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행(行)이 행동이고 식(識)이 분별이라고? 선사들의 오온에 대한 인식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2. 20. 11:48

 

 

()이 행동이고 식()이 분별이라고? 선사들의 오온에 대한 인식

 

 

 

 

매일 글쓰기를 하면서 다음 주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늘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찾기 위하여 늘 두리번 거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될 수 있으면 불교와 관련된 주제를 벗어 나려 하지 않는다. 또 글을 써도 반드시 경전과 주석서에 근거한 글을 쓰고자 노력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쓴다면 자신의 견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견해를 내 세우는 말이나 글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어느 인터넷카페에 올려져 있는 글을 읽어 보면 마치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열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상의 근거는 없다.

 

이런 경향은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큰 특징이다. 깨닫기만 하면 모두 부처가 되기 때문에 경전에 근거한 이야기 보다 자신의 견해를 네 세우는 것은 자신이 한 이야기도 불설(佛說)과 같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예는 방송에서도 들을 수 있다.

 

몸을 몸이라 부르지 않고

 

이른 새벽 잠에서 깨면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켠다. 6시 전후로 방송되는 경전공부또는 불교강좌를 듣기 위해서이다. 라디오를 통해서 들리는 불교강좌는 여섯개의 감각기관 중에 특히 귀를 자극한다. 

 

귀에 들리는 강의를 듣다 보면 초기불교의 교리와 맞지 않은 부분을 상당히 많이 발견한다. 아무래도 선사들이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강의한 것이기 때문에 보는 방법의 차이라 보여진다. 그런 내용 중에 오온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불교강좌에서 그 스님은 오온을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설명하였다. 우리들은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몸은 지수화풍 사대로 구성되어 있어서 죽으면 모두 사원소로 흩어 없어질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몸을 몸뚱아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몸을 몸이라 부르지 않고 마치 속어 처럼 들리는 몸뚱이또는 몸뚱아리로 부르는 것은 법문을 하는 스님들의 공통적인 언어처럼 보여진다. 그 이면에는 몸을 혐오 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늙고 병들고 추한 몸을 벗어 버리고 새몸을 받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몸은 무상한 것이지만 정신은 변치 않는 것으로 생각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몸은 무상하고 정신이나 마음, 영혼은 불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온에서 정신작용인 수상행식에 대한 해석도 초기불교와 다르다.

 

행(行)을 행동으로, 식(識)을 분별로

 

대승불교의 선사들은 수상행식을 설명할 때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 있다. 그 좋은 예가 꽃을 보았을 때 정신작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고(),

그 꽃이 장미꽃인지 국화꽃인지의 판별작업에 들어가고(),

그 꽃을 꺽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

그 꽃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기억에 저장()한다.

 

 

이런 과정이 선사들의 법문에 있어서 오온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방식이다. 오온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발생순서대로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방식은 불교강좌 시간에 강의 하는 스님도 예외 없이 이런 설명방식을 들었다.

 

색이 몸뚱아리이고, 수와 상은 느낌과 인식작용이라고 하는 것까지는 초기불교의교리와 맞는다고 쳐도 그 다음인 행과 식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 방송에서 그 스님은 행온의 행을 행동이라고 설명하였다. , 보고 느끼고 알고 난 다음 행위에 들어 가기 때문에 행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한자어 다닐 ()’자가 행위 내지 행동과 연상되어서 한 말일 것이다. 또 하나는 식온에 관한 것이다.

 

그 스님은 오온에서 식온의 식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보고 느끼고 알고 행동하는 것 자체를 분별하는 마음으로 본 것이다. 식을 알음알이라고도 하는데 대체적으로 선사들은 이를 분별하여 망상을 일으키는 번뇌의 원인으로 보는 듯하다.

 

아뢰야식이 텅텅비게 되었을 때

 

선사들은 이처럼 오온을 설명할 때 몸과 마음으로 이분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변치 않는 본마음과 생멸하는 번뇌 망상과 같은 알음알이로서의 마음이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마음을 보는 것은 대승기신론에 잘 설명되어 있다.

 

 대승기신론에서 하나의 마음(一心)이 진여문과 생멸문의 나누어 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진여문은 변치 않는 본마음이고, 생멸문은 육근이 육경과 부딫칠 때 생멸하는 마음으로서 아뢰야식에 저장되고, 이는 번뇌 망상과 같은 마음이어서 세세생생윤회하는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를 그치려면 아뢰야식에 저장 되어 있는 마음의 찌꺼기들을 비워 내야 한다. 그렇게 아뢰야식이 텅텅비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생멸하는 번뇌 망상이 끊어 졌을 때, 진여의 마음과 같아 지기 때문에 결국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지가 되려면 분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선사는 오온에서 수상행식의 정신을 설명할 때 꽃을 보았을 때의 행동과 같이 순차적으로 마음이 작용 하는 것으로 보고 최종적으로 식이라는 것을 분별하는 마음으로 본 것이다.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이와 다르게 설명한다.

