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범부중생에서 성자로, 종성(種姓, 고뜨라부)의 지혜

담마다사 이병욱 2010. 9. 20. 18:32

 

 

범부중생에서 성자로, 종성(種姓, 고뜨라부)의 지혜

 

 

 

 

 

 

 

매년 맞이 하는 추석은 귀성인파로 부터 시작 된다. 올해의 경우 다행히 최장 9일을 쉴 수 있다 하니 귀성차량이 분산 되어 고생을 덜 할 것이라 한다. 벌써 수십년 동안 되풀이 되어온 귀성전쟁과 함께 또 하나의 뉴스거리가 등장 하였다. 추석연휴를 이용하여 해외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공항을 빠져 나가는 추석해외여행객은 사상최대가 될 것이라 한다. 주로 연휴기간을 이용하여 관광하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 켠에서는 귀성차량으로 인한 교통대란으로 고통받는 계층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은 민족의 명절과 아랑곳 없이 놀러 가는 계층이 있어서 사회양극화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세월이 변해도 바뀌지 않은 것

 

명절에 만나는 친지들은 그다지 변화가 없다. 단지 세월에 따라 나이가 들어 늙어 가는 모습만 다를 뿐 성격이나 성향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또 오랜 만에 만난 친구나 옛 동료들을 만나서 이야기 해 보면 나이가 들었어도 습관이나 말태도, 성격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만들어 주는 성향은 바뀌지 않는다. 그 것은 타고난 본마음과 본 바탕은 바뀌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비록 상황에 따라 달리 보여진다해도 그 상황이 지나가면 그 사람일 수 밖에 없는 성향은 그 사람의 얼굴이 다른 모습으로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것 처럼 절대로 바뀔 수 없다. 이처럼 한 번 형성된 얼굴이나 성향이 바뀌어 지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해 주는 것은 왜 그럴까.

 

축적된 성향과 바왕가의 마음

 

한 번 타고난 얼굴과 성격, 축적된 성향은 그 사람의 일생동안 함께 간다. 시시각각 생멸하는 몸과 마음에에 있어서 과거의 그 사람과 지금의 그 사람과 완전히 똑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 사람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바왕가(bhavaga)’이론으로 설명한다. 바왕가란 무엇일까.

 

 

바왕가(bhavaga) bhava(, 존재)+aga(, 요소, 부분)의 합성어로, 한 존재의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마음, 즉 존재를 지속시키는 마음이다. 중국에서는 유분(有分)이나 유지(有支)로 번역하였고, 영어권에서는 the factor of being, sub-consciousness, life-continuum 등으로 옮기고 있다. 우리의 인식과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세하고 알시 어려운 마음으로,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나 기절했을 때에도 지속되는 마음이다. 서양 심리학의 용어로는 '잠재의식'이라 할 수 있겠다.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주석)

 

 

바왕가를 존재의 영속성을 유지 시켜 주는 마음이라고 하였다. 이는 한 존재가 태어 나서 죽을 때 까지 그 존재임을 지속시켜 주는 마음이다. 그러나 여섯감각기관에서 여섯가지 감각대상에 부딪쳤을 때는 그 바왕가의 마음은 일시적으로 끊어진다. 그리고 육경의 대상으로 전향하게 되는데 그 때 대상이 강하거나 선명하게 되면 조사à결정à속행à등록의 과정을 거쳐 업을 짓게 된다.

 

등록이 끝나면 다시 바왕가의 마음으로 돌아 온다. 마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서 인터럽트가 걸렸다가 그 임무를 수행하고 나면 다시 메인루틴으로 복귀 하듯이,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되돌아 오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바왕가의 마음은 오로지 하나의 대상을 가진다. 그 대상은 무엇일까.

 

죽음직전에 보는 표상

 

초기불교에서 마음이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고 하였다. 대상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마음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한 순간에 오로지 하나의 마음 밖에 없다. 또 마음은 순간적으로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데 반드시 조건(과보)을 그 다음 마음에 남기고 사라진다.

 

이렇게 순간 순간 매 찰나 마다 마음이 일어나고 되풀이 하지만 그 마음의 대상은 육근이 육경에 부딪쳐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 바왕가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끊어 놓지 않는한 바왕가의 마음이 유지 된다.

 

바왕가가의 마음도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에 당연히 대상을 가져야 한다. 한 존재의 일생에서 오로지 하나 밖에 없는 바왕가의 마음이 일어 날 때는 죽기전에 마지막 죽음의 마음에서 다음과 같은 대상이 나타날 때 일어난다.

 

 

첫째, 살면서 지었던 행위의 회상인 업(kamma)이 나타난다.

둘째, 업과 관련된 주변 조건인 업의 표상(kamma-nimitta)이 나타난다.

셋째,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난다.

 

 

죽기전 현생에서 마지막 마음에서 자신이 지었던 가장 인상깊었던 업이나, 그와 관련된 표상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이 뜸과 함께 그 것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마음이 재생연결식이다.

 

재생연결식-바왕가-죽음의식

 

물론 아라한과 같이 업을 짓지 않았을 경우 업이나 표상이 나타나지 않음에 따라 당연히 재생연결식도 일어나지 않아 윤회가 종식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존재들은 삶의 과정에서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업을 지어 왔기 때문에 그 업의 과보로 인하여 죽기직전 마지막 마음에서 업이나 표상을 보고 내생의 마음이 일어나는데, 바로 그 마음이 다음생에서 얼굴과 성향등 존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바왕가의 마음이다.

 

따라서 바왕가의 마음은 하나이지만 재생연결식과 죽음의 마음이 일종의 링크(고리)역할을 한다. 물론 그 재생연결식과 죽음의 마음 역시 한 존재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는 바왕가이다.

