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언제 어디서나 생활선(禪) 경행의 이익, 법구경 19-20 두 친구 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0. 9. 13. 16:22

 

언제 어디서나 생활선(禪) 경행의 이익, 법구경 19-20 두 친구 이야기

 

 

 

죽은 법문

 

불교tv의 수 많은 법문의 대부분은 대승불교법문이 주류를 이룬다. 그 중에 금강경은 언제 어디서나 빠짐없이 언급되어 포교나 교육, 교양, 특집등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이어서 금강경전성시대가 되었다.

 

불교경전 중에 대승경전 만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초기불교경전에 관한 프로그램은 가물에 콩나듯 어쩌다 보이고, 스님들의 법문에서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 아함경과 같은 초기불교 경전의 내용을 언급하는 경우는 극히 드믈다.

 

지나치게 대승경전위주로 치우쳐져 있는 프로그램과 법문은 젊은 세대나 지적욕구가 왕성한 사람들에게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하는 죽은법문이 될 수 있다. 또 수행을 이야기하지만 간화선과 같은 화두선은 재가불자들이 접할 수 있는 환경도 되지 않을 뿐더러 어렵게만 느껴지기 때문에 그림의 떡과 같다.

 

그래서 일까 대부분의 법회에 나이든 불자들만 모이고 활력이 보이지 않는다. 법상에서는 불자들이 잘 모르는 어려운 한자용어가 자주 나타나고, 바닥에는 주눅들어 앉아 있는 불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생활선

 

시절인연이 되어서일까 남방에서 교학과 수행을 공부하고 온 선지식들에 의하여 보급된 것이 위빠사나수행이다. 그런 위빠사나 수행은 요즘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도시에 있는 수행처에 가서 배울 수 있다.

 

대중들이 언제 어디서나 가까이 할 수 있는 생활선이기 때문에 불자들 뿐만 아니라 아직 종교를 갖지 않은 일반인, 심지어 유일신교 종교인도 볼 수 있다.

 

위빠사나가 왜 생활선일까. 그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철에 앉아서 간다면 마음을 현재에 두고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되고, 지금 걷고 있다면 걷고 있는 행위를 알아 차리면 된다. 절이나 다라니 수행처럼 어떤 특정한 장소가 필요 하여 마음 먹고 목소리를 내어 크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이고 할 수 있는 것이라서 생활선이라 부른다.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이 발견한 수행방법으로서 열반으로 이끄는 수행수단이다. 그런 위빠사나 수행에서 강조하는 사항은 알아차림이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을 알아차림에서 시작하여 알아차림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대승불교에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알아차림 하나면 만사가 OK 되는 것과 같다.

 

경행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스님들의 법문을 듣다보면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것이 마음의 작용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법문이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하우(How)’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은 법문보다 실천 수행에 더 비중을 둔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하우(How)가 있는 것이다.

 

수행처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두가지 방법으로 한다. 하나는 경행이고, 또 하나는 좌선이다. 모두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연습이라 볼 수 있다. 알아차림은 관념이나 개념을 보는 것이 아니라 딱딱하다’ ‘부드럽다등의 실제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에 와 있다. 그런 연습을 하는 첫 번째 단계가 경행인 것이다.

 

경행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한 발 한 발 걸으면서 알아차리는 모습은 매우 진지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보지 않은 불자라면 밋밋하고 싱거워 보일 것이다. 땀 흘려 108배를 하고 목소리 내어 다라니를 해야 수행을 한 것은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런 차이가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큰 차이이다.

 

대상에 몰입하는 것과 대상을 분리하여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의 결과 역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대상에 몰입하여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무분별지의 상태가 사마타 수행의 목표라면, 대상과 분리하여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무아이고, 오래 유지 되지 않아 결국 고통뿐임을 아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인데, 바로 이런 점이 가장 큰 차이라는 것이다.

 

경행의 이익은

 

좌선을 하기 전에 경행을 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bbs불교방송의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경행의 이익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고 한다.

 

 

첫째, 먼 곳을 갈 수 있는 지구력을 갖는다.

둘째, 수행을 할 때 지구력을 갖는다.

셋째, 건강에 좋고 수행의 진전에 도움을 준다.

넷째, 소화가 잘되게 한다.

다섯째, 지속적인 집중력을 길러준다.

