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주와 보시는 어떻게 다를까, 최악의 보시와 최상의 보시
불교비하적 내용
시주와 보시는 어떻게 다를까. 같은 뜻 같기도 하면서 서로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은 이 용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럴경우 사전을 찾아 보는 것이 가장 빠르다. 요즘은 인터넷시대라 키워드 검색만 하면 즉석에서 알아 볼 수 있다. 먼저 ‘시주’에 대하여 키워드 검색을 해 보았다.
시주( 施主)
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절이나 중에게 물건을 베풀어 주는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
처음에는 시주 받으러 온 땡땡이중인 줄 알고 내쫓았고 다음은 서방님이 부재중이라 허행을 했습지요. 출처 : 박경리, 토지
검색결과는 다음(Daum)의 국어사전이다. 놀라운 것은 ‘불교비하’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스님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불교비하적인 ‘중’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예문을 든다는 것이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한 구절을 들었는데, 더욱 더 비하적 말인 ‘땡땡이중’이라고 표현하였다.
시주와 보시는 어떻게 다를까
똑같은 키워드로 네이버에서 검색하였으나 시주에 관한 뜻 풀이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구글에서 검색한 결과 불교인터넷신문인 ‘부다피아(buddhapia.com)’에 실려 있는 기사를 보았다. 1위로 등재된 내용을 보니 시주와 보시에 대하여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부다피아에 소개된 ‘시주와 보시’에 대한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시주(施主)란 본래 보시(布施)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것이 근래에 와전되면서 ‘시주’ 자체로서 ‘보시하다’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따라서 시주는 보시로 보아도 될 듯하다.
보시는 ‘준다’ ‘베푼다’는 뜻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첫 번째다. 보시에는 몇가지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널리 수용되고 있는 보시가 재물보시(財布施)·무외보시(無畏布施)·법보시(法布施)의 삼보시다.
(부다피아, http://bud.buddhapia.com/view/contents.asp?m_seq=99983655)
시주와 보시는 원래 다른단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주(施主)는 문자그대로 베푸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최근 시주라는 말이 ‘보시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주나 보시나 같은 의미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준다’ ‘베푼다’는 의미에서 시주라는 말 보다 보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런 보시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불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재보시(財布施), 법보시(法布施), 무외보시(無畏布施) 이 세가지 일 것이다. 이런 보시공덕에 대하여 초기경전을 참고하였다.
네가지 보시의 종류가 있는데
어느 경전이든지 ‘보시공덕’을 이야기한다. 특히 불자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금강경’에서 ‘무주상보시’와 그 공덕의 스케일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 보시에 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 보시에 관한 내용은 금강경에서 보는 삼천대천세계와 같은 우주적스케일은 아니다. 매우 교훈적이고 합리적이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그 내용은 무엇일까.
이어서 부처님은 아난다 존자에게 보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아난다, 보시의 청정에 네 가지 종류가 있다.
보시하는 자는 청정하고 받는 자는 청정하지 못한 보시,
보시하는 자는 청정하지 못하지만 받는 자는 청정한 보시,
보시하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청정하지 못한 보시,
보시하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청정한 보시.
(맛지마 니까야: 142 닥키나위방가 경 9-14)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설명한 보시의 종류가 네가지임을 알 수 있다. 보시하는자와 보시받는자 2인에 대하여 4가지 경우의 수가 나오는데, 이런 문구는 경전에서 자주 보는 정형구이다. 이처럼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서 설하기 때문에 불교는 과학적이고 때로 수학적인 종교라 한다.
네가지 경우의 수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막행막식하는 스님에게 보시하였을 때
첫째, 보시하는 자는 청정하고 받는 자는 청정하지 못한 보시의 경우이다. 이에 대하여 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계행을 지키는 사람이 계행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얻은 것을 기꺼이 보시하면
보시하는 사람의 계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하네.
