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살과 사마시시(Samasisi)

담마다사 이병욱 2011. 2. 6. 11:44

 

 

 

자살과 사마시시(Samasisi)

 

 

 

죽고 싶은 본능

 

누구나 한 번쯤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또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미워도 미워 죽겠다하고, 좋아도 좋아 죽겠다고 말한다. 이처럼 누구나 막연하게 죽음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시도하는 경우를 자살이라 한다.

 

자살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불교TV 사이트에서 정신과전문의 전현수박사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하여 분석하고, 그 예방책 (전현수박사의 마음테라피 , 자살심리,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2&PID=P634) 을 내어 놓았다.

 

몸이 피곤하면 쉬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으면 쉬고 싶어 한다. 죽고 싶어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쉬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죽고싶어 하는 것도 본능이라 한다.

 

프로이드는 인간들에게 살고자 하는 본능, 성적본능과 죽고 싶은 본능이렇게 두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매일 40명씩 자살로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해 자살한 사람의 숫자는 14,579명이었다고 한다. 이는 매일 40명씩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문제는 자살시도또한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다.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을 좁게는 10, 넓게는 40배로 본다. 좁게 보면 10명이 자살을 시도하여 1명이 성공하는 것이고, 넓게 보면 40명이 자살을 시도하여 1명이 성공하는 것이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매일 400명에서 1600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남의 문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주변, 우리자신의 문제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OECD국가중에 10년 전부터 자살율이 연속으로 1위라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지도급인사들이나 유명연예인들의 자살이 많아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높다고 한다. 그런 영향이어서일까 해마다 꾸준히 늘어가고 있는 자살기도자들의 심리는 어떠할까.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의 유형

 

한 마디로 그들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괴로워 죽는 것이 아니라, 자살해야 겠다는 생각에 골똘하다 보면 자살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에 죽는다고 한다. 심지어 이렇게 까지 생각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죽기를 바란다.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다

 

 

이렇게 결론내리고 자살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는 자살직전의 마음상태로서 오로지 죽을 것만 생각할 뿐, 딴 생각이 나지 않아서 죽게 된다는 것이다.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은 몇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첫째, 절망의 연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을 때 자살을 한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암환자들의 자살율이 2-3배 높은 이유이다.

 

둘째, 정신분열증이 있을 때 자살을 한다. 귀에서 소리가 나서 죽어라든가 죽는 것이 가족을 살리는 것이다와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이해 하기 힘든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현실이라 한다. 그래서 어차피 난 죽을 목숨인데, 그럴바에 내몸 던져 가족을 위해 죽겠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심리라고 한다.

 

셋째, 괴로운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 자살을 한다. 연예인들의 자살이 대표적이다. 시시각각 괴로워서 죽는 것이 덜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이 때 잡아주는 사람도 없고, 올바른 믿음이나 깨달음이 없었을 때 단지 괴로움을 피하겠다는 생각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것이다.

 

잘 못 알고 있는 것, 모르고 있는 것

 

사람들은 자살에 대하여 잘 못 알고 있는 것도 있고, 모르고 있는 것도 있다. 정신과 전문의가 말하는 자살예방 대책은 무엇일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죽고 싶다고 말을 하였을 때 흘려 듣지 말라고 한다. 지레짐작으로 저 사람은 죽을 사람이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처음부터 자살하려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처음에 괴롭다” “힘들다로 시작해서 죽고 싶다로 발전하기 때문에 경각심을 가지고 잘 지켜 보아야 한다고 한다.

 

통계적으로 죽고 싶다고 이야기 하였을 경우 55-75%는 자살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런 사람을 보고서 무관심하면 나는 죽어도 되는 모양이다또는 모두 내가 죽기를 원하는 모양이다라고 자의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들의 심리상태는 정상인과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이라고 왜곡해서 받아 들일 수 있기 때문에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고 한다.

 

둘째, 재시도를 하는 경우이다. 자살을 시도 했다가 실패 하였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자살시도가 실패로 끝났을 경우 정신차리고 다시는 그런 짓을 안할 것 같지만, 실제로 재시도 하는 경우가 15%에 달하고 그 중 5%는 성공하여 자살로서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직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다면 관심있게 지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죽는 순간까지 갈등하는 경우이다. 자살하는 그 순간 까지 삶과 죽음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이는 누군가 구조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실제로 3층 옥상에서 갈등하다 발을 헛딛어 다친 경우가 대표적 케이스라 한다.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은 무서움도 그다지 크게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높은데 올라가 서 있어도 무섭지 않고, 통증 또한 심하게 느끼지 않는데 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와 같이 바뀌기 때문이라 한다.

