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한 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 악처(惡處)에서 선처(善處)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 18. 00:39

 

 

한 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 악처(惡處)에서 선처(善處)

 

 

 

인생의 절정에서

 

요즘 뉴스의 주제는 날씨에 관한 것이다. 뉴스의 거의 반을 추운 겨울날씨에 대한 것이고, 한결같은 이야기는 추위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삼한사온이 실종된지 오래되고 영하의 날씨 또한 내리 20여일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영하20도에 가까운 날씨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게 한다. 추위가 절정에 이르렀다면 이제 내려 가는 일만 남았다.

 

주식시세 또한 절정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천정이 뚫렸다고 이야기한다. 주가지수가 이미 2,100을 돌파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지만 투자자는 늘 불안할 것이다. 지수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제 떨어질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한 번 시세분출을 크게 한 후에 맥없이 고꾸라질 것임에 틀림 없다.

 

장관후보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 대부분은 투기꾼에 가깝다. 많이 배우고 지위가 높을수록 재테크 역시 프로선수와 같다. 이처럼 돈과 명예를 바탕으로 이제 권력까지 그들은 넘본다. 거기까지 올라 갈 동안 수 많은 경쟁자들을 밝고 일어섰을 것이고, 재산형성과정에서 부동산 투기등으로 온갖 불법과 탈법을 일삼아 쌓아 올린 재산은 노고 없이 형성된 불로소득이다. 인생의 정점에 이른 그들이 죽어서 가게 될 곳은 어디일까.

 

과일이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고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올라 갈 곳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이제 내려 가는 길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결국 파국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 것은 죽음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과일이 익으면 어느 날 떨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어난 존재들은

언젠가는 죽음에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이 따라다닌다.(576)

 

마치 옹기장이의 점토로 만든 그릇들이

마침내는 부서지듯이 죽어 부서지는 인생도 이와 같다.(577)

 

젊은이도 늙은이도 지혜로운 이도 어리석은 이도

모두 죽음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모든 존재들의 종착역은 죽음이다.(578)

(숫따니빠따)

 

 

과일이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고, 그릇은 깨지기 위해 존재 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의 종착지는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항상 죽을까봐 두려워 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죽음을 왜 두려워할까.

 

인식을 벗어난 세계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아마도 지옥을 염두에 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지옥은 여섯감각기관에 부딪치는 대상이 모두 혐오스럽고, 불쾌하고, 불만족 스럽고, 고통 뿐이라서 즐거움은 없고 괴로움만 가득찬 세계를 말한다. 그렇다면 지옥이란 실재하는 세계일까.

 

아비담마에 의하면 인식을 벗어난 외부의 세계는 우리 내부의 마음에 있는 여러 현상이 밖으로 반영 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 이 외부세계라는 것은 다름이 아닌 우리 마음에 있는 미세한 여러 계층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나 비실재로 외부세계를 이해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외부세계는 엄연히 실재 하며 객관적인 사실로 존재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외부세계는 항상 마음으로 이해 되는 세계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유형의 마음들이 외부로 부터 자신에게 나타나는 대상의 성질을 결정 한다고 한다. 따라서 마음이 없으면 외부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중생은 천상에 태어나고, 또 어떤 중생은 천상과 같이 특정한 세계에 태어 나는 것일까. 이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전생에 그가 그 세계에 태어나기에 적합한 업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세계와 마음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관점에서 본 다면 중생들이 사는 모든 세상은 중생들의 정신적인 행위가 만들어내고 지탱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이들 세계는 마음으로 하여금 새로운 환경 하에서 새로운 인격을 형성 하도록 향상을 계속 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실에서 느끼는 지옥

 

이처럼 지옥은 분명히 실재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 세계이기 때문에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런 지옥은 지금 이 순간에도 느낄 수 있다. 그 것은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할 때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이 혐오스러우면 불쾌해지고, 귀에 들리는 소리가 시끄러우면 기분이 나빠진다. 또 코로 똥 냄새를 맡는다든가, 혀로 쓴 맛을 느꼈을 때 역시 불쾌하고 불만족 스럽다. 극심한 추위나 뜨거운 여름에 고통스러운 것은 몸으로 느끼는 불만족 때문이다. 문득 생각나는 불쾌한 감정 또한 괴로움이다.

 

이 처럼 시도 때도 없이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하여 끊임 없이 고통을 느끼는 그 순간이 바로 지옥이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지옥은 여섯가지 감각기관에서 감각대상을 접할 때 즐거움은 없고 오로지 괴로움만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지옥중생들은 불구가 없다고 한다.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어야 고통을 모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반면에 천상에 사는 존재들은 여섯감각기관에서 느끼는 것이 오로지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이 없는 세계를 말한다. 인간은 어떨까.

 

인간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반반씩 느끼는데 일반적으로 즐거움이 괴로움보다 더 많다고 한다. 반면에 악처로 분류되는 아수라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더 많은 세계라 한다. 따라서 괴로움과 즐거움의 스펙트럼으로 인식을 벗어난 세계를 분류한다면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순으로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지옥에 떨어지면 영원히 끝나는 것일까.

