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불안티와 현대판손오공들, 왜 심장토대(hadaya-vatthu)인가
“믿싸옵니다”예배시간에 듣던 말이다. 고교시절 미션스쿨에 배정되어 다닐 때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두손을 꼭 마주잡고 머리를 숙이며 목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연신 “믿싸옵니다”를 남발하고 있었다.
불교적믿음이란
모든 종교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 믿음도 여러 종류가 있다. ‘맹신’이 있는가 하면 ‘확신’도 있고, 의심반 믿음반인 ‘반신반의’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는 맹신에 가깝다. 그렇게 맹신하는 이유는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바탕을 둔 경우도 있고, 또는 종교적 권위에 그대로 따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다르다.
불교에서는 창조주나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이다.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보고, 또 항상 변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설령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천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천신은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변화하는 신’일 따름이다.
또 불교는 절대자나 창조주, 자재신등과 같은 전지전능하고 늘 인간사를 지켜 보는 신이 없기 때문에 신으로 부터 해방된 종교이다. 따라서 마음껏 사유할 수 있어서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가 가능하였다. 이처럼 고도의 이성적 사유로 탄생된 종교가 불교인데, 그런 불교적 믿음은 무조건 눈을 감고 믿는 맹신이 아니라, 이성적 사유에 따른 합리적 믿음이다. 그런 믿음을 빠알리어로 ‘삿다(saddha)’라 한다.
아상가 교수가 말하는 ‘삿다(saddha)’
불교적믿음인 삿다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스리랑카의 아상가교수는 불교tv의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삿다는 유일신교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믿음을 말한다. 즉,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에서 고통과 고통의 소멸및 해탈로 가는 길과 같이 “이길로 가면 해탈열반 하리라”는 미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성가 교수,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18)>
불교적 믿음은 다름이 아니라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대로 실행하면 고통에서 해방되고 해탈과 열반이 실현 되리라는 확신에 찬 믿음을 말한다. 그런 믿음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상가 교수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실에 비추어 판단한 것이 타당할 때 우리들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적 믿음이란 합리적 믿음에 근거하여 “그렇군!” “이것이 옳은 것이군!” 하며 수긍하는 것이다.
<아성가 교수,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18)>
근거 있는 믿음이란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것이 일치 하였을 때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두면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음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두고 후회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을 두고 걱정한다면 괴롭다. 그러나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둔다면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고, 계 또한 자동적으로 지켜 질 수 있다. 이처럼 항상 알아차릴 것을 말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제로 일상에서 경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합리적 믿음이고, 이성적 믿음이고, 근거 있는 믿음이다.
이처럼 확신에 찬 믿음이 생겼을 때 붓다와 담마와 승가에 헌신하며 재가불자로서 삶을 살아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부처님이 설한 경전상의 모든 말씀과 그에 따른 논서, 주석서를 ‘의심없이’ 받아 들이게 된다. 설령 그 내용이 현대 과학적으로 입증을 할 수 없고,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 것일지라도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 들이고 존중하게 된다. 이런 믿음이 유일신교의 맹신과 같은 것이 아니라 불교적 믿음인 ‘삿다’인 것이다.
현대판 손오공들
우리 속담에 ‘부처님 손바닥위에서 노는 손오공’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잘 나고 학식이 많고 많은 것을 깨우쳤다고 할지라도 결국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판 손오공들이 날 뛰고 있는 것이 요즘 인터넷 카페나 게시판에서 볼 수 있다.
일명 초기불교안티들은 초기경전과 논장, 주석서를 비판한다. 다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에서 경전을 선별적으로 받아 들인다. 자신들의 인식밖에 있는 내용들은 옛날사람들이 작성한 하나의 ‘픽션’정도로 생각한다. 그 바탕에는 현대 과학문명에 대한 맹신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니까야나 아비담마,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가 과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입증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 결과 사념처와 관련된 것만 받아들이는데 이를 진정한 불교인이라 볼 수 있을까. 그런 그들이 가장 비판하는 것중의 하나가 ‘심장토대(hadaya-vatthu)’이다. 심장토대는 그들의 말대로 터무니 없는 것일까.
