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마두삔디까숫따(Madhupindika Sutta, 꿀덩어리경)와 빠빤짜(papanca)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 21. 19:44

 

 

 

마두삔디까숫따(Madhupindika Sutta, 꿀덩어리경)와 빠빤짜(papanca)

 

 

 

 

선사들의 법문에서 한 생각일으키면 번뇌요 망상이니일절 번뇌망상을 짓지 말자고 말한다. 그런 번뇌와 망상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들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생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아눌라 스님의 법문을 음성파일 ([이해법문03_빠빤차] http://cafe.daum.net/kalyanamitta )로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망상이라고 하는 말은 빠알리어로 빠빤짜(papañca)라 한다. 빠빤짜란 무엇일까. 초기경전에 빠빤짜의 개념에 대하여 함축적으로 설명해 놓은 경이 이 있다고 한다. 그 경이름은 ‘마두삔디까숫따(Madhupindika Sutta, DN 21; AN 3.72; Sn 4.8.)’이고, 우리말로 꿀덩어리경이라 한다. 빠빤짜에 대한 아눌라 스님의 법문을 녹취하여 정리 하여 보았다.

 

 

Madhupindika Sutta.docx

 

 

빠빤짜(papañca)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부세계와 접촉하는데 이 것이 인식과정의 시작이다. 예를 들어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대상을 만났을 때 접촉이 일어 나는데 이 때 느낌도 함께 일어난다. 이 때의 인식과정은 능동이 아니라 피동이다. 따라서 비인칭이다. 아직까지 나라는 개념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저절로 일어나는데 나라는 비인칭이므로 내 생각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인칭은 느낌이 일어나는 시점까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비인칭이 떨어져 나가고 계획적이고 개인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내가 개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느낌이후에 벌어진다.

 

대상을 느끼는 순간 대상을 받아 들이게 되는데 이때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라는 세가지 느낌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느낌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 형성되는데 이는 프린트되어지는 것과 같다. 바로 이지점이 매우 중요하다. 위빠사나 명상을 할 때 바로 그 지점이 멈추어야 할 장소이다. 그리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사띠를 두어야 하는 곳이다.

 

사색망상이 일어나기 전에 보면 ’, 들으면 들음등으로 그 내용을 보지 말고, 6기관으로 들어 오는 인지작용의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해야할까. 왜냐하면 그 때 부터 번뇌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번뇌망상은 어떤 단계를 거쳐서 일어나게 될까.

 

눈으로 그림을 본다면, 받아들인 그림에 대하여 사색을 하게 된다. 소위 생각하는 단계가 여기에서 부터 시작된다. 인식되어진 그림에 대하여 사색하면서 점차 개념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렇게 사념이 그 대상으로 부터 확장되는 것을 빠빤짜(papañca)라 한다. 이미 대상은 내 눈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이 상으로 남아 인지(프린트)되어진다. 그 프린트 된 상을 가지고서 내가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정보를 연관시키면서 이제부터 생각을 해 나가는 것이다. 시계의 예를 들 수 있다.

 

손목시계를 보았을 때 이것이 시계라고 인식한다. 그런데 이 시계가 일제인 것 같다느니 예쁘게 생겼다느니 나도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와 같은 생각이 시계를 연하여 계속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나()라는 것이 개입된 것이다. 시계를 보고 좋다는 느낌이 들어 결국 그 시계를 내것으로 끌어 당기고 싶은 현상이 발생된 것이다. 이렇게 머리속에서 그것에 대한 생각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망상이라 하고, 빠알리어로 빠빤짜라 하는 것이다. 결국 빠빤짜는 사념이 계속 확장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사념이 계속 확장되다 보면 어떤 현상이 발생될까.

 

 

 

 

 

사진 http://kriyavansinlove.blogspot.com/2010/09/bhagavad-gita-322-karma-yoga-yoga-of.html

 

 

굴종의 단계로

 

이제 부터는 우발적단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계획적인 행위도 아니다.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거부할 수 없는 굴종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 단계는 어떤 단계일까. 이제까지 인식의 주체가 되어 행동하던 사람이 이 굴종의 단계에서는 생각이 주체가 되고, 그 사람은 피 할 수 없는 생각의 피동체가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그 사람만 보면 화가 나는 경우가 있다. 원수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인간만 보면 성질이 난다. ‘그 인간을 보는 순간 머리 속에서 그 인간은 나쁜사람이야라고 판단해 버리고, 그 인간과 관련하여 안 좋았던 생각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마구 화를 내게 된다. 그러면서 불쾌감과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그 불쾌감과 괴로움을 누가 만들었을까. 바로 자신이 만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정체라는 것이다. 계속 자기 생각속에 빠져 자기가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굴종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 수 있다. 시계를 보고서 그 시계가 좋아 보여서 그 시계를 가지고 싶다는 강박관념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꼭 그 시계를 가지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극단적으로 훔칠 수 있다. 그 시계가 좋다라는 생각에 멈추었다면 도둑질이라는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 생각에서 멈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훔치고, 도둑으로 몰리고, 결국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고, 고통을 겪게 된다.

