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무아윤회가 모순이라고?, 사념처수행에만 관심있는 외도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2. 26. 13:42

 

 

 

무아윤회가 모순이라고?, 사념처수행에만 관심있는 외도들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나서 기대하는 것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올린 글이 널리 퍼져 나가서 많이 읽히기를 바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글에 대한 추천과 댓글을 바라는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보는 이들의 자발적 참여의 결과물이다.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글을 보기만 할 뿐 댓글을 달 여유를 갖지 못한다. 모든 것이 빨리 빨리 움직이는 세상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하거나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글에 영향을 받은 경우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의 의견을 내 놓기 마련이다. 그런 의견 중에는 소박하고 단순한 의견도 있는가 하면, 본문 보다 더 긴 감명깊은 내용도 있다. 그런데 종종 올린 글에 대한 시비성 글도 종종 볼 수 있다.

 

무아윤회가 모순이라고

 

그런 글 중 무아윤회에 대한 부정의 글이 종종 올라 온다. 무아와 윤회에 대하여 부정의 논리를 펴는데, 그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울산대 김진교수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김진교수는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학자인데 주로 무아와 윤회의 모순에 대하여 설명하는 글이 인터넷에 떠 돌아 다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영향을 받아서일까 불교카페의 간판을 걸고 활동하는 그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공통적으로 윤회를 부정하고, 오로지 사념처수행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일종의 단멸론자들이라 볼 수 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어느 불교카페에 올려져 있는 내용 중 일부를 옮겼다.  

 

 

앞의 먼저 죽은 사람과, 뒤의 태어난 누군가에게 동일성이나 연속성이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런데 뒤의 태어난 사람은 태어나서 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뿌려 놓은 업력의 영향력, -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업력은 앞과 뒤를 이어준다. 이게 업의 연속성이다.

이걸 논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게 바로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모순이다.

 

그들은 거기에 모순은 없다고 한다. 맹목적으로 믿으니까 모순은 사라진다고 느끼는 것이다.

신앙의 영향력하에 들어가 버릴때 거기엔 합리적인 논리라고는 존재할 수 없는 맹신의 영역에 갇혀 버리게 되는 것이다.

(http://cafe.daum.net/chobul, (스크랩)상단견론에 대하여)

 

 

위 글은 초기불교 카페에 올려져 있는 글로서 초기불교에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윤회를 부정하고 오로지 사념처 가르침만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쓴 글이다.

 

이들 주장의 내용은 오로지 이 육신이 살아 있을 때 육근이 육경으로 부딪침으로 한 인식하는 세상만이 의미가 있을 뿐 인식을 벗어난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희론으로 여긴다. 따라서 부처님의 84천 법문 모두를 곧이 곧대로 믿는 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특히 경전에 지옥이나 천상에 대한 묘사, 목신이나 천신등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천안통 천이통과 같은 신통에 대한 묘사등이 경에 포함 되어 있으면 후대사람들이 각색하여 삽입해 놓은 것으로 의심한다.

 

그러다 보니 믿을 것은 자신의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관찰하여 수행하는 사념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념처 수행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나머지는 신앙의 영역으로 간주하여 맹신한다고 비판한다. 사념처 외의 가르침은 모조리 신앙의 영역으로 치부 하는 그들을 과연 불자로 볼 수 있을까.

 

불교와 이단

 

불교에는 이단이라는 말이 없다. 대신 3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에 맞으면 불교이고, 맞지 않으면 불교가 아니다라고 하는 판별방식이 있다. 이처럼  삼법인을 잣대로 활용하다 보니 경전을 무시하는 경우가 허다 하다. 또 경전의 내용은 뗏목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경전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 하기도 한다.

 

그 결과 니까야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승보살사상과 공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수 많은 경전이 만들어졌다. 시대가 요청하면 누구나 경전을 만들어 그 시대와 소통할 수 있고, 또 해당 지역의 문화와 정서를 고려 하여 위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무상, , 무아의 3특상을 특징으로 하는 테라와다 불교의 경우 비교적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부처님당시 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고, 수 차례의 결집을 통하여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빠알리 삼장이 완성 된 것이다.

 

이런 빠알리 삼장의 특징은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장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을 해 놓은 논장과 주석서, 그리고 계율과 관련된 율장 이렇게 세가지 모두를 동등하게 중요시 하게 여기고 있다.