심장토대설을 비판하는 초기불교안티들은 단지 현대과학에 맞지 않는다는 선입견으로 이를 비판한다. 생각이나 마음이 ‘뇌’에서 나오지 심장을 토대로 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이를 객관적으로 증명가능한 과학적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단지 론(論)이고 설(說)일 뿐이라고 일축 하며, 과연 그런 것이 우리 실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고 말하면서 그런 이론을 믿는 것을 매우 어리석은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손오공
사진 : http://ask.nate.com/qna/view.html?n=8308384
자신의 깜냥에 비추어 보아
사람들은 자신의 깜냥에 비추어 자신의 인식 밖에 있는 것에 대하여 없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모른다고 해서,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과연 없는 것일까. 지구반대편에 사는 종족을 한번도 본적도 없고,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법을 체계화한 아비담마논장이나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에 쓰여 있는 ‘심장토대’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논서나 주석서에 쓰여진 내용은 철저하게 경전을 바탕으로 쓰여져 있다고 초기불교를 전법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하다 못해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어떤 대상을 보고 ‘미소’를 지었을 때, 이를 아비담마의 89가지 마음중의 하나인 ‘기쁨과 함께한 미소짓는 마음(30)’으로 분류해 놓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논장이나 주석서는 철저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한다. 따라서 모든 니까야의 모든 내용이 체계적으로 분류 되고 주석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하나도 빠뜨릴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심장토대’일 것이다.
마음은 뇌에 있을까, 심장에 있을까
심장토대란 무엇일까. 단순하게 말한다면 마음은 심장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뇌에 있지 않고 왜 심장에 있다고 말할까. 이 부분과 관련하여 초불(초기불교)안티들은 심장토대가 ‘엉터리’라고 말한다. 과학을 모르던 옛날 사람들이 단지 추론으로 만든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심장토대를 알려면 논장과 주석서를 참고 해야 한다. 다행히도 테라와다 전통의 아비담마논장과 청정도론이 우리말로 번역 되어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중 청정도론에서 심장토대에 대하여 언급된 부분이 12연기에 설명되어 있다. 그 것도 ‘정신물질(명색)을 조건으로 감각장소(육입)가 있다’라는 항목에서 이다. 어떤 내용일까. 일부를 옮겨 보았다.
무색계의 물질은 삶의 전개과정에서
어느 한 감각장소에게도 조건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섯무더기를 가진 존재에게는
재생연결에서 물질인 심장토대는
여섯번째 감각장소에게 여섯가지 조건이 된다,
근본물질들은 다섯가지 감각장소에게
차별없이 네 가지로 조건이 된다.
<청정도론 3권, 17장 통찰지의 토양>
청정도론에서 심장토대는 12연기와 관련되어 설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연기법은 조건법이기도 하므로 24가지 ‘빳짜야(paccaya, 조건)’로도 설명된다. . 이처럼 부처님법은 ‘연기법’과 관련이 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심장토대 역시 연기법과 관련 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노의 감각장소의 토대를 왜 심장이라 하였을까.
감각기관으로서 마노(마음)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무더기로 분해하여 설명하였다. 그렇게 해체 하여 놓고 보았을 때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또 우리의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 데 그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감각장소를 여섯 가지로 보았다.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 이렇게 여섯가지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마음도 눈과 귀처럼 감각기관으로 간주 한 것이다. 이런 감각기관으로서 마음을 빠알리어로 ‘마노(mano)’라 한다. 감각기관으로서 마노는 어디에 기반을 두어야 할까.
눈, 귀, 코등과 함께 마노 역시 감각기관이다. 이런 감각기관은 물질에 토대를 두는 것으로 부처님의 제자들은 설명하였다. 그런 물질은 몇가지가 있을까. 아비담마에서는 구경법을 82가지로 보고 있는데 그 중 물질과 관련된 구경법은 28가지이다. 그 28가지 안에는 10가지 추상적인 물질도 포함하고 있다.