 

 

실제로 수행의 나라 미얀마의 위빠사나 명상원에서는 좌선 1시간에 경행 1시간 씩 할 정도로 좌선과 같은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경행은 몸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찰나삼매를 키우기 좋아서, 위빠사나 수행의 숨겨진 힘은 경행에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경행하는 모습이 왜 아름다울까. 그 것은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번뇌 망념, 잡념이 일어 날 수 없어서 그런 모습이 아름답고 고귀하고 성스러 보이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부처님 교단에 귀의한 사람들이 있었다.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 존자이다. 그들은 앗사지 비구가 탁발하는 모습을 보고 감화 받아서 귀의 하였다.

 

()으로 살기, 복밭(福田)으로 살기

 

불교를 수행의 종교라고 한다. 불교가 교학만 있고 수행이 없다면 죽은불교라고 볼 수 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지금 현재 당면하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소멸하기 위해서 있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은 항상 현재에 와 있어야 하는 데, 그렇게 하기위하여 습관을 들여야 한다. 습관을 들이는 것이 다른 말로 수행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수행을 다른 말로 수습(修習)’이라고도 한다. 이런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이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진정한 스승이라 볼 수 있다.

 

교학적으로 많이 알아 말로만 법을 전하는 것은 실익이 없는 죽은법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법문을 잘 하여 따르는 신도가 많다고 할지라도 수행의 열매가 없다면 수강료를 받아 생활하는 월급생활자와 다름없다. 다른 말로 종으로 사는 것과 같다.

 

반면에 교학과 법문은 좀 부족할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도와 과를 이루었다면 복밭(福田)’이 되었기 때문에 주인으로 사는 것과 같다. 이런 이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이웃과 함께 하여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을 때 살아 있는 법문, 생활선, 살아있는 불교가 될 것이다.

 

말로만 번지르하게 하는 법문 보다 수행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한 게송이 법구경의 19번과 20번 게송의 내용이다.

 

 

 

 

 

사왓띠의 제따와나 승원

Music; Compassion, Sung by Imee Ooi

 

음성 Compassion  buddhistsong4.mp3 

 

 

 

1. 빠알리어 법구경

 

 

1-19

Bahumpi ce sahita bhāsamāno     바훔삐 쩨 상히따 바사마노

na takkaro hoti naro pamatto          나 딱까로 호띠 나로 빠맛또

gopova gā ganaya paresa     고뽀와 가오 간마양 빠레상

na bhāgavā sāmaññ assa hoti        나 바가와 사만냐싸 호띠.

 

 

1-20

Appampi ce sahita bhāsamāno     압빰삐 쩨 상히따 바사마노

dhammassa hoti anudhammacārī    담마싸 호띠 아누담마짜리

rāgañca dosañca pahāya moha   라간짜 도산짜 빠하야 모항

sammappajāno suvimuttacitto         삼맙빠자노 수위뭇따찟또

anupādiyāno idha vā hura vā        아누빠디야노 이다 와 후랑 와

sa bhāgavā sāmaññassa hoti.        사 바가와 삼만냐씨 호띠.

 

 

2. 우리말 법구경

 

 

1) 거해스님

 

 

1-19

비록 많은 경을 독송할지라도

게을러 수행하지 않으며

마치 남의 목장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나니

수행자로서의 아무런 이익이 없다.

 

 

1-20

비록 경을 적게 독송할지라도 담마를 실천 수행하여

탐욕과 성냄과 무지를 없애고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여

번뇌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현재와 미래에 집착이 없어지면

이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참된 이익,

그는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

 

 

2) 석지현스님

 

 

1-19

입으로는 성스러운 말을 곧잘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전혀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이런 무지(無知)한 사람은 결코 저 성스러운 삶을 누릴 수 없다.

 

 

1-20

그렇게 많은 말은 하지 않지만 그러나 자신이 말한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 탐욕과 미움과 환상에서 깨어난 사람.

지금 현재와 이후로 그 어떤 것에도 집착을 두지 않는 사람.

이런 이의 삶이야말로 성스러운 삶이 아닐  수 없다.

 

 

3. 영어 법구경

 

 

1) Acharya Buddharakkhita

 

 

1-19

Much though he recites the sacred texts,

but acts not accordingly,

that heedless man is like a cowherd who only counts the cows of others —

he does not partake of the blessings of the holy life.

