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여성이 감각적 대상으로 보일 때, 불교적 해법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2. 18. 17:02

 

 

 

여성이 감각적 대상으로 보일 때, 불교적 해법은

 

 

 

불교와 심리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전세계의 정신과 전문의사들의 40%는 불교적 명상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불교심리학은 보통 마음챙김또는 알아차림이라는 부처님이 발견한 명상기법을 사용하는데 이를 빠알리어로 사띠(sati)’라 하고, 영어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 한다.

 

초기불교의 교리를 임상에 접목하여 성과를 내고 있는 의사가 있다. 불교tv에서 마음테라피라는 교양강좌(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2&PID=P634)를 하고 있는 정신과전문의 전현수박사이다.

 

전박사는 매회 새로운 주제로 강의 하고 있는데, 주로 사람들이 현실에서 인간관계로 등으로 인한 갈등과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를 불교 교리와 연계하여 불교적 해법을 제시 하고 있는 것이 또한 강좌의 특징이다.

 

이번에 본 프로 행복한 부부라는 주제의 강좌인데 특히 남편의 외도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남자들은 왜 바람을 피울까. 남편이 바람을 피워 고민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사람사는 곳이라면 늘 들어 오던 말이다. 그런 바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주로 남성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인데, 전현수 박사는 세가지 불교적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상대를 가족처럼 생각하라

 

첫번째 방법은 여자를 보았을 때 가족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다. 나이든 여자를 보면 어머니라 생각하고, 내 누나뻘 되면 누나로 생각하고, 동생뻘 되는 여자를 만나면 누이동생이라 생각하고, 딸뻘 되는 여자를 보면 로 생각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여자가 성적대상으로 보이지 않고 가족처럼 보여 지기 때문에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에 대한 경전적 근거를 찾기 위하여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 본생담(Jataka)과 사분율에 있음을 알았다. 본생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한다.

 

 

연상의 여인은 어머니로 알라.

중년쯤의 여인은 누이로 알라.

젊은 여인은 딸로 보라.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불제자들은

젊은 몸이면서도 욕정에 끌리지 않고

자신의 몸을 깨끗이 보전하고 있다.”

(불교평론, 율장을 통해 보는 '욕망끊기', 철우스님 파계사 영산율원 율주,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41)

 

 

사분율에는 연상의 여인은 어머니처럼 여기고 중년의 여인은 누이처럼 여기며 젊은 여인은 딸처럼 여겨라.”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분율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대 계율서(四大戒律書)의 하나로, 석가모니 입멸 후 100년경에 담무덕(曇無德)이 상좌부(上座部)의 근본율 중에서 자기 견해에 맞는 것만을 네 번에 걸쳐 뽑아 엮은 율문 불서(律文佛書)”라고 설명되고 있다.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고 가족의 일원으로서 바라 본다는 것은 이성을 대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인식의 전환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은 세속에서 뿐만 아니라 출가사회에서도 강조 되는 덕목이라 한다. 틱낫한스님의 비구 팔경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비구가 비구니를 볼 때 그는 그 비구니가 자신의 어머니, 누나, 누이동생, 또는 딸과 같은 연령대인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비구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비구니를 존경하고 보호하며 수행을 돕기를 마치 자신의 어머니나 누나를 존경하고 보호하듯 해야 한다. 비구니가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경우 비구는 마치 누이동생이나 딸을 염려하듯 비구니를 보호하고 수행을 도와야 한다.

(틱낫한 스님은 왜 비구 팔경계(八敬戒)를 정했나,

http://buddhistculture.co.kr/insiter.php?article_num=1508&design_file=4653.php&topic=M)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바라 볼 때 단지 이성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처럼,누나처럼, 동생처럼, 딸처럼 본다면 남자가 바람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안되면 어떻게 할까. 이에 대하여 전현수 박사는 다음과 같이 해보라고 설명한다.

 

상대방을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보라

 

두번째 방법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이는 우리몸에 대하여 32가지로 이루어진 기관이나 장기등으로 분해하여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를 볼 때 32가지로 이루져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전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 치아등으로 분해하여 보면 성적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명상법은 청정도론에서 몸에 대한 마음챙김(向身法, kayagatasatikatha)’ 명상법으로 상세히 소개 되어 있다. , 우리 몸을 발바닥에서 부터 머리 끝까지 더러운 것(不淨)으로 가득차 있음을 반조 하는 것이다.