28가지 근본물질과 심장토대
추상물질을 제외한 나머지가 구체적인 물질인데 이는 통찰 할 수 있다고 한다. 즉 ‘고유의 성질 (自性, sabhāva)’을 가지고 있어서 위빠사나 통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구경법으로서 근본물질은 다음과 같다.
물질(rūpa) | |
구체적인 물질(nipphana-rūpa)-18
1. 근본 물질(bhūta-rūpa) 1) 땅의 요소(地界, paṭhavī-dhātu) 2) 물의 요소(水界, āpo-dhātu) 3) 불의 요소(火界, tejo-dhāthu) 4) 바람의 요소(風界, vāyo-dhātu)
2. 감성 물질(pasāda-rūpa) 5) 눈의 감성(cakkhu-pasāda) 6) 귀의 감성(sota-pasāda) 7) 코의 감성(ghāna-pasāda) 8) 혀의 감성(jivhā-pasāda) 9) 몸의 감성(kāya-pasāda)
3. 대상의 물질(gocara-rūpa) 10) 물질(色, rūpa) 11. 소리(聲, sadda) 12. 냄새(香, gandha) 13. 맛(味, rasa) *감촉은 땅, 불, 바람의 3大임.
4. 성의 물질(bhāva-rūpa) 14) 여성(itthibhāva 혹은 itthatta) 15) 남성(pumbhāva혹은 purisatta)
5. 심장의 물질(hadaya-rūpa) 16) 심장토대(hadaya-vatthu)
6.생명의 물질(jīvita-rūpa) 17) 생명 기능(命根, jīvitindriya)
7. 음식의 물질(āhāra-rūpa) 18) 영양소(ojā)
|
추상적인 물질(anipphanna-rūpa)-10
8. 한정하는 물질(pariccheda-rūpa) 19) 허공의 요소(空界, ākāsa-dhātu)
9. 암시의 물질(viññatti-rūpa) 20) 몸의 암시(kāya-viññatti) 21) 말의 암시(vacī-viññatti)
10. 변화의 물질(vikāra-rūpa) 22) 물질의 가벼움 (rūpassa-lahutā) 23) 물질의 부드러움 (rūpassa-mudutā) 24) 물질의 적합함 rūpassa-kammaññatā)
11. 특징의 물질(lakkhaṇa-rūpa) 25) 생성(upacaya) 26) 상속(santati) 27) 쇠퇴(jaratā) 28) 무상함(aniccatā)
|
출처 ; 주해모음, 김한상 역주
표를 보면 여섯가지 감각기관의 토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눈에는 ‘눈의 감성(cakkhu-pasāda)’이 있고, 귀에는 ‘귀의 감성(sota-pasāda)’이 있고 , 마찬가지로 마노는 ‘심장토대(hadaya-vatthu)’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제자들은 마노라는 감각기관의 토대가 뇌가 아닌 심장으로 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뇌가 아닌 심장을 본 것은 근본물질 즉, 고유한 성질을 갖는 구경법(paramatta dhamma, 빠라맛따담마)으로 본 것이다.
왜 심장토대인가
이런 심장토대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에 다음과 같은 주석이 있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안식(眼識)과 이식(耳識)과 비식(鼻識)과 설식(舌識)과 신식(身識)은 각각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기관을 토대로 하지 않는 마음과 의식(意識)은 모두 심장토대(hadaya-vatthu)의 물질을 토대로 해서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심장토대는 심장 속에 있는 피의 반만큼의 양에 해당하는 피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심장자체는 아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현대 서양의 아비담마 학자들은 이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빨리 삼장에는 심장토대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고 주석서 문헌에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과 의식(意識)은 심장토대를 의지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아비담마의 정설이다. 그리고 뇌는 상좌부 불교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기관이다.
