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정은 한 순간... 물거품과 같은것” 기억에 남는 명대사, 오오쿠(大奥)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 15. 10:34

 

 

 

정은 한 순간... 물거품과 같은것 기억에 남는 명대사, 오오쿠()에서

 

 

 

 

정은 한 순간...

 

하오나 살갗이 닿아 통한 정은 한 순간... 물거품과 진배 없을 것이옵니다.” 일본 역사드라마인 오오쿠()’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따르면 오오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오오쿠(, おおおく)는 에도 성 혼마루 구역에서 도쿠가와 쇼군의 처첩,생모,자녀 및 그를 따르는 시녀들이 거처하던 곳을 가리키는 말로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혈족(오와리, 기슈)의 내전에도 같은 호칭을 사용하였다. 본항목에서는 에도 성의 오오쿠만을 언급한다.

에도 성의 니시노마루(西)나 니노마루()에도 오오쿠와 비슷한 구역이 있어 비상시에는 오오쿠의 기능을 수행했다. 쇼군과 그의 미성년 아들, 주치의를 제외한 남성의 출입은 기본적으로 금지시켰다. 시녀의 수는 최전성기에는 1000명에서 3000명 사이로 전 세계 어느 궁정에도 지지 않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오오쿠는 도쿠가와 막부시절 에도성내에서 여성들이 생활하던 공간으로서 드라마에서 설명하는 숫자는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 오오쿠에서 여성들간의 궁중암투에 대한 이야기가 드라마 오오쿠이다.

 

2005년 후지TV에서 제작되어 그 때 당시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한 최고의 인기드라마이었던 오오쿠는 모두 10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川綱吉, 1646~1709)의 측실들간에 벌어진 궁중암투에 대한 이야기로서 인터넷에서 보기는 어렵지 않다.

 

 

 

 

에도성(江戶城)

에도 막부의 쇼군의 거처이며, 최고 정무기관이었다.

메이지 유신때에는 황실의 교토 어소가 에도 성으로 이전되어,

지금까지 황실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 드라마 오오쿠()에서 캡처

 

 

 

겐로쿠시대(元祿時代)

 

5대 쇼군인 츠나요시가 집권하던 시절인 1700년 전후의 일본은 최고의 안정된 시기이었다. 피비린내나던 전국시대가 끝난지도 100년이 지났기 때문에 도쿠가와 가문에 의한 질서가 형성되어 전쟁도 없었고, 서민들의 생활도 안정되어 우리나라의 영정조시대처럼 문화가 활짝 꽃이 핀 시기이었다.

 

특히 이시기를 역사적으로 겐로쿠시대(元祿時代, 1688~1704)’라 하는데 상업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여 교토, 오사카, 에도(토쿄)와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인들이 주도한 서민문화가 활짝 열린시대이었다. 또 이 시대에 인형극이나 가부키와 같은 극예술과 하이쿠와 같은 문학, 목판화(우키요에)와 같은 그림이 발달된 시대로서 도회지의 사람들은 삶의 여유와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서민문화의 융성 못지 않게 성내의 오오쿠 역시 화려한 문화가 펼쳐졌는데 그 주역은 다름아닌 개장군(犬公方)’이라 불리웠던 5대 쇼군인 츠나요시 시절이었다.

 

동물살상금지령과 개장군(犬公方)

 

츠나요시의 이미지는 우리나라의 연산군을 떠 올리게 한다. 정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측실을 두어 그 측실들간의 다툼이 드라마의 줄거리이지만, 츠나요시는 연산군과 달리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 개의 살상을 금하는 동물살상금지령(生類憐れみの)’을 내려 그유교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 이상정치를 실현코자 하였다. 그런 츠나요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고 한다.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았을 때 드라마 오오쿠에서의 츠나요시는 감각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한국판 연산군과 같다. 그런 그가 오오쿠내에서 궁녀들의 교육을 담당하며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쿄오토 출신의  에몬노스케에게 접근하여 측실로 삼으려한다.

 

그러자 세상의 이치를 잘 알고 있는 에몬노스케는 측실이 되어 달라는 츠나요시의 요청에 대하여 한 순간의 감각적 쾌락은 물거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이해시킨다.

 

 

 

 

 

 

드라마 오오쿠() 4

2005년 후지TV작품

 

 

 

밤의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

 

사람들은 한 순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다. 오로지 한 순간의 짜릿한 감각적 쾌락만을 위하여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 결과 세계 어느나라에서든지 밤의 문화가 발달되었다.

 

어떤 이는 밤의 문화에 종사하거나 밤의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전체인구의 십분의 일(1/10)정도 된다고 한다. 그와 같은 밤의 문화를 즐기는 이들은 어떤 부류일까.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유물론자들이라 볼 수 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유물론자들이 보는 사회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일어나는 일시적 현상으로 본다. 그 결과 내생에 대하여 생각이나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한 평생 즐기면서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어떤 도덕적 규범이나 가치도 그들에게 있어서 무용지물이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쾌락주의자들

 

그래서일까 무인무연론을 주장하는 유물론자  또는 단멸론자들은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부처님, 아짜라와띠 강에서 비구니들과 창녀들이 같은 여울에서 함께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창녀들이 비구니들을 놀리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젊은 나이에 청정한 수행을 하십니까? (지금은) 참으로 감각적 쾌락을 즐겨야 할 때 입니다. 늙었을 때 그 때 가서 청정한 수행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두 가지를 다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라고 놀렸습니다.