 

따라서 빠알리 삼장에 따라 승가가 유지 되고 불자들이 신행생활을 하는 것은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특히 율장에 따른 승가는 부처님 당시와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테라와다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에 이단이 있다면 독자적으로 법을 해석하는 집단일 것이다.

 

아소까대왕 당시 3차 결집을 통하여 빠알리 삼장이 공인되었다. 그리고 스리랑카를 포함하여 10개국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부처님법을 적극적으로 전법하였다. 따라서 빠알리 삼장과 어긋난 주장을 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이단이다. 빠알리삼장의 내용을 의심하거나 자의적 해석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윤회를 부정하고 사념처만 주장하는 자들 역시 이단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설한 84천 법문에 대하여 극히 일부분만을 취하여 그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식을 벗어난 내용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비담마논장이나 청정도론 같은 주석서의 내용 또한 당연히 부정한다.

 

논쟁을 즐기는 자들의 여섯가지 행태

 

빠알리 삼장의 내용을 의심하고 자신의 취향대로 취사선택하는 집단들에게 종교성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그들은 논쟁적이어서 너의 길은 틀렸고, 나의 길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교리에 대한 논쟁을 예견해서 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초기경에서 말씀 하셨다.

 

 

논쟁의 여섯가지 뿌리가 있다. 무엇이 여섯인가?

 

분노와 원한을 가지고 있다.

혹독하고 자비가 없다.

시기심이 많고 인색하다.

교활하고 남을 속인다.

악의가 있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완고하고 집요하다.

 

이런 사람은 스승과(), 가르침(), 승가()에 대하여 존경이나 공경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행을 충실히 마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승가에 논쟁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을 해롭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맛지마 니까야:104 사마가마경 1-11)

 

 

이 경은 일아스님이 지은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에서 발견한 것이다. 책에서 이 경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평소에 논쟁을 일삼는 윤회부정론자나 단멸론자들이 벌이는 행태에 대한 내용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법에 대하여 의심을 하고 비난하는 외도들과의 논쟁이 치열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경에서 논쟁을 즐기는 자들의 여섯가지 행태를 보면 인터넷 토론사이트에서 보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특히 그들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고, 완고하고 집요하고, 혹독하고 자비가 없다는 경에 쓰여 있는 내용과 거의 들어 맞기 때문이다.  

 

회의론자들의 특징

 

이들 윤회부정론자나 단멸론자의 들은 부처님 법에 대하여 자의적 해석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은 취하고,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의심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회의론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불법승 삼보를 부정하는 것과 똑같다.

 

이런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여덟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부처님에 대한 의심이다.

둘째,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다.

셋째, 승가에 대한 의심이다.

넷째, 수행에 대한 의심이다.

다섯째, 과거에 대한 의심이다.

여섯째, 미래에 대한 의심이다.

일곱째, 과거와 미래 모두에 대한 의심이다.

여덟째,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다.

 

 

한 마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전반적인 의심이다. “부처님은 실제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분이었을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맹목적으로 믿도록 한 보통사람이 아니었을까?”와 같은 부처님에 대한 의심이 있다.

 

또 “도와 열반은 진정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을 보장 하는 것일까?”따위의 법에 대한 의심, “진정으로 번뇌에서 벗어난 성자(아리야, Ariya)는 있기나 한 것일까? 라는 승가에 대한 의심이 있다. 이는 결국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라 볼 수 있다.

 

“나는 과거에 존재 하였을까?”와 “나는 죽고 나서 존재 할 것인가?”같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심과 재생은 정말 업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 나는 것일까?”와 같이 연기법을 의심함으로써 윤회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불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한다면 진정한 불자로 볼 수 있을까. 만일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한다면 결코 를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수다원이 되려면 유신견을 타파해야 하고, 법에 대한 의심이 없어야하고, 잘못된 수행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법에 대한 의심에서 걸리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는 과정을 경전에서 수 없이말씀 하였다. 수다원의 경우 7생이내에 윤회를 벗어나 해탈열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부처님의 말씀은 모조리 거짓이 되고 만다.