 

 

1-20

Little though he recites the sacred texts,

but puts the Teaching into practice, forsaking lust, hatred, and delusion,

with true wisdom and emancipated mind,

clinging to nothing of this or any other world —

 he indeed partakes of the blessings of a holy life.

 

 

2) Thanissaro Bhikkhu

 

 

1-19

If he recites many teachings, but

           — heedless man —

doesn't do what they say,

like a cowherd counting the cattle of

                  others,

he has no share in the contemplative life.

 

 

1-20

If he recites next to nothing

but follows the Dhamma

in line with the Dhamma;

           abandoning passion,

              aversion, delusion;

           alert,

           his mind well-released,

              not clinging

           either here or hereafter:

he has his share in the contemplative life.

 

 

5. 한문 법구경(法增比丘)

 

 

1-19

雖多誦經文(sahitam三藏經典),

放逸不依法,

如牧數他牛,

不獲沙門果。

 

1-20

雖少誦經文,

如法行,

息滅貪瞋癡,

正智心解脫,

 

 

6. 일어 법구경(西津紘一)

 

1-19

ブッダのえを
  議論しても
  少しも
  
実践しない人
  ブッダの弟子ではないよ
 


1-20
  ブッダのえを
  議論しなくとも
  欲と怒りと無知を捨て
  いつも
づいている人
  ブッダの弟子だよ

 

 

7. 법구경 인연담

 

 

1) 영어 인연담(Daw Mya Tin)

 

 

 

Verses 19 and 20

 

I (14) The Story of Two Friends

 

While residing at the Jetavana monastery, the Buddha uttered Verses (19) and (20) of this book, with reference to two bhikkhus who were friends.

 

Once there were two friends of noble family, two bhikkhus from Savatthi. one of then learned the Tipitaka and was very proficient in reciting and preaching the sacred texts. He taught five hundred bhikkhus and became the instructor of eighteen groups of bhikkhus. The other bhikkhu striving diligently and ardently in the course of Insight Meditation attained arahatship together with Analytical Insight.

 

On one occasion, when the second bhikkhu came to pay homage to the Buddha, at the Jetavana monastery, the two bhikkhus met, The master of the Tipitaka did not realize that the other had already become an arahat. He looked down on the other, thinking that this old bhikkhu knew very little of the sacred texts, not even one out of the five Nikayas or one out of the three Pitakas. So he thought of putting questions to the other, and thus embarass him. The Buddha knew about his unkind intention and he also knew that as a result of giving trouble to such a noble disciple of his, the learned bhikkhu would be reborn in a lower world.

 

So, out of compassion, the Buddha visited the two bhikkhus to prevent the scholar from questioning the other bhikkhu. The Buddha himself did the questioning. He put questions on jhanas and maggas to the master of the Tipitaka; but he could not answer them because he had not practised what he had taught. The other bhikkhu, having practised the Dhamma and having attained arahatship, could answer all the questions. The Buddha praised the one who practised the Dhamma (i.e., a vipassaka), but not a single word of praise was spoken for the learned scholar(i.e., a ganthika).

 

The resident disciples could not understand why the Buddha had words of praise for the old bhikkhu and not for their learned teacher. So, the Buddha explained the matter to them. The scholar who knows a great deal but does not practise in accordance with the Dhamma is like a cowherd, who looks after the cows for wages, while the one who practises in accordance with the Dhamrna is like the owner who enjoys the five kinds of produce of the cows.* Thus, the scholar enjoys only the services rendered to him by his pupils but not the benefits of Magga-phala. The other bhikkhu, though he knows little and recites only a little of the sacred texts, having clearly comprehended the essence of the Dhamma and having practised diligently and strenuously, is an 'anudhammacari'**, who has eradicated passion, ill will and ignorance. His mind being totally freed from moral delilements and from all attachments to this world as well as to the next, he truly shares the benefits of Magga-phala.

 

Then the Buddha spoke in verse as follows:

 

 

Verse 19:

Though he recites much the Sacred Texts (Tipitaka),

but is negligent and does not practise according to the Dhamma,

like a cowherd who counts the cattle of others,

he has no share in the benefits of the life of a bhikkhu (i.e., Magga-phala).

