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성제를 주장하지 않는 마하야나, 유마경 강의를 듣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2. 21. 12:35

 

 

 

 

사성제를 주장하지 않는 마하야나, 유마경 강의를 듣고

 

 

 

 

글쓰기를 하다 보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문학작품이나 신문의 기사내용을 보면 사회의 불합리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상에 대한 고발성 글이 많은 것을 보면 글을 쓰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비판적으로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교와 관련된 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왜 불편해 할까

 

블로그에 올린 글은 누가 와서 보는지 알 수 없다. ‘로그인하여 들어 온 경우 흔적이 남아서 알 수 있지만, 그 것도 단지 필명만 알 뿐이다. 더 자세하게 알려면 필명을 클릭하면 블로그와 연결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극히 드문현상이다. 따라서 매일 들어 오는 사람중에 대부분은 로그인 없이 들어 오기 때문에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인지, 불자인지 아닌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종종 댓글을 보면 어느 정도 성향은 파악 할 수 있다. 그런 분들 중에 1600년 전통의 한국불교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글을 볼 수 있다. 그 경우 대부분 올려진 글에 대하여 불편해 한다. 그들은 때로 유일신종교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판에 적전분열을 일으키는 반 불교적인 글이라고 매도 하기도 한다. 주로 초기불교와 관련된 글을 올리면서 대승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때문에 불편해 하는 것이라 생각 한다.

 

그런 불편해 하는 사항은 인터넷카페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유명한 초기불교 카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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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법에 대해 자꾸 많이 듣다 보니
방편법을 무시하게 되면서,
일배가 삼천배인데 뭐하러 절하냐고 하지를 않나,
가족에게 공양하면 되지 절에 부처님께 뭐하러 공양하냐고도 하고,
3000
배 절하는 것 보다 한 시간 앉아 있는게 낫다고도 하고,
늘 관(
)하고 살면 되지 무슨 기도가 필요하냐고 하질 않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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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자가 놓치기 쉬운 점 , http://cafe.daum.net/truenature/7qUb/66)

 

 

인터넷에서 카페와 블로그를 동시에 운영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어느 스님의 글이다. 여기서 근본법은 초기불교를 말하는데 근본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대승불교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에 대한 못 마땅하다는 식의 글이다.

 

스스로 자초한 일

 

이처럼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에 대한 불평, 불만, 못마땅함이 있는 것은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이 침해 당했다는 느낌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판을 하게 된 근본원인은 대승불교에서 스스로 자초했다고 본다.

 

인도에서 기원 전후하여 부파불교, 특히 설일체유부를 비판하면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 났는데 그 비판의 강도는 비판을 넘어 거의 비난내지 비방수준으로 보인다. 그런 현상을 간접적으로 대승불교 경전에서 볼 수 있다.

 

대승불교 경전은 거의 예외없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소승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런 이유는 보살사상공사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경전을 편찬하고 결집할 필요를 느꼈는데, 그들은 스스로 대승(大乘, mahayana)이라 칭하고, 이에 반하여 종전의 불교에 대하여 소승(小乘, hinayana)이라고 폄칭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은 이타(利他)보살의 도를 표방한다고 말하고, 반면 소승은 오로지 자리(自利)만을 추구하는 성문의 도라 하여 엄격히 구분하였다. 이런 구분은 대승경전의 도처에서 나타난다. 이런 대승경전 중에 유마경이 있다.

 

 

 

 

 

 

바이살리( Vaisali)

대승경전 유마경의 유마거사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비하르 주 북서부의 파트나 북쪽으로 간다크 강을 끼고 있다. 고대 리차비 공화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초기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여러 도로를 통해 남쪽의 라자그리하, 북쪽의 카필라바스투·슈라바스티와 연결되어 있었다.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가 바이샬리에서 태어나 많은 시간을 보냈고 붓다도 여러 번 이곳을 방문했다. 5세기에는 중국의 승려 법현(法顯)이 순례해 바이샬리의 주요 승원과 사찰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붓다가 사망한 후(BC 483) 불교도들의 2차 결집회의가 열려 수도자의 행위규범을 규정한 곳이기도 하다.
(
사진 Asokan Pillar, Vaisali, 1998

, http://palmbeachmahabodhi.com/Library/PhotoCollections/APhotos.html)

 

 

 

대승경전의 깜짝놀랄 내용

 

아침에 방송하는 경전공부 시간에 유마경 (http://www.bbsi.co.kr/, 12 19/20일자)  을 들었는데, 이 강좌의 내용을 보면 소승에 대한 비판을 넘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부정하고 있다.