 

이 명상법은 디가니까야의 마하사띠빳따나숫따(mahasatipatthana sutta, 대념처경)에도 표현 되어 있는데 31가지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청정도론에서는 뇌를 골수 안에 포함하여 모두 32가지 부정함을 알아차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32가지는 무엇일까. 이를 외워야 하는데 6개 그룹으로 묶어 놓고 있다.

 

 

머리털, 몸털, 손톱, 이빨, 살갗(5)

, 힘줄, , 골수, 콩팥(5)

염통, , 근막, 지라, 허파(5)

큰창자, 작은창자, 위 속의 음식, , (5)

담즙, 가래, 고름, , , 굳기름(6)

눈물, 피부의 기름기, , 콧물, 관절활액, 오줌(6)

 

 

청정도론에서는 이처럼 외우기 좋게 그룹으로 묶어 놓았다. 이를 순서대로 외우고 또 역순으로 외워야 한다고 외우는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 이렇게 외우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여기(現今)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영지와 해탈의 과를 실현한다.”

(앙굿따라니까야, A.I.43)

 

 

몸 을 보았을 때 똥, 오줌,고름등 32가지의 혐오스런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집착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그 알아차리는 방법으로서 이 몸에 털이 있다. 이 몸에 털이 있다. ..”라든가 이 몸에 똥이 있다. 이 몸에 똥이 있다...”등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백번 천번 독송하면 마음이 이곳 저곳으로 달려가지 않아 32가지 부분들이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몸은 부정한 것이라고 알아차려도 여자가 또는 남자가 성적 대상으로 보인다면 어떻게 할까.

 

이성을 볼 때 감각기관을 잘 지켜라

 

세번째방법은 감각기관을 잘 지키는 것이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냄새 맡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접촉이 일어 날 때,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 날 때 감각의 문을 잘 지키는 것이다.

 

사람은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감각대상과 접촉하게 되어 있는데 이 때 마음이 일어 난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절대 일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형상을 취할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눈으로 형상을 보지만 눈이 형상을 보는 것은 아니다. 눈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 또한 형상을 볼 수 없다. 마음은 눈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눈이라는 감각의 문이 형상이라는 대상과 접촉할 때 눈의 감성을 토대로 가지는 마음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즉 눈으로 형상을 본다는 것은 눈의 알음알이(안식)으로 형상을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상을 보게 되면 느낌이 일어나는데 보통 좋으면 끌어 당기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고, 싫으면 밀쳐내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이 때 느낌이 좋으면 거머 쥐려하기 때문에 탐욕이 일어나고, 느낌이 좋지 않으면 밀쳐 내려하기 때문에 성냄이 일어난다.

 

이처럼 중생들은 매 순간 여섯개의 구멍(육문)을 통하여 탐욕과 성냄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래서 중생의 특징을 탐진치라 하고 탐진치에 찌들려 산다고 한다. 반면에 깨달은 자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을 모두 내 보낸 자들이다. 따라서 탐욕이 일어나면 탐욕이 일어난 줄 알아차리고, 성냄이 일어나면 성냄이 일어난 줄 알아차린다고 한다. 

 

느낌이 좋다고 해서 끌어 당기고, 느낌이 싫다고 해서 밀치면서 즉각적이고도 동물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범부들이다. 또 범부들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욕망이 시키는대로 감각적 쾌락에 휘들려 산다. 여자를 보는 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자라는 형상을 보게 되면 일단 전체적인 형상을 취하게 된다. 여자는 아름답다든가 매력적이다든가 섹시하다든가 하는 따위의 개념이 들러 붙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전체상(全體相)’을 취한 후 이제 더욱 더 세세하게 들여다 보게 된다. 

 

그 여자의 얼굴, , 가슴, 다리, 미소등 세세한 부분상(部分相)’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부분상을 취하게 되면 형상이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눈의 알음알이눈의 거친 마음(안식)’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끄달리게 되면 그 대상을 감각적 욕망으로 즐기고 싶어하는 갈애가 일어난다. 이를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라 한다. 이런 갈애 때문에 불교에서 중생들이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문단속을 철저히 하라고 하였다. 그 문은 여섯가지 문을 말한다. 여섯가지 구멍으로 들어 오는 도적놈을 막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을 잘 지켜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번째 방법인 이성을 볼 때 감각기관을 잘 지키라는 것이다.

 

감각기관을 잘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였다.  , 개념을 취하지 않고 보는 것이다. 여자는 예쁘다”, “매력적이다등과 같은 전체적인 형상과 얼굴, , 가슴등과 같은 부분적인 세세한 형상을 취하지 않는것이다. 그래서 대상을 볼 때 오온으로 보는 것이다.