(맛지마 니까야: 142 닥키나위방가 경 9-14)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철저히 지키는 재가불자가 ‘막행막식(莫行莫食)’하는 스님에게 보시하였을 때 그 보시의 효과에 대한 것이다.
술을 마신다든가 가게를 돌아 다니며 탁발행각을 한다거나 계를 가볍게 여겨 ‘반승반속’의 생활을 하는 스님들에게 보시 하였을 때 어떤 효과가 있을까.
계를 어기며 탁발행각을 하는 스님에게 보시한다는 것은 ‘거지’에게 보시하는 것과다름없다. 아니 그 보다 못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시하는 자의 삶이 청정하여 올바르게 얻은 것을 아낌 없이, 그리고 보시를 하면 큰 과보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아낌없이 보시 하였을 때, 비록 상대방이 청정하지 못한 자이지만 그 보시는 청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청정한 보시에 머물 뿐 공덕에 대한 말은 없는 것으로 보아 과보는 가져 오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더러운 돈을 보시하였을 때
둘째, 보시하는 자는 청정하지 못하지만 받는 자는 청정한 보시의 경우이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계행을 지키는 사람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이 없이
바르지 못하게 얻은 것을 마지못해 보시하면
받는 사람의 계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하네.
(맛지마 니까야: 142 닥키나위방가 경 9-14)
막행막식하며 오계를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감각적 욕망에 휘둘려 살아가는 재가불자가 청정하게 살아가는 수행자에게 보시하였을 경우이다.
그런데 그 보시자는 정당하게 번 것도 아니다. 또 보시를 한다고 해서 큰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저 돈 나가는 것을 아깝게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인등을 단다거나 49재등 보시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닥쳐서 어쩔 수 없이 돈이 나가게 되었을 때, 아마도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낄 것이다.
그런 돈을 청정한 수행자가 받았을 때 비록 더러운 돈이라 하더라도 그 보시는 청정하게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시하는자는 계행도 지키지 않고 더구나 바르게 번돈도 아니고 거기에다 마지못해 주었으므로 공덕에 대한 과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최악의 보시
셋째, 보시하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청정하지 못한 보시의 경우이다. 이 경우 ‘최악의 보시’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계행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도 없이
바르지 못하게 얻은 것을 마지못해 보시하면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둘 다 보시를 청정하게 하지 못하네.
(맛지마 니까야: 142 닥키나위방가 경 9-14)
비록 오계를 받은 재가불자라 하더라도 온갖 불법과 탈법을 저질러 재산을 모으고 감각적 욕망에 휘둘려 막행막식 하며 살아온 자가 역시 막행막식으로 살고 있는 청정하지 못한 스님에게 보시한 케이스이다.
인등이나 49재등과 같이 보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보시를 하긴 하였는데 큰 기대도 가지지 않고 다만 돈 나간 것에 대하여만 아깝게 생각한다면 그 보시는 어떤 것일까. 더구나 보시를 받는 스님 역시 ‘막행막식’하며 계를 어기며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떠할까. 이 경우 최악의 보시라 볼 수 있다.
계를 파한자에게 보시 하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자기에게 시물을 보시한 사람들에게 큰 결과를 생기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여러해 된 오물 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 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처럼 승(僧)과 속(俗)의 둘 모두로부터 제외된다.
(청정도론, 1장 계)
계를 파한자에 대하여 ‘오물 구덩이속’과 같고, 더구나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과 같아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청정도론에서 이어지는 표현을 보면 “비구라고 주장하지만 비구가 아닌 것이 마치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와 같다”라고 하였다.
언젠가 신도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스님을 목격한 적이 있다. 등산로 하산길에 있는 음식점이었는데, 머리에 모자를 썻지만 복장이라든가 겉으로 본 모습은 스님임에 분명하였다.
한편 술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중에 카페를 운영하는 여주인이 있었다. 그녀는 절에 다닌다고 하였다. 술과 웃음을 팔아 번 돈으로 절에 시주한 돈은 어떤 성격일까.