(마하시사야도 법문집 ‘12연기’ 주석에서, 김한상 역주)
주석의 설명과 같이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기관외 마음과 의식은 모두 심장토대로 일어난다고 부처님의 제자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양학자들은 이에 대한 이견을 제시하고 있는데 아마도 마음은 뇌에서 발현 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뇌는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는 기관이라 한다. 아마도 28가지 근본물질에서 빠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거미줄론’
주석에서 마노가 심장을 토대로 하는 이유는 피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12연기(paticca-samuppada, 빠띳짜사뭅빠다)’에서 찾을 수 있다.
거미는 파리를 잡기 위하여 그믈의 일종인 거미줄을 칩니다.. 거미는 태어난지 며칠만 되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태어난지 1년이 된 아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거미는 거미집의 중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줄에 걸리는 생명체는 모두 먹어 치우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왕가, 즉 의식은 거처로서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거처와 그 주변을 연결 하고 있는 거미집의 거미줄처럼 심장에 의하여 주입된 피가 혈관을 통해서 온 몸에 퍼집니다.
그리고는 눈에 있는 형상이 심장에 있는 바왕가를 자극하여 자극하면 그 것은 안문인식과정을 통해서 안식등으로 변환 됩니다. 그리고 나서 바왕가는 제자리로 돌아 옵니다. 소리와 냄새등에 대해서도 각각에 해당되는 감각기관과 함께 같은 방법으로 설명 될 수 있습니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12연기(paticca-samuppada, 빠띳짜사뭅빠다)’에서>
거미줄
사진 http://ask.nate.com/qna/view.html?n=5911415
논장과 주석서를 쓴 부처님의 제자들은 삼장에 ‘통달’한 사람들이다. 또 수행의 경지가 깊어 범부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경지에 다다랗음에 틀림 없다. 12연기를 법문한 ‘마하시(Mahasi, 1904~1982)사야도’ 역시 수행과 삼장의 대가라 한다.
마하시사야도에 관한 자료를 보면 12살에 출가하여 여러 경전을 섭렵해 1941년 ‘법사’자격을 얻었는데, 특히 그가 유명한 것은 전세계에 퍼져 있는 ‘마하시위빠사나’ 명상센터의 명성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삼장에 달통하고 수행까지 겸한 보기 드문 훌륭한 부처님의 제자가 설한 법문집에서 거미의 비유를 들어 심장토대를 설명하고 있다.
마하시사야도는 법문집에서 말하기를 의식은 심장을 거처로 하고 있는데 이는 심장에서 온 몸의 혈관을 이용하여 피를 주입하고, 또 다시 심장으로 되돌아 오듯이 눈, 귀, 코등으로 인식되는 안식, 이식, 비식등도 마노의 의지처인 심장으로 온 다고 보고 있다.
이는 현대인들이 뇌를 모든 인식의 중추기관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 그런 뇌도 심장에서 피를 공급해 주어야 유지 될 것이다. 만약 뇌에 피가 공급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죽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뇌는 죽었으나 심장이 움직인다면 그는 죽지 않았다고 본다. 이를 ‘뇌사상태’라 한다. 뇌사상태에서도 심장이 뛴다면 생명기능은 유지 되므로 뇌 보다 심장을 토대로 한 것은 아닐까.