 

누군가 죽고 싶다고 하였을 때

 

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은 전조가 있다고 한다. 어떤 특이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죽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는 것이다. 다음으로 평소 종교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이 스님이나 목사, 신부를 찾아가 심각한 얼굴로 삶에 대하여 또는 죽음에 대하여 묻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전과 다른 변화를 볼 수 있는데,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든가, 얼굴이 사색(死色)으로 변하고, 사진이나 평소 아끼던 물건등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중 얼굴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이 심각하게 고민하면 얼굴의 형상과 색이 바뀌게 되고, 이는 죽음의 그림자가 실려 있는 사색으로 되기 쉽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 죽고 싶다는 말을 하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그들의 말을 잘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들의 심리는 정상인과 달라서 정상인이 하는 말을 이상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살하겠다고 입버릇 처럼 달고 다니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그래, 너는 나가 죽는 것이 좋다고 하였을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실제로 그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가서 자살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자살자의 심리는 어머니까지 내가 죽기를 바라는 구나하고 오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한다. 죽는 사람은 혼자서 죽게 된다. 그 옆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혼자 있는 그에게 자주 전화라도 해 주어야 한다. 이 세상에 자신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한다.

 

자살자의 1/3은 우울증이나 알코올 중독과 같은 심한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증상이 심하면 강제라도 입원을 시켜야 한다. 그래서 가급적 혼자 있는 시간을 없게 하고 그 순간을 모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죽겠다고 전화가 온다면 제발 내일까지 살아 있어 달라고 말을 하면사 괸심을 가져 주고, 또 말하는 과정에서 풀릴 수도 있다고 한다.

 

자살은 밑지는 장사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자살은 밑지는 장사라는 것이다. , 자살하면 손해 본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살을 하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이 전개 된다. 지은 업이 남아 있는 한 어느 세계에 반드시 태어나게 되어 있는데 자살하면 어떤 세상으로 가는 것일까.

 

임종을 맞이하여 다음 생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이번 생에 지은 업, 이전 생에 서 지은 업이 있었으나 이번 생에 결과를 받지 못한 업, 그리고 죽을 때의 상태가 내생을 결정한다고 한다. 따라서 자살자의 심리 상태는 좋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내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극한 심리 상태에서 자살한 사람이 갈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지옥과 같은 악처라 한다. 이처럼 어떤 도와 과를 이룬 것 없이 내가 고통스러워서 자살한 경우 그 업의 영향으로 대부분 악처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불교적 관점이다.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hā)

 

20세기에 프로이드는 인간들에게 살고자 하는 본능 즉, 성적본능과 죽고 싶은 본능 두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2500년 전 부처님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모든 존재를 세세생생 윤회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갈애 (tahā)라 하였다.

 

부처님은 이 갈애를 세가지로 분류 하였다. , 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a-tahā), ②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vibha-tahā), ③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hā) 이렇게 세가지이다. 이중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프로이드의 죽고싶은 본능과 유사한데, 이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다라고 생각하는 단멸론으로 본다.

 

이런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내생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도덕적 관념이 희박해서 그 어떤 비도덕적인 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고통 받을 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고 생각하고 자살을 감행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고, 결국 악처에 태어 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현실을 더욱 더 악화 시키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전 지은 행위로 인하여 소멸되지 않은 업이 남아 있는 한 다시 태어 날 수 밖에 없는데, 수행자가 자살하는 경우는 어떠 할까.

 

자결한 고디까(Godhika)비구

 

초기경전에서 자살한 사건은 세 번 나온다고 한다. 그 중 두건은 해탈을 성취한 비구가 병이 심하게 들은 경우인데 모두 다시 태어 나지 않은 열반에 들었다. 이처럼 아라한의 자살은 질병으로 인하여 불법의 전승과 포교를 할 수 없었을 때 구차스럽게 육신의 지속에 대하여 애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건의 자살중 한 건은 자살과 동시에 열반에 들은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고디까경(Godhika sutta, SN IV.23)이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제자인 고디까비구는 열심히 수행을 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다. 그러나 고디까비구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멀어져 버렸다. 두번째로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지만 또 멀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노력과 퇴전이 여섯번 반복 되었다. 일곱 번째로 고디까비구는 방일하지 않고 스스로 독려 하면서 머물러서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 도달 하였다. 그러자 고디까비구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섯 번이나 나는 일시적인 해탈에서 멀어져 버렸다.

 그러니 이제 나는 칼로 (자결을 하리라.)’

(고디까경, Godhika sutta, 상윳따니까야, SN IV.23)

 

 

그러자 마라 빠삐만이 이런 사실을 알고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렸다.

 

 

대영웅,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시여,

당신의 제자가 죽기를 원하여

(죽을) 결심하였나니

그를 말리기를, 빛나는 분이시여.