비록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 한자가 보시한다고 할지라도 보시를 받는자가 청정하다면 그 보시 또한 청정하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덕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보시를 한자나 보시를 받는자가 모두 청정하지 않고, 더구나 보시에 대한 과보의 믿음도 없이 마지 못해 보시 하였다면 그 보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마나한’ 보시가 최악의 보시라는 것이다.
진정한 보시는 무엇일까
넷째, 보시하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청정한 보시의 경우이다. 이 경우 최상의 보시라 볼 수 있다.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계행을 지키는 사람이 계행을 지키는 사람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얻은 것을 기꺼이 보시하면
그 보시는 커다란 과보를 가져온다고 나는 말하네.
(맛지마 니까야: 142 닥키나위방가 경 9-14)
오계를지키며 살아가는 재가불자가 보시를 하면서 그 과보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청정한 수행자에게 기꺼이 보시하였을 때, 커다란 공덕을 쌓기 때문에 최상의 보시로 본다. 그런 수행자는 어떤 경우일까.
글을 쓰면서 많은 네티즌들로 부터 글을 받는다. 그 중 어느 수행자를 알게 되었는데 그 수행자가 어느 날 선물을 하였다. 이메일로 ‘파일’을 보내 온 것이다. 이른바 ‘법보시’이다. 글을 쓸 때 참고하라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파일 대부분을 보내 준 것이다.
그 것은 ‘불교경전’이었다. 숫따니빠따, 법구경, 상윳따니까야등 무려 11종에 달하는 것이었다. 해외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책이 짐이 되기 때문에 노트북에 넣고 다니면서 본다고 하였다.
그런 법보시 파일에서 ‘보시’를 키워드로 검색하였다. 그 결과 어떤 보시가 최상인가, 누구에게 보시해야 공덕이 되는가에 대하여 찾을 수 있었다.
모든 맛 가운데 담마의 맛이
먼저 법구경에 언급된 보시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시 가운데 담마의 보시가 으뜸이요
모든 맛 가운데 담마의 맛이 으뜸이며
모든 즐거움 가운데 담마의 즐거움이 으뜸이요
욕망의 뿌리를 뽑아 모든 둑카를 다스리는 것이 으뜸가는 훌륭함이다.
(법구경 354, 거해스님역)
보시라 하면 일반적으로 재물보시를 뜻하지만 법구경에서 가장 으뜸 되는 보시가 ‘법보시’라 하였다. 이는 금강경에서 재보시보다 법보시공덕이 훨씬 더 크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법구경에서 보시에 대한 또다른 게송은 다음과 같다.
잡초가 밭을 망치듯
갈망이 중생을 망친다.
갈망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보시하면
풍부한 결과가 있다.
잡초가 밭을 망치듯
화내는 마음이 중생을 망친다.
화내는 마음을 벗어난 사람에게 보시하면
풍부한 결과가 있다.
잡초가 밭을 망치듯
어리석음이 중생을 망친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보시하면
풍부한 결과가 있다.
잡초가 밭을 망치듯
욕심이 중생을 망친다.
욕심을 벗어난 사람에게 보시하면
풍부한 결과가 있다.
(법구경 356~359, 거해스님역)
탐진치를 마음에서 몰아낸 사람, 즉 깨달은사람에게 보시하면 풍부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 말한다.
상윳따니까야에서
다음은 상윳따니까야에서 보시에 대한 내용이다.
[빠쎄나디] "세존이시여, 어디에 보시를 해야 합니까?"
[세존] "대왕이여, 마음이 고요하고 기쁜 곳에 보시를 해야 합니다."
[빠쎄나디] "그런데 세존이시여, 어디에 보시한 것이 큰 열매를 맵습니까?"
[세존] "대왕이여, '어디에 보시를 해야 합니까' 와 '어디에 보시한 것이 큰 열매를 맺습니까'는 다릅니다. 계율을 갖춘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은 큰 열매를 맺지만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세번째 품3. 3. 1 Puggalasuttaṃ , 활쏘기Issatthasuttaṃ.)
