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과경(Samannaphala Sutta)에서 본 육사외도와 삿된견해
도시의 밤하늘은 화려하다. 어둠이 내리면 하나 둘 네온싸인 불이 밝혀지고 도심의 거리는 활기를 띠게 된다. 형형색색 번쩍이는 광고판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도시의 밤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게 된다. 온갖 소비가 이루어지는 도시의 밤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종종 스포츠신문을 보면 광고란에 운명감정에 관한 기사로 넘쳐난다. 불교에서나 쓰임직한 용어인 도사나 보살과 같은 이름을 걸고 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점이나 사주를 보는 무속인들이다. 흔히 미신이라 일컫는 점집이나 무당집이 여전히 번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의 밤하늘을 수 놓는 것중의 또 하나는 교회의 십자가이다. 이 곳 저 곳에서 마치 도시의 공동묘지처럼 보이는 빨간 십자가의 물결은 우리나라가 영락없는 기독교국가임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그런 십자가는 도시는 물론 농촌, 산간벽지, 외딴섬 할 것 없이 물결친다.
‘삿된견해’를 가진 사람들
밤의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은 어떤 부류일까. 모두 다 밤의 문화를 즐기는 것일까. 밤의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주로 밤의 문화를 만들어 간다. 이는 사고치는 사람이 또 사고 치는 원리와 같다. 대부분의 범죄가 전과자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를 들어 10건의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10사람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10건중 8건은 2사람이 저지른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80대 20법칙’에 근거 한다.
80대 20법칙은 매우 보편적인 법칙이라 한다. 부의 80%는 20%에 소수자가 가지고 있고, 80%의 대다수는 20%의 부를 가지고 있는 것도 80대 20법칙에 적용된다. 따라서 퇴폐적인 밤의 문화를 확산하는 사람들은 과거 전력이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도덕불감증자들이 밤의 문화를 즐기고 확산하는 데, 이들의 숫자는 일반적으로 전체국민의 1/10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운명감정소에 들러서 점이나 사주등을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소위 운명론자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무려 1/3에 달한다고 한다. 한편 도시의 밤하늘을 뒤덮고 있는 십자가의 물결에 속한 사람들은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처럼 도덕부정론이나 운명론, 창조론등을 믿는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외도’라 한다. 불교의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모두 ‘삿된견해’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외도 중에 전통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부처님당시의 ‘육사외도(六師外道)’일 것이다. 육사외도란 무엇일까.
육상외도란 여섯 이교도 사상가의 견해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도 수많은 외도들이 있었으나 그 중에도 6명의 지도자가 각각 이끄는 외도 집단이 가장 강성했기에 육사외도라 한다. 그런 육사외도에 관한 이야기를 놀라웁게도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었다.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 따르면 여섯이교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도덕부정론, 뿌라나 깟사빠(Purana Kassapa)
뿌라나 깟사빠는 대답하기를,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않는 것을 훔치고, 문을 부수고 도둑질하고, 강탈하고, 노상강도짓을 하고, 간통하고, 거짓말하는 등의 나쁜짓을 해도 그것은 악을 지은 것이 아니다.
(디가니까야: 2 사만나팔라경, DN 2: Samaññaphala Sutta — The Fruits of the Contemplative Life {D i 47} [Thanissaro].)
이는 ‘도덕부정론’에 관한 것이다. 뿌라나 깟사빠(Purana Kassapa)는 인과응보를 부정하고, 윤리와 도덕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였다. 그 결과 어떤 악행을 해도 도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와같은 뿌라나 깟사빠의 견해에 대하여 그 때 당시 선악의 관념이 사회적 관습에 의한 임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는 보시하고 절제하고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공덕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숙명론,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
막칼리 고살라는 대답하기를,
사람을 타락시키는 어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사람을 정화시키는 어떤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원인도 조건도 없이 타락되기도 하고 정화되기도 한다. 나 자신의 행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없고, 남의 행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없고,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없다.
(디가니까야: 2 사만나팔라경, DN 2: Samaññaphala Sutta — The Fruits of the Contemplative Life {D i 47} [Thanissaro].)
인터넷백과사전에 따르면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와 같은 견해를 가진 자를 ‘숙명론’이라 한다. 그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에 대하여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적인 입장을 취했다. 따라서 인간의 생활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오랜세월을 윤회하다 보면 스스로 해탈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업을 자유의지로 해석하는 불교의 연기론적 업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막칼리 고살라와 같은 숙명론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아마도 요즘 보는 운명론자들과 유사할 것이다. 점이나 사주를 보고 그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거의 1/3에 달한다고 하니 예로 부터 가장 광범위하게 퍼진 견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일까 숙명론자들은 불교로 부터 ‘사명외도(邪命外道)’라는 혹평을 당했다고 한다.
유물론, 아지따 께사깜발리(Ajita Kesakambali)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대답하기를,
보시나 제사 재물에 대한 공덕도 없고, 선행과 악행의 과보다 없다.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저절로 생긴 것도 없다.
(디가니까야: 2 사만나팔라경, DN 2: Samaññaphala Sutta — The Fruits of the Contemplative Life {D i 47} [Thanissaro].)
이는 ‘유물론’에 관한 것이다. 아지따 께사깜발리(Ajita Kesakambali)는 도덕을 부정하고 현실적인 쾌락이 인생의 목적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일파를 ‘순세파’ 또는 ‘사탕발림파’라 하는데 보시는 바보들의 생각이라 주장하고, 죽은 후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 말한다.
그들은 오로지 현세의 이 몸과 마음만 있을 뿐이지 내새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세에서 지은 보시공덕은 모두 헛일이고, 도덕적 삶으로 천상에 나는 것 역시 부정한다.