(고디까경, Godhika sutta, 상윳따니까야, SN IV.23)

 

 

이렇게 마라가 게송을 말하고 있을 무렵 고디까비구는 칼로 자결하였다. 빠삐만의 게송을 들은 부처님은 마라임을 알아 보고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현자들은 더 이상 삶에 연연하지 않고

이와 같은 행위를 짓기도 하나니

고디까는 이미 갈애를 뿌리 뽑아

완전한 열반의 경지에 들었도다.”

(고디까경, Godhika sutta, 상윳따니까야, SN IV.23)

 

 

수행으로 갈애의 뿌리를 뽑은 현자들은 다시 태어남이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라는 게송으로 마라 빠삐만에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고디까비구가 자결한 산비탈로 갔다. 거기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사악한 마라가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의 알음알이는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라고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의 알음알이를 찾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는

알음알이가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고디까경, Godhika sutta, 상윳따니까야, SN IV.23)

 

 

 

고디까경- Godhika sutta.docx

 

고디까경- Godhika sutta.pdf

 

 

 

마라 빠삐만이 고디까존자의 알음알이를 찾으려 하나 찾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죽어서 알음알이()가 남겨져 있지 않다면 재생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디까비구는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이처럼 죽음과 동시에 완전한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든자를 사마시시(samasisi)’라 한다.

 

 

 

 

 

 

 

사진 : http://www.i-sangha.com/viewtopic.php?f=3&t=480&start=40

 

 

 

 

사마시시(samasisi), 동시에 두가지 목적을 성취한자

 

사마시시(samasisi)를 어원적으로 분석하면 사마(sama)동시에또는 함께라는 뜻이고, 시신(sisin)목적을 성취한자라 한다. 따라서 사마시시는 동시에 두가지 목적을 성취한자를 뜻한다.

 

고디까비구가 일곱 번째 심해탈을 이루어 자결하였을 때  모든 갈애가 소멸됨으로서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또한 완전한 열반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를 사마시시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 사마시시도 네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자세의 사마시시 (iriyapatha-samasisi)

둘째, 병의 사마시시 (rpoga-samasisi)

셋째, 목숨의 사마시시 (jivita-samasisi)

(SA.i.183, 상윳따니까야 주석서)

넷째, 느낌의 사마시시

(앙굿따라니까야 주석서)

 

 

이웃블로거인 이르머꼬어리서근님(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AYg9&articleno=17370003&categoryId=922944®dt=20091206155225#ajax_history_home)에 따르면 위의 세가지는 상윳따니까야의 주석서에 나오는 말이라 한다. 그런데 앙굿따라 니까야의 주석서에 따르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느낌의 사마시시라 한다.

 

고디까비구가 자결한 것은 목숨의 사마시시(jivita-samasisi)’에 해당 될 것이다. 만일 병에 걸려 죽었지만 그 순간에 알아차렸다면 병의 사마시시(rpoga-samasisi)’가 될 것이고, 호랑이에 물려 죽는 순간에도 알아차림을 유지하였다면 느낌의 사마시시일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어 다시 태어나고 죽는 일이 없는 자를 두가지 목적을 성취한자라 해서 사마시시라 한다.

 

사마시시는 반드시 죽음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일까. 한국명상원의 묘원법사는 사마시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방법을 내놓고 있다.

 

 

우리가 괴로움을 알아차리고 인내해야 하는 이유는

괴로움을 알아차리면,

괴로움을 일으킨 갈애.집착을 되풀이 하지 않아

괴로움과 갈애가 함께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느낌과 갈애가 동시에 소멸하는 것을 '사마시시'라고 합니다.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1u6b/411)

 

 

동시에 두가지를 이루는 것을 사마시시라 하였는데, 이를 느낌과 갈애에 적용하여 느낌과 갈애를 동시에 소멸하는 것을 사마시시로 본 것이다.

 

성자와 범부의 자살

 

고디까비구와 같은 성자와 범부의 자살은 다르다. 성자의 경우 나가 있다라는 유신견 (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이 소멸되어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기 때문에 존재나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을 수 없다. 반면 범부는 나가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고 싶은 것도 하나의 갈애로 보는 것이다.

 

갈애로 죽음을 맞이 하게 되었을 때 반드시 알음알이()가 남기 때문에 재생하여 윤회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이 자신을 죽였을 때 그 상태는 매우 좋지 않은 최악의 상태이기 때문에 다음 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대부분 지옥행이라 한다.

 

주변에서 죽겠다”등의 말과 함께 자살하려 할 때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며, 의미를 부여하면서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지 말고 살아 있어라든가  죽으면 안된다든가 너가 죽으면 아파 할 사람이 많다든가 하는 말을 해야 하고, 무엇 보다 전화를 자주 하고 문자또한 자주 보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2011-02-06

진흙속의연꽃

 

고디까경- Godhika sutta.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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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디까경- Godhika sutta.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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