 

그들은 오로지 현생에서 단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또 부처님의 84천법문은 모두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말한다. 육근으로 경험 되어 지는 법만 믿을 뿐이고 나머지는 그저 ()’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는 법을 자의 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여 법에 대하여 의심 하는 것은 자신의 인식의 한계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의 경계와 부처님의 제자들의 경계를 자신의 인식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행동이고 이는 불자인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불자가 되는 조건

 

불자가 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이는 초기경전에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것도 부처님말씀으로 규정되어 있는 불자가 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부처님, 재가신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나마, 붓다(부처님) 담마(가르침) 상가(승가)에 귀의하면 재가신도가 된다.”

 

부처님, 재가신도가 어떻게 해야 계행을 갖추는 것입니까?”

재가신도는 생명을 죽이지 않으며,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으며, 취하게 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렇게 재가신도는 계행을 갖춘다.”

(상윳따 니까야: 55 소따빳띠 상윳따 37)

 

 

 

 

사진 http://www.buddhistdoor.com/download/images/Bow_wallpaper_1024X768.jpg

 

 

 

초기경전에 부처님은 재가불자가 되는 조건을 두가지로 들었다. 하나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오계를 지키는 것이다. 이 중 삼보에 귀의 한다는 의미는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에 헌신(獻身)’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몸을 바쳐 삼보에 귀의를 맹세 할 때 테라와다불교전통의 경우 다음과 같이 한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두번째도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두번째도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두번째도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번째도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세번째도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세번째도 승가에 귀의합니다.

(쿳다까 니까야 : 쿳다까빠따 1)

 

 

삼보에 대한 헌신을 무려 세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믿음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과 부처님이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 그리고 그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부처님이 몸소 체험한 경지에 오른 성자(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에 대하여 헌신하는 믿음이다. 

 

이처럼 삼귀의와 오계를 지켰을 때 그 가 절에 나가든 나가지 않든 진정한 불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윤회와 연기법을 부정하고 오로지 사념처만 외치는 회의론자들을 어떻게보아야 할까.

 

한마디로 그들은 삼보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 단적인 예가 앞서 언급된 어느 네티즌의 글처럼 경전을 맹신한다거나, 가르침을 단지 종교영역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설령 그들이 불자라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잣대로 사량분별하여 적용 한다면 삼보를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온전히 받아 들여야 하는 이유

 

불자가 불법승삼보에 의존하지 않으면 어디에 의존해야 할까. 불자라면 불법승 삼보에 온전히 의지 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여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모두 다 받아 들여야 한다. 삼귀의에서 그런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가르침은 부처님에 의하여 잘 설해져 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직접 볼 수 있는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유익한 것이고, 지혜로운 이들에 의해 체득된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11 삭까 상윳따 1:3)

 

 

이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택해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받아 들였을 때의 내용이다. 그런데 단멸론자들은 이런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하여 그것은 지금 현재, 직접 볼 수 있는 것이고, “라는 구절을 사념처와 연관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펴는 것이다. , 현재 직접 볼 수 있는 것만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 외는 그저 논()이나 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결국 그 사람의인식의 문제

 

니까야의 모든 내용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것이다. 설령 목신이나 천신, 지옥이나 천상, 육신통에 관한 언급이 있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본다. 또 이를 해설해 놓은 논장이나 주석서 역시 동일한 가르침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것이라 하여 비불설 내지 모순이라 주장한다면 그 사람의 견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그 사람의인식의 문제라 볼 수 있다.

 

같은 공간을 살고 있는 개와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는 다르다. 개가 인식하는 세상은 육근 중에 특히 후각이 고도로 발달하여 코로 냄새 맡아서 인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박쥐 같은면 청각이 될 것이고, 두더지는 몸으로 인식하는 촉각이 더 발달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개와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호흡을 하며 살고 있어도 인식하는 세상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사람 역시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와 같은 어린아이일 때와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 인식하는 세상이 다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인식하는 세상과 범부들이 인식하는 세상 또한 같을리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나 아라한 처럼 깨달은 경지에서 인식하는 세상과 탐진치에 절여 사는 범부들이 인식하는 세상과 다를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통하여 인식을 넓혀 가는 것이라 본다. 따라서 범부가 수다원이 되었을 때 최대 7생 이내에 아라한의 경지에 올라가 해탈하게 된다고 한다.