 

마음과 마음부수

 

초기불교에서 오온은 다섯가지 무더기를 말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해 하여 보면 크게 다섯가지 무더기가 쌓여서 이루어진 정신과 물질로 보는 것이다. 이때 정신을 빠알리어로 나마(nāma)’라 하고, 물질을 루빠(rūpa)’라 한다. 그래서 순서도 나마가 먼저 나오고 루빠가 뒤에 따라 나마루빠(nāma-rūpa)’가 된다.

 

정신물질에서 루빠를 한자어로 색()이라고 표현 하지만 선사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몸뚱아리로 보지 않는다. 루빠는 몸뚱아리가 아닌 단지 물질의 무더기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의 작용 또한 선사들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

 

선사들은 수상행식을 하나의 정신으로 뭉뚱거려 순차적인식과정으로 설명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마음마음부수(cetasika, 心所, mental factor)’로 나누어 설명하고 동시발생적으로 본다. , 수상행은 마음부수의 무더기로 보고, 식은 알음알이의 무더기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영원한 자아가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고, 자아나 영혼이라는 개념을 부수기 위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빠알리어로 상카라(sakhārā)

 

방송에서 오온을 설명할 때 행온에 대하여 행동이라고 설명한 것은 초기불교의 교학을 몰랐기 때문이라 본다. 그렇다면 행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부처님이 말씀하신 한자어 행()은 빠알리어로 상카라(sakhārā)’라 한다. 이는 불교용어 중에 우리말로 번역하기 가장 어려운 술어라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원어 그대로 상카라라고 사용한다. 이 상카라에 대한 설명을 빠알리사전의 주해서에서 참고 하였다.

 

 

‘행()’으로 번역한 상카라(sakhāra) sam(함께)+kr(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써,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 어근 √kr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려서 중국에서 행()으로 번역했다.

 

이 상카라는 우리말로 번역하기 가장 어려운 불교술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문맥에 따라 행(), 의도적 행위나 작용, 형성된 것이나 유위법(有爲法), 업형성력, 마음의 작용들 등으로 달리 해석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행이나 업형성력으로 번역하고 있다. 상카라는 크게 다음 네 가지 의미로 나타난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의 문맥에서 제행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인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有爲法, sakhata-dhammā)을 말한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과 정신의 모든 유위법들을 행(sakhāra)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에 행은 ‘형성된 것들’에 가까운 뜻이다. 그 외 수명의 행(ayu-sakhāra), 존재의 행(bhava-sakhāra), 생명의 행(jivita-sakhāra)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경우도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영역은 formations이라고 한다.

 

(2) 오온의 네 번째인 행온(行蘊)이다. 이 경우에도 항상 복수로 쓰인다. 오온 가운데서 색()은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물질(rūpa)이고 수(), (), ()은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마음의 작용(cetasika)이고 식()은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마음(citta)이다. 그러므로 오온에서 행은 아비담마에 나오는 52가지 마음의 작용 가운데서 느낌()과 상()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의 작용을 뜻하는데 감각접촉(phassa), 의도(cetanā), 주의 기울임(manasikāra), 집중(ekaggatā), 의욕(chanda), 선한 마음(kusala-citta), 불선한 마음(akusala-citta)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행은 ‘마음의 작용들’로 이해해야 한다. 영역은 mental activities 또는 mental formations라고 한다.

 

(3)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 즉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난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데「청정도론」에서는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khā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로 설명이 되듯이 ‘업지음, 업형성력, 의도적 행위’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상카라는 업(kamma)이라는 뜻으로 쓰였고, 이는 의도(cetanā)와 동의어로 간주한다. 영역은 kamma-formations, volitional activities라고 한다.

 

(4)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身行), 구행(口行), 의행(意行)으로 나타난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삼행(三行) 12연기의 행처럼 업의 형성력 즉 의도적 행위로 이해한다. 그래서 신행, 구행, 의행은 각각 신업, 구업, 의업의 삼업(三業)과 일치한다. 영역은 activity라고 한다.

