족 시켜 주었을 것이다.

 

 

 

 

은진미륵의 손 모양

얼굴과 함께 손 모양이 강조 되어 있다.

 

 

 

 

 

 

은진미륵의 몸통

허리부분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불공을 드리는 참배객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참배할 수 있도록 단이 만들어져 있다.

 

 

 

 

 

 

미륵성지의 영향이어서 일까 불사도 적극적이다.

 

 

 

 

 

 

관촉사 석등

고려시대(10세기) 석등으로서 보불232호이다.

 

 

 

 

 

관촉사 석탑

고려시대 작품으로 유형문화재 53호이다.

 

 

 

 

 

관촉사 대웅보전

 

 

 

 

 

 

관촉사 석문

사찰의 중문역할을 하고 타 사찰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이다.

 

 

 

 

 

은진미륵과 논산평야

천년동안 민초들의 삶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2010-06-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