빠쎄나디왕이 부처님에 어디에 보시해야 큰 열매을 맺을 것인가에 대하여 물어 본 말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계’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은 제석천과 부처님의 대화이다.
[제석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에게 공덕을 기대하는 뭇삶들에게
공덕은 다시 태어남의 토대가 되리. 어디에 보시하면 커다란 열매를 맺는가?"
[세존] "길을 실천하고 있는 네 종류의 사람들과 지위를 성취한 네 종류의 사람들
이 무리들이 참 사람으로 지혜와 계행을 갖추었네.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에게 공덕을 기대하는 뭇삶들에게
공덕은 다시 태어날 토대가 되리. 참 사람에게 보시하면 커다란 얼매를 맺으리."
(상윳따니까야 바라문2. Upāsakavaggo. 7. 2. 1. , 즐길 만한 곳11. 2. 5. Rāmaṇeyyakasuttaṃ.)
제석천이 부처님에게 어디에 보시해야 최상의 열매을 맺을 것인가에 대하여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사쌍팔배의 성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다시 태어날 공덕을 쌓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계행과 지혜를 갖춘 성자들에게 보시하는 것은 커다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큰 과보, 마합팔라니(mahapphalāni)
다음으로 숫따니빠따의 보배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Ye puggalā aṭṭhasataṃ pasatthā 예 뿍갈라- 앗타사땅 빠삿타-
Cattāri etāni yugāni honti, 짯따-리 에따-니 유가-니 혼띠
Te dakkhiṇeyyā sugatassa sāvakā 떼 닥키네이야- 수가땃사 사-와까-
Etesu dinnāni mahapphalāni, 에떼수 딘나-니 마합팔라-니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네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이 있어
성자들로 찬양받을 만한 분들,
부처님의 제자로서 공양을 받을 만한 분들,
그들에게 보시하면 큰 공덕을 짓는다네!
상가는 이 세상 제일가는 보배!
이러한 진리로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숫따니빠따 제2장 작은 법문의 품 , 보배경 ratana-sutta, 6번 게송)
보배경 음악동영상, 6번 게송
Imme Ooi(黃慧音)창송, 진흙속의연꽃 제작
블로그에 여러차례 소개한 보배경(ratana-sutta, 보석경)에 대한 내용이다. 그 중 6번째 게송에서 보배로서의 상가에 보시하면 큰 공덕을 짓는 다고 하였다. 바로 공덕의 복밭인 네쌍의 여덟이 되는 사람들 즉, 사쌍팔배의 성자들이다.
이들 성자들에게 보시하면 ‘큰 과보’를 갖는다고 하였는데 빠알리어 게송중에 ‘마합팔라니(mahapphalāni)’가 그것이다.
한 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보시에 의하여 유지된다. 특히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원칙으로 살아가는 수행자들은 보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커다란 공덕을 짓는 것이고, 큰 과보를 가져 온다고 초기경전에서 말한다.
이렇게 큰 과보를 가져 오는 보시임에도 불구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 청정하지 않은 자가 더러운 돈으로 역시 계행을 지키지 않고 청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계를 지키고 정당하게 번돈으로 계를 지키며 살아가는 재가불자가 청정하게 살아가는 수행자에게 기꺼이 보시하면 커다란 공덕을 짓는 것이라고 경전의 도처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재보시 공덕도 좋은 일이지만 그 것 보다 더 훌륭한 것은 ‘법보시’일 것이다.
계를 파한 한 사람의 사기꾼이 출현하면 세상이 탁해지고, 계를 지킨 한 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세상이 향기로워진다고 하였다. 계를 지키는 청정한 수행자가 있어서 그 수행의 열매을 맺었을 때, 세상은 향기가 날 것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은 그것 자체가 법보시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열매를 중생들에게 ‘회향’한다면 최상의 법보시가 될 것이다.
사진: http://www.buddhistdoor.com/download/images/dhammapada285_1024X76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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