 

 (주해모음, 빠알리 사전, 김한상 역주)

 

 

이 주해서는 스리랑카에 유학중에 있는 김한상(필명 수마나)님의 빠알리사전의 주해모음에서 가져 온 것이다. 이 주해서는 수카또야 카페 (http://cafe.daum.net/sukhatawya?t__nil_cafemy=item) 에서 퍼 왔는데, 그 카페지기는 초기불교를 알리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퍼갈 수 있도록 법보시한 것이다.

 

 

주해모음(김한상_역주).hwp

 

 

주해서에서 오온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상카라는 행동이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52가지 마음부수(마음의 작용)의 총칭을 말한다. 52법 중에 느낌과 인식도 들어가 있는데, 52가지 중에서도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따로 떼어 내서 설명하다 보니 수온과 상온이 된 것이다. 따라서 행온에서 2가지가 떨어져 나가 50가지 마음부수들을 총칭하는 무더기를 행온으로 보는 것이다.

 

법구경 1번과 2번 게송에서

 

이처럼 수상행은 마음부수이고, 식은 마음으로 보는데 대상을 인식하였을 때 순차적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수상행식은 반드시 함께 일어나고 함께 소멸한다. 다만 마음이 마음부수 보다 앞서 가는 것으로 표현할 뿐이다. 그런 좋은 예가 법구경의 1번과 2번 게송일 것이다.

 

 

 

Manopubbangmā dhamma        마노뿝방가마 담마

manosetthā manomayā            마노셋타 마노마야

manasā ce padutthena             마나사 쩻 빠둣테나

bhāsati va karoti va                 바사띠 와 까로띠 와

tato nam dukkamanveti             따또 낭 둑카만웨띠

cakkamva vahato padam.        짝깡와 와하또 빠당

 

마음이 그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네.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둑카(괴로움)가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법구경 1번 게송)

 

 

 

Manopubbangmā dhamma        마노뿝방가마 담마

manosetthā manomayā            마노셋타 마노마야

manasā ce pasannena            마나사 쩨 빠산네나

bhāsati va karoti va                바사띠 와 까로띠 와

tato nam sukhamanveti            따또 낭 수카만웨띠

chāyāva anapāyini.                차야와 아나빠이니

 

마음이 그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 반드시 행복이 뒤따른다.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떠나지 않듯이.

(법구경 2번 게송)

 

 

 

법구경 1번과 2번 게송 빠알리어 음악챈팅

 

 

 

 

챈팅; 위사라드 스리마 라뜨나야까(V.S. Ratnayaka)

 

 

 

 

법구경의 1번과 2번 게송에서 마음이 앞서가고 그 뒤를 마음부수(구경법, 담마)가 따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마하시사야도12연기 법문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이 것은 마음과 마음부수가 동시발생적으로 보지만 마음이 앞서고 그 뒤를 따라 가는 것을 마음부수로 보는데, 이는 왕이 가는 곳에 신하가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로도 설명한다. 또 이를 24가지 조건(빳짜야, paccaya)중의 하나인 구생연(함께 생긴 조건, 俱生緣, sahajāta-paccaya)’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는 대승불교와 달리 오온은 순차적으로 일어 나는 것이 아닌동시발생적으로 본다. 따라서 마음과 마음부수는 동시발생, 동시소멸로 보기 때문에 동시적 인식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는 속도는 다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정신은 물질보다 생멸하는 속도가 16배 또는 17배 빠르게 보기 때문이다. 즉 물질이 한 번 일어 날때 16번 내지 17번의 마음의 인식작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부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물질의 무더기, 느낌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상카라의 무더기, 알음알이의 무더기 이렇게 다섯무더기로 분해 하여 설명한 것은 무더기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 한 이 몸과 마음을 나, 나의 것, 자아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이를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다.

 

상카라들이 생멸하는 현상을 보면서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 것을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지도 않고, 거기에서 즐거움도 찾지 말라고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말씀 하였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오온은 무아이므로 집착하지 말고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수행하라고 하였다.

 

 

 

물질은 거품 덩어리 같고

느낌은 물거품 같고

지각은 아지랑이 같고

형성은 파초 둥치 같고

의식은 마술과 같다.

이와 같이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그러나 찬찬히 관찰하고

주의 깊게 조사하여 보면

그것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는 것이네.

 

부지런한 정진력으로

이와같이 오온을 관찰하여야 한다.

낮이든 밤이든 마음챙김으로 알아차려라.

 

모든 속박을 끊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

불멸의 길을 열망하면서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하여라.

 

(상윳따 니까야 22 칸다)

 

 

 

 

 

사진 http://www.buddhistdoor.com/download/wallpaper_eng.html

 

 

 

 

 

 

2010-12-20

진흙속의연꽃

 

주해모음(김한상_역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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