(마하왁가 8 2:15)

 

 

일생동안 비구니들에게 목욕옷을 보시하고자 발원한 재가불자인 위사카여인이 부처님에게 말한 내용이다. 목욕옷이 없어서 창녀들과 함께 강가에서 목욕을 하게된 비구니들이 창녀들로 부터 들은 말은 젊었을 때 즐기다가 늙어서 수행을 해도 늦지 않다는 모욕적인 말이다. 이는 감각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유물론자, 무인무연론자, 단멸론자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라 볼 수 있다.

 

죽어도 좋아

 

한 순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행위는 죽음도 불사한다. 그래서 죽어도 좋아라고 말한다. 즐기면서 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개 버릇 남 못준다라는 말이 있듯이 젊었을 때 즐기면서 살다 개과천선하여 늙어서 수행하면서 사는 경우는 매우 드믈다는 것이다.

 

한 번 형성된 성격은 고치기 쉽지 않다. 그 것은 숙세부터 이어져 온 축적된 성향때문이다. 따라서 젊어서 수행의 길로 들어간 비구나 비구니는 전생에서 선업을 쌓은 결과라 볼 수 있다. 이른바 생이지(生而知)를 말한다. 행위에 대한 두려움, 윤회에 대한 두려움을 알기에 여섯감각기관이 요구하는대로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이다.

 

이 밤이 새도록 마시고 또 마시어~”하며 밤의 문화에 종사하거나 밤의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 또는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를 외치는 사람들은 여섯감각기관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감각기관에 휘둘린 결과는 어떨까. 그 것은 짧은 행복에 이어지는 긴 고통과 같은 것이다.

 

그런 이치를 알기에 금강경에서도 행위에 대하여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번개불과 같고, 이슬과도 같다고 하였다.

 

이런 진리를 대부분 사람들은 후천적으로 알게 된다. 이를 학이지(學而知)라 한다. 학습효과에 따라 이치를 아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까지 값비싼 고통이라는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10가지 경계를 볼 수있는 사람은

 

죽어도 좋아!” 하며 한 순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감각적 쾌락만 물거품은 아니다. 흔히 행복이라는 것도 물거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초기경전에서 말한다. 특히 수행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현상을 위빠사나의 10가지 경계라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수행이 깊어 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고 한다. 그 것은 광명, 희열, 결심, 분발, 행복, 지혜, 확립, 평온, 욕구와 같은 10가지 경계이다. 이처럼 수승한 경지를 왜 경계하며 결함으로 볼까.

 

감각적 욕망이 물거품과 같은 것이라 여기며 수행을 통하여 얻은 수승한 경지임에도 불구하고 극복해야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10가지 경계는 아무에게나 나타나지 않은 현상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위빳사나의 경계는 진리를 통찰함에 이른 성스런 제자와 그릇되게 수행하는 자와 명상주제를 놓아버린 게으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바르게 수행하고 지속적으로 명상주제와 함께하는 위빳사나를 시작한 선남자에게 일어난다.

(청정도론, 위빳사나의 경계)

 

 

광명, 희열, 행복등 10가지 수승한 경지가 특별한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라 말한다. , 위빠사나 수행을 제대로 한 이에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인데 이 때 커다란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행중에 빛을 보게 되었을 때 대부분 확실히 나는 도에 이르렇고, 과에 이르렇다라고 생각하여 마치 깨달은 것인양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은 희열이나 행복, 평온등 10가지 경계를 맛볼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현상을 앉아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 역시 물거품 같은 것

 

과연 빛을 보고, 희열과 행복, 평온을 맛 보는 것이 궁극적 목적일까. 이런 현상에 대하여 도를 이루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청정도론에서 말한다. , 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와 도가 아닌 것을 구별해야 하는데 이를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이라 하고,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기 하였다.

 

 

숙련되고 슬기롭고 경륜이 있고 지성을 갖춘 수행자는 광명등이 일어날 때 나에게 이런 광명이 일어났구나. 그러나 이것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따라 일어났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고,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고,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통찰지로 한계를 정한뒤 면밀하게 조사한다.

(청정도론, 도와 도 아님의 구분)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극히 안정되어 빛과 함께 희열이 밀물듯이 밀려와 지극히 만족하여 최상의 행복감을 느낄 때 그 것을 즐기며 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몸과 마음에서 벌어진 하나의 현상으로 간주 하는 것이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기본적으로 무상하기 때문에 그런 행복감 역시 영원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런 행복감 역시 물거품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가슴에 오랫동안 남는 대사

 

이처럼 수행을 통하여 얻어진 행복마저도 물거품처럼 무상으로 바로 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물며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며 얻어진 즐거움 역시 더욱 더 물거품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오오쿠에서의 에몬노스케라는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시녀가 5대 쇼군인 츠나요시의 측실이 되어 줄것을 요청받았으나 하오나 살갗이 닿아 통한 정은 한 순간... 물거품과 진배 없을 것이옵니다.”라며 거절 한 것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서 한 말일 것이다.

 

이처럼 영화나 드라마의 한 대사가 가슴에 오랫동안 남는 경우가 있다.

 

 

 

2011-01-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