 

기독교지옥과 불교지옥

 

기독교의 지옥관과 불교의 지옥은 서로 다르다. 기독교의 지옥은 한 번 떨어지면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신을 믿지 않는 자, 보기 싫은 놈, 미운 놈은 지옥에 처박아놓고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이 기독교의 지옥관이다.

 

반면 불교의 지옥은 때가 되면 빠져 나올 수 있다. 그것은 무상의 법칙때문이다. 형성되어진 모든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지옥에 태어나 고통받는 중생들 역시 이 다하면 그 곳으로 부터 빠져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죽어서 지옥으로 갈 바엔 기독교지옥보다 불교지옥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옥을 탈출 할 수 있을까.

 

선처에서 악처로

 

불교에서 세계를 선처와 악처로 나누고 있다. 선처는 인간을 포함하여 욕계천상과 색계, 무색계를 말한다. 악처는 불행하고, 비참하고, 처참한 곳을 말하는데 그 곳이 바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이다.

 

그런데 태어남이라 말을 했을 때 대부분 악처를 말한다. 선처에서 태어나기는 극히 드믄 일이라는 것이다. 설령 선처에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죽어서 거의 대부분 악처에서 태어나는데, 이유는 악처에서 태어나기에 적합한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는순간에 선처에서 어떻게 악처로 가게 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욕계 선처 가운데서 악업을 지은 자가 임종의 자리에 누울 때 “(과거에 자기가 지은 악업이) 그 때 덮친다(M.iii.164)”라고 시작하는 말씀 때문에 그가 쌓았던 그대로 악업 혹은 악업의 표상(nimitta)이 마노의 문(意門)을 통하여 나타난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비구는 철저하게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주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그 때 덮친다(M.iii.164)”라고 표현 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이 지은 과거 악업이나 악업의 표상이 죽음직전에 마음의 문을 통하여 떠 오르게 됨을 말한다. 이를 번뇌의 힘에 떠밀린 것으로 표현하였는데 좋은 예가 법구경에 나오는 쭌다수까리까 이야기 (The Story of Cundasukarika)’일 것이다.

 

쭌다수까리까는 백정이었다. 잔인하고 거친마음의 소유자인 그는 백정으로 55년을 살았는데 일생동안 단 한번도 선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고 한다. 죽기전 7일 동안 마치 돼지처럼 두 팔을 오무리고 꿀꿀거리고 꽥꽥 소리를 치기도 하였다. 사실 그는 살아 있을 때 지옥(Niraya)의 고통을 맛 본 것이다. 그 백정은 죽었고 아비지옥(Avici Niraya, 아위찌 니라야)에 곧바로 태어 났는데 그가 죽기직전에 본 것은 악업과 악업의 표상이었다. 그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서도 그는 비탄에 빠지고

다음 세상에서도 그는 비탄에 빠진다.

이처럼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양쪽 세상 모두에서 괴로움을 겪는다.

그가 더욱 괴로운 것은

고통을 겪으며 자기 악행을 보고 되새기는 것이다.

(법구경, 게송15)

 

 

 

 

 

 

 

 

악업을 지은자는 죽기 직전에 마치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는데, 그 것은 다름아닌 자기악행을 보고 되새기는 것이라 한다. 그 번뇌의 힘으로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선처에서 선처로

 

반면에 선처에서 선처로 가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인간에서 욕계천상이나 색계, 또는 무색계로 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선처에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을 쌓은 자가 임종의 자리에 누울 때 “(과거에 자기가 지은 선업이)그때 덮친다(M.iii.171)”라고 시작하는 말씀 때문에 그가 쌓았던 그대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이나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의 표상이 마노의 문을 통하여 나타난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선처에서 선처로 갈 때 역시 덮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처에서 태어날 만한 비난받지 않은 업을 지었기 때문에 그 업이나 업에 대한 표상이 일어나 그것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역시 법구경에 있다. 재가불자 담미까이야기(The Story of Dhammika Upasaka)가 그것이다.

 

사왓띠에 재가수행자 담미까라는 이름의 재가수행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매우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 또한 자선을 배풀기를 좋아 하는 다정다감한 남자이었는데, 주기적으로 또는 특별한 날을 잡아 비구들에게 음식과 필수품을 아낌 없이 공양 하였다. 그런 그가 죽음에 임박하여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화려하게 장식된 여섯개의 2륜수레를 보았다. 그 수레는 하늘에서 온 것으로 그를 하늘로 데려 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법구경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서도 그는 즐거워하고

다음 세상에서도 그는 즐거워한다.

이처럼 착한 행동을 한 사람은

양쪽 세상 모두에서 즐거워한다.

그가 더욱 즐거운 것은

즐거움을 누리며 자기 선행을 보고 되새기는 것이다.