삼장에 달통한 부처님의 제자들은
빠알리삼장에 통달하고 수행의 깊은 경지에 이른 부처님의 제자들은 논서와 수많은 주석서를 내 놓았다. 그런 내용 중에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심장토대’나 ‘재생연결’과 같은 불교적 용어가 있는데, 이를 자신들의 깜냥으로 이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픽션’이라 여기며 부처님법을 선별적으로 적용한다면 ‘회의론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불자들이 난해 하다고 여기고 있는 12연기에 있어서 재생연결식과 같은 이론을 부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5세기에 청정도론을 지은 붓다고사 비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으로 부터 생긴 물질을 봄으로써
보지 않은 물질도 알음알이를 조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청정도론 3권, 17장 통찰지의 토양>
이 말은 이미 생긴물질을 봄으로써 ‘추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생연결식 또한 볼 수는 없지만 지금 현재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이렇게 있음으로서 해서, 재생연결의 물질 또한 알음알이(식)를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정신물질(명색)을 조건으로 여섯가지감각장소(육입)가 일어날 때 마노라는 감각기관은 심장을 토대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심장은 단지 마노만의 토대가 아닌 눈, 코등 다섯가지 감각기관의 토대도 동시에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를 전 몸에 퍼져 있는 혈관에 피를 공급하고 또 빨아 들이는 역할로서 심장이 하고 있다고 마하시사여도는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 대하여 현대의 뇌과학자나 서양의 과학문물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이유는 초기불교의 교리를 정확하게 몰라서 일 것이다.
초기불교에도 안티가
예전에는 기독교에만 안티가 있는 줄 알았으나 초기불교가 보급되면서 새로운 안티들이 생겼다. 이를 어떤 이들은 ‘초불안티’라고 말한다. 이들 초불안티들의 특징은 윤회를 부정하고 오로지 사념처 수행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주장한다. 그러다 보니 무아와 윤회에 대하여 모순이라 주장하고 이를 ‘픽션’이라 칭한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을까”초불안티들이 흔히 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초기불교의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라고 볼 수 있다. 설령 조금 안다고 하더라도 ‘유아(有我)’론적 사고에 기인 할 수 도 있다.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데 나의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찰나 찰나 생멸을 거듭하여 조건지워져 발생하는 연기적 흐름으로 나를 보기 때문에 ‘무아’라 하는 것이다. 이를 단지 내가 없는 것으로 안다거나 어떤 불변하는 영혼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이는 초등학생이나 하는 소리일 것이다. 심장토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철학하자는 것인가
‘무아’없는 불교를 생각할 수 있을까, ‘윤회’ 없는 불교를 상상 할 수 있을까. 불교의 근본을 흔드는 주장은 결국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연기법이 없는 불교는 더 이상 종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불교가 종교가 아니라면 붓다, 담마, 상가와 같은 삼보에 귀의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단지 알아야 될 ‘교양’이고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안티들이 무아윤회를 부정한다는 것은 불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철학’을 하자는 것과 같다. 그들에게 철학으로서 불교는 있을지언정 종교로서 불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별적용하고 단지 ‘뗏목’으로 볼 뿐만 아니라 불법승삼보에 헌신하여 귀의 하는 것에 대하여 ‘맹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스로 무식을 폭로 하는
흔히 불교를는 깨달음의 종교라 한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모든 교학이나 수행은 해탈과 열반이라는 오로지 하나의 길로 가기 위하여 성립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교학과 수행은 연기법적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연기법을 떠나서 불교를 논한다는 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라 잡설(雜說)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이 불교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아는지, 또는 얼마나 많이 깨쳤는지에 대하여 그가 연기법적으로 말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아눌라’ 스님은 말 하였다.
마찬가지로 인터넷 카페에서 또는 토론 사이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 또한 얼마나 연기법적으로 말하는 지를 보면 상대방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아와 윤회는 모순이고 심장토대는 과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쓴 픽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무식을 폭로 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은 주장을 하려면 적어도 삼장을 이해하고 깊은 수행의 경지를 체득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2010-12-29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주와 보시는 어떻게 다를까, 최악의 보시와 최상의 보시 (0) | 2011.01.02 |
---|---|
지금여기(現今, dittheva dhamme, 現法)에서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0) | 2010.12.31 |
유럽 유일의 불교나라, 러시아 칼미키아(Kalmykia)공화국 (0) | 2010.12.27 |
크리스마스데이와 웨삭데이, 다음(Daum)의 종교차별정책 (0) | 2010.12.25 |
“나는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살처분과 공범자 (0) | 2010.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