“오직 즐길뿐!”이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현세에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밤하늘을 장식하는 네온사인 불빛아래에서 밤의 문화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아지따 께사깜발라가 주장하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전체 국민의 1/10로 보고 있다.
불멸론, 빠꾸다 깟짜야나 (Pakudha kaccayana)
빠꾸다 깟짜야나는 대답하기를,
다음의 일곱가지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며, 창조된 것도 아니고 창조자도 없다. 그러므로 이 일곱가지에서 생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디가니까야: 2 사만나팔라경, DN 2: Samaññaphala Sutta — The Fruits of the Contemplative Life {D i 47} [Thanissaro].)
빠꾸다 깟짜야나 (Pakudha kaccayana)가 말하는 일곱가지란 무엇일까. 경에 따르면 땅의 본체, 물의 본체, 불의 본체, 바람의 본체, 쾌락, 고통, 영혼이라 한다. 이 일곱가지는 마치 산처럼 확고하고, 기둥처럼 견고해서 ‘영원’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일곱가지는 죽이는 자도 없고, 죽임을 당하는 자도 없을 뿐만아니라 듣는 자도 없고, 아는 자도 없다고 한다. 경에서 이를 목을 베는 칼로 비유하기도 한다. 누군가 칼로 목을 베어도 이는 목숨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단지 칼이 일곱가지 본체를 가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불멸론’이라 한다.
이에 대한 인터넷백과사전에서의 설명은 빠꾸다 깟짜야나의 불멸론은 ‘숙명론의 변종’이라 설명한다. 생사에 초연하기 위하여 이런식으로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자아절제론, 니간타 나따뿟따(Nigantha Nataputta)
니간타 나따뿟따는 대답하기를,
이 세상에서 니간타는 네 가지의 자아 절제로 자신을 절제한다. 그는 모든 물의 사용을 절제하여 찬물을 취하지 않는다. 악을 삼간다. 악을 삼감으로써 악을 완전히 버린다. 완전한 절제를 성취한다. 이것이 네 가지 자아의 절제이다.
(디가니까야: 2 사만나팔라경, DN 2: Samaññaphala Sutta — The Fruits of the Contemplative Life {D i 47} [Thanissaro].)
니간타 나따뿟따(Nigantha Nataputta)는 부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자이나교의 창시자이다. 경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는 ‘영혼’을 인정하고 있다. 경에서 “찬물을 취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땅 표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일아스님은 주석에서 설명하였다.
찬물을 취하지 않을 정도로 불살생에 대한 계율이 철저하여 절제하는 삶을 살아 갈 것을 강조 하는데, 네가지에 대하여 절제할 것을 말한다. 그것은 경에서 언급된 찬물을 취하지 않고, 악을 삼가고, 악을 완전히 버리고, 완전한 절제를 성취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네 가지 절제가 성취 되었을 때 자아를 성취한 사람 또는 완성자라 하는데, 이를 지나(Jina)라 한다.
지나는 ‘승리자’를 뜻하는데 이는 곧 ‘자이니즘’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에서 ‘깨달은자(붓다, Buddha)’가 ‘부디즘’으로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볼 수 있다.
니간타 나따뿟따(Nigantha Nataputta)상
사진http://www.dailynews.lk/2009/03/18/fea10.asp
자이니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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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론, 산자야 벨랏티뿟따(Sanjaya Belatthiputta)
산자야 벨랏티뿟따는 대답하기를,
만일 그대가 ‘저 세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만일 내 생각에 다른 세상이 있다고 생각되면 ‘다른 세상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저렇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저렇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디가니까야: 2 사만나팔라경)
무색계에 비상비비상처가 있는데 이런 세계를 ‘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세계’를 말한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것도 아니다’와 같은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는 모든 경우의 수를 나타낼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산자야 벨랏티뿟따(Sanjaya Belatthiputta) 역시 경에서 ‘저 세상이 있는가’ 하고 물어 보았을 때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들었다. 이처럼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들어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넷 백과사전에 따르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지론(不可知論)’이라 한다. 또 인식은 그 때 그 때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기분파’라고도 하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회의론’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회의론자들은 “죽음후의 삶이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있다고도 말하지 않고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 않고 저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저렇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라고 표현 되었다. 이는 어는 선사가 “오직 모를 뿐!”이라거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라는 말이 떠 올려진다.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세계는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같은 회의론적 논리는 인터넷 토론사이트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사념처 수행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는 단멸론내지 회의론자들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10대제자이자 동시에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가 초기에 산자야 벨랏타뿟따의 제자로 출발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상 여섯이교도 사상가의 견해를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사만나팔라경에서 “~대답하기를” 이라는 표현은 여섯사상가들이 아자따삿뚜왕의 질문에 답한 형식이다. 아자따삿뚜왕은 여섯사상가들의 대답을 듣고 이에 대하여 찬사도 거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나왔다고 부처님께 아뢰고 있다.
육사외도와 연기법
여섯가지 사상 즉 육사외도는 여전히 현세에서도 강세를 떨치고 있다. 도덕적인 삶과 봉사하는 삶의 공덕을 부정하고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며 ‘죽으면 끝이다’라는 단멸론적인 생각을 가진자들, 주어진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며 모든 것을 숙명으로 돌리는 운명론자들, 오로지 자신이 인식하는 것 외에는 믿지 않는 회의론자들,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가 만들었다는 창조론자들을 역시 지금도 볼 수 있다. 이런 삿된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설명하였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저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연기법이라는 지혜의 칼로 그들의 삿된견해를 베어 버린 것이다.
2011-02-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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