 

시계를 훔치지 않고 그 시계를 꼭 사고야 말겠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시계를 사기 위하여 일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탐진치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하나가 연하여 수 많은 일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것은 느낌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 느낌에서 부터 행위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가 만들어 놓은 행위로 인하여 자기의 세계가 형성되고, 그 세계의 노예가 되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개념에 의하여 사용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개념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허상의 세계, 개념의 세계

 

사람이 개념적으로 확장하여 갈 때 바로 자기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개념의 확장, 그 확산적 경향 때문에 과거와 미래와 현재 모두 그 사람을 구속하여 버린다. 예를 들어 나는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라고 하였을 때, 그 세계는 자기가 만든 세계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그 세계속에 살면서 그 세계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소위 세계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라한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다시 올 필요가 없다. 소위 말하는 세상은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기 때문에 다시 오는 것이다. 그런 세상은 모두가 다르다. A라는 사람이 인식하는 세상이 다르고, B라는 세상이 인식하는 세상이 모두 다르듯이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계는 자신이 만들었고, 그 세계속에서 계속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라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세계는 개념의 세계이고, 자기가 투사해 놓은 꿈의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이를 마술사와 호랑이 비유로 설명 할 수 있다.

 

어느 마술사가 죽은 호랑이의 뼈를 추스려 마술로서 호랑이를 소생시켰다. 그런데 그 소생된 호랑이는 마술사를 잡아 먹어 버렸다. 이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내가 만들어 놓은 호랑이 한테 계속 잡아 먹히면서 사는 삶과 같다는 것이다. 내가 인지하면서 만들어 놓은 허상의 세계, 개념의 세계에 살면서 . 나는 이렇게 살아야해하며 만들어 놓은 세상은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면서 사는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호랑이 이야기처럼 개념이나 언어가 그것을 만들어 나가고 그 사람을 완전히 정복해 버리는 것이다.

 

갈망(tanha)과 견해(ditthi)와 자만심(mana)

 

만두삔디까숫따(Madhupindika Sutta)는 우리의 가장 큰 적인 망상(빠빤짜)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에 대한 과정을 설명한 것이라한다. 그런데 연기법과는 약간다르다는 것이다. 어느 부분에서 다를까.

 

인식과정에서 부터 느낌까지는 같다. 그러나 느낌 이후의 과정이 다르다. 연기법에서 느낌 다음에 갈애가 일어나지만, 만두삔디까숫따에서는 느낌 다음에 생각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이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생각이라는 것이 갈망이 표현 되어지고 있는 양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망상이 망상을 연하여 일어나는 요인을 세가지로 드는데, 그 것은 갈망(tanha)과 견해(ditthi)와 자만심(mana)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생각이 계속하여 일어나고, 일어나고 하는 것이다.

 

결국 느낌 때문에 갈망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좋은 느낌은 취하려 하고, 나쁜 느낌은 밀치려 하는데, 이때 나가 개입되는 주관적 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아가 진리인데 나()라고 하는 것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깨어 있지 못하면 무아 쪽 즉, 진리로 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개념의 세계에 갇히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좋은 것은 움켜 쥐려 하기 때문에 탐심이 일어나고, 싫은 것은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진심이 일어난다. 탐심과 진심은 모두 취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움켜 쥐기 때문에 발생이 되는데, 그 것은 탄생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탄생이 있다면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탄생된 것들은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몸이 아프기도 하고, 늙어가고, 비애, 비탄, 탄식, 절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념은 부수어 버려야

 

그것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곳으로 부터 빠져 나오려고 해야한다. 따라서 머리 속에서 형성된 얽히고 헝클어진 미로속에서 길을 찾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그 미로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그 것이 개념인지도 모르고 그 개념이 주는 망상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그인간이 떠 올랐을 때, 그인간을 미워하고, 그 미워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을 당하는 것도 만들어진 개념에 정복당하여 집착하게 만든 결과 일것이다. 그런 개념은 부수어 버려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한 의식의 작용을 마술사와 호랑이의 비유로 설명하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느낌이 일어나는 초반부에 알아차려야 한다. , 항상 깨어 있으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것이 지속되어 고통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 수행이야말로 고통을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2011-01-21

진흙속의연꽃

 

 

 

 

 

Madhupindika Sutta.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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