 

대림스님의 발판론

 

이처럼 인식과정은 모두 다르고 이번 생에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지 못하면 다음생을 기약해야 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의 해제에서 대림스님은 이번 생에 최소한 발판이라도 마련해 놓자고 하였다.

 

이런 발판론을 뒷받침할만한 게송이 있다. 청정도론 서문에 5세기 붓다고사 비구가 초기경전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게송일 것이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상윳따 니까야 S.i.13)

 

 

여기에서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타고난것을 말한다. 이는 전생에 있어서 수행의 결과가 현생에 반영 된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하여 대림스님은 이를 학이지(學而知)’가 아닌 생이지(生而知)’로 해석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라는 내용 때문이다.

 

이는 전생에 수행을 많이 하여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학습을 통하여 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타고 났기 때문에 계에 굳건히 머문다고 표현 하였다. 이처럼 경전의 도처에 윤회와 전생, 통찰지, 해탈, 열반이 서로 복합적으로 언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삼보에 귀의 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그런 가르침을 의심하고, 이를 단지 종교적 맹신으로 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식의 잣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판별한다면 그는 불자가 아니라 외도일 것이다.

 

그가 부처님을 들먹이며 사념처법문을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삼보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외도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현상은 수행처에서도 볼 수 있다.

 

수녀는 왜 개종을 하지 않았을까

 

요즘은 위빠사나 수행이 많이 보급 되어 있어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수련을 받을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은 종교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련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지도를 받을 수 있다.

 

어느 수행센터에서는 불교의식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유 중의 하나는 불자들 뿐만 아니라 타종교 신자도 많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법문이나 인터뷰를 하다 보면 부처님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법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불교 수행처에서 윤회를 부정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교를 알면 알 수록, 수행이 깊어지면 질 수록 경전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더욱 더 와 닿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윤회가 확실하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 수행처에서 수녀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 수녀는 타 수행자들과 똑 같이 경행하고 똑 같이 좌선하는데, 성직자라 그런지 더 잘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수녀가 불교르 개종하기를 기대하기는 무리이다. 그 수녀는 단지 수행기법만 배우러 왔을 뿐이다.

 

그 수녀는 불교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아라한이 되는 과정과 필수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하는 윤회와 12연기 법문을 들었지만 그녀가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불교로 개종하는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사념처의 신수심법에 관한 내용은 매우 유익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념처에는 윤회나 전생에 관한 내용은 없고 오로지 호흡을 관찰하는등 육근이 경험하는 내용들만 있기 때문이다.

 

요즘의 위빠사나 수행센터는 이처럼 수녀와 같은 타종교인도 수행을 하는 곳이다. 실제로 전 세계적인 수행센터를 두고 있는 유명한 위빠사나 수행센터의 경우 불자보다 타종교인이나 일반인들이 다수라 한다. 그런데 한 번 수행을 맛을 보면 평생가기 때문에 자연스런 전법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불교수행에만 관심이 있는 그들

 

요즘은 공무원 연수나 기관, 단체등에서 위빠사나 수행 프로그램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알고 지내는 법우님의 경우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위빠사나 프로그램이 있어서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처럼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에서  윤회나 전생, 해탈, 열반등 불교의 전반적인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대신 사념처 수행기법위주로 진행될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시중의 요가나 단월드와 같은 명상프그램과 다름 없다. 따라서 단체에서 시행하는 사념처 수행은 수행 그 자체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 부처님의 가르침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상프로그램성격의 사념처에 대하여 회의론자들은 육근이 경험하는 것 외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지 희론으로 여긴다. 그리고 명상프로그램성격의 사념처를 제외한 모든 경전에 대하여 맹신한다느니, 가르침을 종교성으로 본다느니, 무아윤회는 모순이라느니 하는 따위의 사적인 삿된견해를 말한다. 이 것은 명백한 인식의 문제이다.

 

같은 공간에 사는 개와 사람이 인식하는 것이 다르듯이, 범부와 부처님이 인식하는 세상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범부의 눈으로, 범부의 깜냥으로 인식하여 정득각자의 법을 판단 하는 것은 대단히 경솔한 행위이다. 

 

그들이 삼보를 믿는 진정한 불자라면 그와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설령 그들이 불자임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모순에 빠진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진정한 불자라 볼 수 없고, 단지 불교수행에만 관심이 있는 외도들일 뿐이다 

 

 

 

2010-12-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