 

 

Verse 20:

Though he recites only a little of the Sacred Texts (Tipitaka),

but practises according to the Dhamma,

eradicating passion, ill will and ignorance, clearly comprehending the Dhamma,

with his mind freed from moral defilements and

no longer clinging to this world or to the next,

he shares the benefits of the life of a bhikkhu (i.e., Magga-phala).

 

 

* Milk, cream, butter, butter-milk and ghee

** Anudhammacari: one who practises in conformity with the Dhamma.

 

 

 

 

2)우리말 인연담(진흙속의연꽃)

 

 

두 친구 비구 이야기

 

 

부처님이 제따와나 승원에 머물고 있을 때 서로 친구간인 두명에 관한 게송 19번과 20번을 읊으시었다.

 

어느 때 사왓띠에서 온 두 비구가 있었는데, 그들은 고귀한 가문에서 자란 친구사이이었다. 그 중에 한 명은 띠삐따까(Tipitaka, 삼장)를 배웠는데, 성스런 교본을 매우 능숙하게 암송하였을 뿐만 아니라 설교도 잘 하였다. 그는 오백명의 비구를 가르쳣고, 18개 비구들 그룹의 강사가 되었다다른 한 명은 열심히 불타는 듯한 열정으로 통찰명상을 하여 통찰지와 함께 아라한이 되었다.

 

어느 때 두번째 비구가 부처님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제따와나 승원에 왔는데 거기에서 두 비구는 마주쳤다. 삼장강사는 친구가 아라한과를 성취한 것을 몰랐다. 그는 이 옛날친구가 성스런 경전에 대하여 조금 밖에 알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기껏해야 5부 니까야 중에 하나 정도이거나 삼장 중에 한장 정도 아는 것쯤으로 생각하여 없신여겼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질문을 하여 당황하게 만들기로 작정하였다. 부처님은 그의 불선한 의도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고, 부처님의 숭고한 가르침을 그런 용도에 활용 하는 것은 많이 배운 비구가 더 낮은 세계에 재생할 요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비의 마음을 낸 부처님은 학자비구가 다른 비구에게 질문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두 비구에 다가갔다. 부처님은 손수 질문을 하였다. 부처님은 강사비구에게 자나( jhanas) 와 막가(maggas)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하지 못하였는데, 그 것은 그가 배우지 않았던 수행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비구는 담마를 수행하였고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으므로 모든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다. 부처님은 담마를 수행한 비구를 치켜 세워 주었으나 많이 배운 학자 비구에게는 단 한마디의 칭찬도 하지 않았다.

 

거주하는 수행자들은 왜 부처님이 다른 비구에게 칭찬의 말을 해주고, 많이 배운 비구에게는 단 한디의 칭찬도 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들에게 그 일을 설명해 주었다. 학자비구는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지만 담마와 수행이 일치 하지 않아 소치는 목동과 같다고 하였다. 소치는 목동은 단지 임금을 받는 하인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에 담마와 일치하는 수행을 한 비구는 소들에서 나오는 다섯가지 산물 즉, 밀크, 크림, 버터, 버터밀크, (ghee)등을 만들어 내는 주인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학자비구는 단지 그의 수강료를 청구하는 서비스를 할 뿐이지 도와 과를 성취 하는 이득은 없는 것이다. 다른 비구는 성스런 경전은 비록 조금 밖에 암송하지 못하지만 담마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해하고 열심히 온힘을 다 받쳐 수행정진 하였으므로 감각적 욕망과 사악한 의도, 어리석음을 뿌리째 뽑아 아누담마짜리(anudhammacari)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마음은 완전히 도덕적 해이로 부터 자유로워졌고, 다음 세상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모든 집착으로 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그는 진실로 도와 과의 혜택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으시었다.

 

 

 

비록 많은 경을 독송할지라도

게을러 수행하지 않으며

마치 남의 목장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나니

수행자로서의 아무런 이익이 없다.

(법구경 게송19)

 

 

 

 

 

 

비록 경을 적게 독송할지라도 담마를 실천 수행하여

탐욕과 성냄과 무지를 없애고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여

번뇌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현재와 미래에 집착이 없어지면

이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참된 이익,

그는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

(법구경 게송20)

 

 

 

 

 

 

2010-09-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