 

더구나 부처님의 10대제자 중의 하나인 수보리(須菩提, Subhuuti, 수부띠)대한 노골적이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내용을 담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먼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한 부정이다. 수보리가 병문안을 하기 위하여 유마거사를 찾았는데, 유마거사는 수보리에게 공사상을 설명하면서 소승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수보리에게 면박을 주다시피 한다. 그런 내용 중의 하나를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스님이 설명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녹취하였다.

 

 

대승에서는 평등을 보기 때문에 따로 지혜와 어리석음을 구별하는 사성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스님은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여기고 있는 사성제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이 사성제가 중요한 진리이긴 하지만 참으로 깨달아서 알고 보면 사성제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중생을 구하고 평등한 공사상의 이치를 체득하기만 한다면 구경열반을 얻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삿된 견해도 끊어야 겠다는 생각도 쉬어야하고, 또 열반에 이르겠다는 생각도 쉬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라 본다.

 

사성제는 부처님이 강조한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가르침을 말한다. 그 목표는 오로지 한가지 방향인 해탈열반’을 추구 하는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 길에 이르는 방법이 사성제인데 그 중 도성제가 팔정도 이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와 팔정도가 핵심이다. 이런 내용은 법구경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길로서는 팔정성도가 최상이요

진리로서는 사성제가 가장 성스럽고

욕망을 다스리는 담마가 으뜸이며

인간과 천상을 통틀어 두 발 가진 생명 가운데

붓다야말로 최고의 성자이다.

(법구경 273게송)

 

 

사성제와 팔정도는 부처님이 가장 강조한 핵심적인 가르침으로서 초전법륜경에 잘 묘사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의 84천법문이 모두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기 위한 대기설법이라고 볼 수 정도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 경전에서는 이에 대하여  오로지 자신의 한 몸을 위하여 세속과 떨어져 살며,  자신만의 해탈과 열반을 실현 하는 극히 이기적인 소승의 가르침이라 하여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얻어야 할 열반이 없다는데

 

불교방송의 경전공부 시간에 원각경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스님은 열반이라는 업을 짓지 맙시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이 말 뜻을 잘 몰랐으나 이번 유마경의 강의를 듣고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사성제를 중시 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열반 또한 이루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유마경을 설명할 때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열반을 구함이 없는 마음으로, 번뇌와 열반을 다 여의는 것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열반을 얻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가 없고, 맑고 깨끗한 마음은 어디에도 동요 되지 않고 느낌이 없는 그 자체이어서 다시 열반을 기다리지 않으므로 열반을 기다리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 또 열반을 추구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래 자성청정하기 때문에 생사도 번뇌도 알고 보면 진여의 마음을 아주 여의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의 분별심 그 자체도 본래 맑고 깨끗한 그 마음 즉, 열반을 떠나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 바탕이 그대로 열반이기 때문에 다시 얻어야 할 열반이 없다는 것이다.”

 

 

 

원래 부터 부처이기 때문에 마음 한 번 바꾸면 부처가 되므로 따로 열반이라는 업을 지을 필요가 없음을 설명하는 글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열반을 추구하지 말고 번뇌와 열반을 모두 놓아 버리고 쉬었을 때 가능한데, 이는 서로 다툼이 없는 '무쟁삼매'의 경지라고 한다. 따라서 그런 삼매의 힘으로 열반과 번뇌를 분별하지 않고 중생을 보호하고 구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극언을

 

그런데 그와 같은 공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수보리에 대하여 유마거사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극언을 퍼 붓는다. 그 내용은 어떤 것일까. 녹취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지 못한 당신에게 복덕이 되기는 커녕 지옥, 아귀, 축생의 경계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에게 보시하는 것은 복전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그대에게 공양을 올리는 사람 역시 3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분들을 성자 (ariya-puggala)’라 하는데, 이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라 하여 복전 (福田, punna-khetta)이라 부른다.