 

한 존재는 일생동안 오로지 하나의 바왕가의 마음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이 다른 얼굴로 바뀔 수 없듯이 성격이나 성향 또한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상대방이 바뀌지 않는다고 불만을 털어 놓는다.

 

상대방을 바꾸려 할 때

 

바왕가의 이론만을 놓고 본다면 한번 형성된 성격은 절대로 바뀌어 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바꾸려 한다면 긴장과 갈등의 연속일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 부모, 자식, 직장의 부하등을 모든 것을 내 의지대로또는  내 뜻대로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면 모두가 불행해 진다. 이 것은 한 번 형성된 성격이나 성향을 모르고 하는 행위이다.

 

내성적을 사람이 외향적으로 바뀌기를 기대하거나 감정적인 사람을 이성적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를 넘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대하는 것은 차라리 평범하게 생긴 얼굴을 잘 생긴 얼굴로 바뀌기를 기대하거나 작은 키를 가진 사람을 큰키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과 같다. 또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려 하는 것과 같다.

 

되지 않는 것을 되도록 하는 것은 집착이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키려 한다면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 것도 피튀기는 싸움이다. 그런 싸움은 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끼리 일어난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따르면 고부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 자식문제, 직장문제가 단골 강연내용인데 이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70-80%로서 거의 대부분이라고 한다.

 

문제는 상대방을 바꾸려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상대방을 내 뜻대로 따르기를 원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 갈 뿐이다. 애초에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상대방을 내 뜻대로 바꾸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일한 방법은 무엇일까

 

초기불교의 바왕가의 이론에 따르면 한 번 형성된 몸과 마음은 그 존재가 유지되는 한 절대로 바뀌어 지지 않고, 다만 죽어서 재생할 경우 새로운 바왕가의 마음이 일어 났을 때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 번 사람으로 태어 났으면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가고, 한 번 개로 태어 났으면 개로 일생을 살게 하는 마음이 바왕가의 마음인 것이다.

 

그런데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한 번 형성된 얼굴이나 바왕가는 바꿀 수 없지만 존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성격이나 성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유일한 방법은 수행을 통해서이다.

 

수행을 왜 하는 것일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안정시켜 최고의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일까. 모두 다 맞는 말이지만 2009 5월 미황사 순례법회 당시 금강스님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가 정답이라고 본다. 스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참선을 하면 스스로 고귀한 존재가 됩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스스로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승불교의 전통에서 참선이라고 하였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이미 부처님 당시 부터 고귀한 존재가 되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그것은 부처님이 발견한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해서이다.

 

고귀한 존재가 됨으로써

 

모두 성스러운 진리이고 성스런 도 닦음의 길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길로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도와 과를 이루신 분을 성자라 부르고 과에 따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 부른다.

 

성자가 된다는 것은 계보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범부중생에서 성자로 족보가 바뀐다는 것은 가히 마음의 혁명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범부중생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는 것을 아비담마에서는 고뜨라부(gotrabhū)’라 한다. 고뜨라부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고뜨라부(gotrabhū)는 종족의 성을 뜻하는 gotra와 √bhū(되다)에서 파생된 bhu가 합성된 단어이다. 그래서 고뜨라부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성()을 가지게 되는 경지’이다. 선정을 증득한 경우에 이것은 욕계의 ‘범부혈통’에 속하는 마음을 드디어 극복하고 고귀한 마음의 혈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고뜨라부라고 하고 첫 번째 도의 경우, 이 순간에 범부의 혈통에서 성자의 혈통으로 바뀌기 때문에 고뜨라부라고 한다. 이렇게 그 경지가 바뀌는 순간의 마음을 고뜨라부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고뜨라부 냐나(gotrabhū-ñāa)'라고 하는데, 수행자의 지혜가 도를 얻을 만큼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뜻에서 ‘성숙의 지혜’라고 번역된다.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주석)

 

 

고뜨라부(종성)는 비구나 재가자를 불문하고, 범부에서 벗어나 성자가 되어 열반을 지향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전문용어이다. 이는 누에고치에서 나방이 되어 날아가는 것과 같고, 또 계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는 커다란 변화이다. 이처럼 범부에서 성자가 되는 순간은 얼굴은 그대로 이지만 성격과 성향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존재의 가장 큰 특징은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는 유신견(유아견)’이 극복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를 고정된 나 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영혼의 나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일시적인 나만 있을 뿐이어서 그 어떤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나 자신도 바꿀 수 없는데 남을 바꾸려 할 때 여러가지 무리가 따른다. 더구나 내가 최고라는 아만과 아상, 항상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신견(유아견)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역시 똑같은 유신견(유아견)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변화를 강요한 들 분란만 야기하고 긴장과 갈등만 고조 시킬 뿐이다. 상대방이 성인 군자가 아닌 한 나의 의견을 들어 줄 리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내가 변하는 것이다. 변하긴 변화된 완전히 변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식으로 말하면 계보를 바꾸는 것이다. 범부중생에서 성자의 계보로 바뀐다면 얼굴은 그대로 이지만 내면의 축적된 성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런 사람을 성자라 부른다. 그런 성자의 가장 큰 특징은 나가 있다라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싸울 일이 없는 것이다.

 

남에게 변화를 강요하기 보다 스스로 먼저 자신이 먼저 변화하고 스스로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 불교의 목표라고 볼 수 있는데 그와 관련된 좋은 글귀가 있다. 미디어붓다에 연재하고 하고 있는 김정빈님의 글에서 옮겨온 내용이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었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아,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김정빈의 명상 이야기3,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6138&thread=32r30)

 

 

 

2010-09-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