 

몸은 변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고, 무상해서 괴로운 것이고, 무상해서 무아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느낌, 인식, 형상, 마음 또한 무상, , 무아로 통찰 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눈감고, 귀막고 살 수 있을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눈감고, 귀막고 살아 갈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등이 거슬린다고 하여 깊은 산속에 숨어 살 수 없다. 설령 깊은 산속에 숨어 살며 감각대상을 차단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마노(마음)의 문으로 들어 오는 생각은 차단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 일 것이다.

 

만일 마음이 내것이고, 자아가 내것이고, 불멸의 영혼이 있다면 우리는 병도 나지 말아야 하고, 죽지도 말아야 하고,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을 때 잠자는 것 조차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란 누구일까. 매순간 감각기관에서 접촉하는 순간 일어나는 마음의 연속이 나이다. 앞의 마음을 조건으로 뒤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은 상속하여 흐르는 연기적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순간의 마음을 잘 다스리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느낌이 좋으면 잡아당기고, 싫으면 밀쳐내는 것과 같이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간다면 단지 본능적으로, 욕망적으로 사는 동물들과 다름 없을 것이다.

 

갓 출가한 젊은 비구가 탁발을 가다가

 

여자를 보았을 때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수행을하고 있는 젊은 비구에게 그런 일이 닥쳤다면 경전에서 무어라 말할까. 청정도론에 그와 같은 사항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글이 있다.

 

갓 출가한 젊은 비구가 탁발을 가다가 한 여인을 보고서 탐욕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젊은 비구와 아난다장로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는 감각적 욕망으로 불타고 있습나다.

그 불은 제 마음을 태웁니다.

고따마시여, 연민히 여기사

그것을 소멸하는 법을 설해 주십시요.”

(상윳따니까야, S.i.188)

 

 

이에 대하여 아난다장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식의 정도가 당신의 마음을 태웁니다.

아름답다는 표상을 버리십시요.

그것은 탐욕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부정(不淨)함의 수행으로 마음을 닦고

마음이 하나 되어 삼매에 들도록 하십시오.

상카라()들을 타인이라고,

괴로움()이라고, 무아라고 보십시오.

큰 애욕을 끄십시오.

거듭 거듭 불타지 않도록 하십시오.”

(상윳따니까야, S.i.188)

 

 

 

 

 

 

 

사진

http://mettarefuge.wordpress.com/2010/08/06/the-dhammapada-audio-dharma-by-gil-fronsdal/

 

 

 

갓 출가한 비구가 아난다 장로에서 물었을 때, 아난다 장로는 부정상을 닦으라고 말하였고, 형성된 모든 것들(상카라)를 무상, , 무아로 통찰하라고 말하였다. 이는 마음을 항상 현재에 머물게 하여 알아차림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탁발을 나갈 때 비구는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마음챙김을 항상 유지하며 걸어 갈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수행을 포기하고 세속에서 살아가면 저급한 삶으로 보았다.

 

문단속을 잘 해야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반드시 출가한 제자들에게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재가불자들도 대상을 만났을 때 항상 깨어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라는 말과 같다. 더구나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등이 모두 감각적 욕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문단속을 잘 할 것을 경전의 도처에서 강조하였다. 만일 여섯구멍의 단속을 잘 하지 못한다면 출가하여 깊은 산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세속에 사는 범부와 다름 없고, 비록 재가자일지라도 여섯구멍으로 들어 오는 도둑놈을 잘 단속하고 있다면 세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출가하여 산속에 있는 수행자와 같은 이치 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Yathāgāra ducchanna,             야타아 가아랑 둣차낭

vuṭṭhi samativijjhati                         윳티 사마띠윗자띠

Eva abhāvita citta,                  에왕 아바아위땅 싯땅

rāgo samativijjhati.                          라아고 사마띠윗자띠

 

마치 성글게 이은 지붕에

비가 쉽게 스며들듯이

굳게 수행하지 않은 마음에

탐욕과 갈망은 쉽게 스며든다.

(법구경 게송13)

 

 

 

Yathāgāra succhanna,             야타아 가아랑 숫차낭

vuṭṭhi na samativijjhati                     윳띠 나 사마띠윗자띠

Eva subhāvita citta,                에왕 수바아윗땅 싯땅

rāgo na samativijjhati.                     라아고 나 사마띠윗자띠

 

마치 튼튼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쉽게 스며들지 못하듯이

굳게 수행된 마음에

탐욕과 갈망은 쉽게 스며들지 못한다.

(법구경 게송14)

 

 

 

 

2010-10-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