 

특히 아라한의 경우 모든 번뇌가 말라서 부처님과 같은 경지로서 마땅히 공양을 받을 자라 해서 응공(應供)’이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의 한 사람인 수보리도 아라한이었음에 틀림 없다. 따라서 응당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마거사는 수보리가 공의 이치를 모르고, 또한 무쟁삼매의 경지를 체득하지 못하였으므로 복전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더구나 그런 자는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질 것이 뻔하고, 그에게 공양을 한 자역시 똑 같이 3악도에 떨어질 것이라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극언을 퍼 붓고 있다.

 

이는 명백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부정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공의 도리를 모른다고 하여 3악도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영구가 된 수보리존자

 

이와 같은 유마거사의 꾸지람에 얼마나 혼줄이 났을까 수보리의 허둥 대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묘사 하고 있다.

 

 

수보리는 유마거사의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었고,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답을 잃고, 망연자실한채 바루를 그냥 두고 유마거사의 집에서 나가려고 했다.”

 

 

유마거사가 말하는 공의 이치와 무쟁삼매와 평등의 이치등을 알아 들을 수 없고, 더구나 공양받을 자격도 없을 뿐만 아니라 3악도에 떨어질 것이라 하니, 수보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보리는 바루도 챙기지 않은채 황망히 집을 나서는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유마거사는 그런 우스운 꼴을 보고서 바루를 챙겨 주며 다시 공사상에 대하여 한 수 가르쳐 주는 내용이 다시 전개 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부처님의 제자를 찌질이, 못난이로 표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승법만 알고 대승법을 모르는자들은 설령 부처님의 10대 제자일지라도 덜 떨어진 인간내지 시쳇말로 영구가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강좌 역시 부처님을 가르침을 소승으로 폄하하고 부처님의 제자들을 능멸하는 듯한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승불교를 비방하면 오역죄

 

이처럼 대승불교경전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부정하고, 부처님의 제자들을 하나씩 불러 내어 공사상에 대하여 한 수 가르쳐 주고, 때로는 면박도 하고, 꾸지람도 주면서 찌질이, 못난이, 영구로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승경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오역죄(五逆罪)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마경 강좌에서도 오역죄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5역죄는 초기불교 경전에 표현 되어 있는데,  그 다섯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버지를 살해 하는 것

둘째, 어머니를 살해 하는 

셋째, 아라한을 살해 하는 것

넷째,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

다섯째, 승가를 분열 하게 하는 것

 

 

이런 오역죄를 지으면 가장 무거운 업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서 무간지옥(avici, 아위찌)에 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오역죄를 짓는 것을 무간업(anantariya kamma)을 짓는다 말한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초기경전상의 오역죄를 소승불교의 오역죄라 말하고, 별도의 대승불교의 오역죄를 만들었다. 그 내용은 무엇일까.

 

 

첫째, 절이나 탑을 파괴하고 경전이나 불상을 불사르는 것,

둘째, 삼승법을 비방하고 불교를 천대하는 것,

셋째, 스님네를 욕설하거나 일시키는 것,

넷째, 소승의 다섯 역적죄를 저지른 것,

다섯째, 인과를 믿지 않고 열 가지 나쁜 업을 짓는 것

 

 

초기불교의 오역죄가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와 부처님과 아라한에게 해를 끼친 경우로 한정하지만, 대승불교의 오역죄는 대승불교를 비방하고 비난 하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한다.

 

특히 출가한 스님을 비방하는 것과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비방하는 것 역시 무간지옥에 떨어져야할 오역죄로 보는 것이다. 이는 그 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별도의 불교를 계속 만들어

 

이처럼 대승불교는 스스로 대승이라 부르고 종전의 불교에 대하여 소승이라 폄하하면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와 열반을 부정하는 가 하면 부처님의 제자를 능멸하고 있는 것을 경전상에서 확인 하였다.

 

대승불교는 별도의대승사상을 만들고, 이에 대한 별도의대승경전을 편찬하여 결집하였고, 또 이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경고 하기 위한  별도의대승오역죄까지 만들었다.

 

이런 별도의연속은 별도의 불교를 계속 만들어 내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별도의 정신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이다라는 식의 내가 하면 괜찮고, 남이 하면 안된다는 아전인수격의 전형이 아닐까.

 

이처럼 아전인수격으로 만들어진 대승불교경전을 어떨게 보아야 할까. 이런 경전을 비판하면 오역죄를 지어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대승경전을 지은 편찬자들이 스스로 오역죄를 지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불교의 오역죄 중 다섯번째인 승가를 분열하는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2010-12-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