(법구경, 16번 게송)

 

 

 

 

 

 

 

 

 

담미까는 죽어서 뚜시따(Tusita, 도솔천)’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런 그가 임종직전에 본 것은 자신의 선행이었다. 그 선행을 되새기면서 이미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천상에 태어난 것 역시 끊어지지 않은 번뇌의 힘에 떠밀려 간 것이다.

 

악처에서 선처로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이 어떻게 지옥을 탈출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악처에서 선처로 가는 경우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악처에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을 쌓은 자에게 앞서 설한 방법대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이나 업의 표상이 마노의 문으로 나타난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비록 지옥에서 고통받는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가 비난할 바 없는 업을 쌓았다면 선처에 태어 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비난 할 바 없는 업이란 무엇일까.

 

악처에서 고통만 받았다면 그는 과거에 지은 업의 과보를 충분히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한 편 남에게 고통을 주는 새로운 악업을 짓지 않았다면 비난할 바 없는 업을 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지옥중생들이 지옥을 탈출하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또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다른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은 미래에 겪어야 할 업(받는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업)으로 인해 천상에 태어난다. 왜냐하면 미래에 겪어야 할 업이 없이 윤회에 유전하는 중생이란 없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13장 초월지)

 

 

설령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업이 다하면 아직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업이 있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확정되지 않은 업이란 무엇일까.

 

 

업에는 네가지가 있다. 금생에 받는 업, 다음 생에 받는 업,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업, 효력을 상실한 업이다. 이중 확정되지 않은 업을 빠알리어로 아빠라빠라야 웨다니야 깜마(aprapariya vedaniya kamma)’라 한다.

 

아빠라빠라야 (aprapariya)또 다른을 뜻하는 아빠라(apara)가 두번 겹쳐서 ‘apara-apara’가 되고, 여기에 ‘-iya’어미가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로서 그 다음부터 계속해서'라는 의미라 한다. 이는 다음 생의 다음부터라는 뜻에서 세번째 생부터 받는 업이라는 의미라 한다.

 

이처럼 확정되지 않은 업과 아직 조건을 만나지 못하여 익지 못한 효력을 상실한 업(ahosi-kamma, 있었던 업)’으로 인하여 비록 지옥에 떨어졌다고 할지라도 과보가 다하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미래에 겪어야 할 업이 없이 윤회계를 유전하는 중생은 있을 수 없다는 대전제에 따른 것이다.

 

미래에 유전할 업이 없는 존재라면 아라한이 될 것이다. 아라한은 마음 속으로 부터 탐진치를 모두 내 몰아 내고, 대신 그 자리에 관용과 자애와 지혜로 가득채워져 있어서 미래에 태어날 업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악처에서 악처로

 

다음으로 악처에서 악처로 가는 것이다. 이는 악처에서 악업을 지은 자가 그 업이나 업의 표상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이 마노의 문이나 오문으로 악처에 태어날 원인인 대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악업을 지은 자는 악처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 세계는 불행하고, 비참하고, 처참한 세계를 말한다.

 

무상(無常)과 인과의 법칙

 

업이 남아 있는 한 삼계를 벗어 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지옥에 떨어진 중생이라고 할지라도 언젠가 지옥을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것은 청정도론에 표현 된 바와 같이 미래에 겪어야할 업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업이 완전히 소멸되면 더 이상 태어남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옥에서 갖은 고통을 다 받고 악업으로 인한 업이 소멸되면 아지도 남아 있는 업중에는 선업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래에 격어야 할 업이 남아 있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이고, 지옥에서 인간이나 천상과 같은 선처에서 태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점은 기독교의 지옥관과 명백히 다르다.

 

기독교의 지옥은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인데 이는 무상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형성되어진 모든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라 지옥중생도 선처에서 날 수 있는데, 기독교의 지옥은 영원하므로 이는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이름 붙여지고 명칭붙여진 것들은 무상의 법칙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지옥은 실재 하는 것이 아닌 개념으로만 또는 명칭으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지옥중생들은 여섯감각기관으로 느끼는 모든 것이 불쾌하고, 불만족 스럽고,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구제할 수 있을까. 만일 지옥중생들을 구제한다면 인과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그럴 경우 인과법칙이 뒤죽박죽되어 버리기 때문에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남의 업에 개입할 수도 없고 개입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선업공덕이 다 하면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고통이 다하면 즐거움도 따르게 되어 있다. 지금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지은 업이 익어간다고 생각하였을 때 악업의 소멸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선업만이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가난하게 살며 고생만 하다 한 평생을 보냈다고 할지라도 죽어서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지금 부와 명예와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할지라도 죽어서 곧바로 지옥에 태어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좋은 예가 다음과 같은 미얀마 속담일 것이다.

 

 

“범천에서 빛나더라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 거리네”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천상에서 빛나던 천신들도 수명과 선업공덕이 다 하면 인간으로도 태어나지 못하고 그 즉시 돼지와 같은 축생으로 태어나 꿀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2011-01-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