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위빠사나가 정치적 무관심을 촉발한다고?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담마다사 이병욱 2011. 3. 25. 22:15

 

 

위빠사나가 정치적 무관심을 촉발한다고?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군부는 미얀마 국민들이 나와 주변과 세계가 무상, 공, 무아임을 끊임없이 알아차릴 것을 강조함으로써 국민들이 세속적·정치적 문제에 무관심해지도록 유도했다

 

 

 

 

출처 http://www.beopbo.com/news/view.html?section=93&category=98&no=64919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중에 역사가 오래되고 권위가 있다는 어느 사이트에 기고된 글(“위빠사나, 붓다 근본수행과 거리 멀다” )의 일부을 옮긴 것이다. 종립대 불교학과 H교수는 불교평론 최신호에 발표한 글에서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의 근본수행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하여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위빠사나 수행은 18세기 이후 미얀마에서 대중화 되었을 뿐 부처님당시 부터 전승되어온 수행법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더구나 위빠사나 수행은 세상과 현상에 대하여 무상한 것, 고통스러운 것, 자아가 없는 것이라고 끊임 없이 알아차릴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미얀마의 군부통치자들이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화답이라도 하듯이 또 다른 매체에서 재가의 L법사는 기고문(부처님 수행법이 위빠사나? “근거 없다”장점 많지만 대중적 수행법이기엔 ‘한계’) 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불자들에게 보급 될 경우 위와 같은 인생관과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을 경계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마치 그 동안 참았던 울분이 폭발이라도 하는 듯 작심하고 비판한 글을 읽어 보면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의 확산에 대한 우려와 동시에 이에 대한 가치를 깍아 내리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는 곧 대승불교의 존립기반에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고, 일종의 반격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를 접하면 접할 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면 알 수록 비교가 된다. 따라서 한 번 알게 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는 것이고, 다시는 그곳으로 가지 않게 된다.

 

그들은 이런 점을 우려하며 초기불교가 확산되고, 테라와다불교가 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매우 위험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기사를 읽어보면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남방불교의 가치를 깍아내리고 있는데, 이는 결국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부정하는 배반의 삶

 

무상, , 무아는 초기불교경전을 읽다 보면 무수하게 많이 나온다. 이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팔정도등과 함께 부처님이 강조한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처님을 대놓고 비판하지 않는 대신, 반야심경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가상의 인물을 내 세워 놓고 공의 논리로 모조리 부정하여 버린다.

 

그런 반야심경은 대승경전의 정수라 하여 매일 아침과 저녁의 예불에서는 물론 모든 불교행사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불자들은 매일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부터 시작하여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에 이르기까지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 사성제등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부정하는 배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부처님의 제자들은 매우 비통해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리 저리 뒹글며 슬퍼하하였고, 또 어떤 이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 그런데 어떻게 무상한 것을 영워하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하며 슬픔을 안으로 새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 가 많이 들어 출가한 수밧다라는 비구는 그만하면 됐습니다. 그만들 슬퍼하시오. 우리는 위대한 사문으로부터 벗어났고. 스승께서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합하고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우리를 억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해도 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를 본 마하 깟사빠 존자는 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부처님이 열반한지 불과 10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부터 비법이 일어나고 부처님을 부정하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존자들이여, 담마가 힘을 잃고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계율이 힘을 잃고 계율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담마를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담마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계율을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계율이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담마를 함께 외웁시다.

계율을 함께 외웁시다.

 

(율장 쭐라왁가 11,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렇게 주장함으로서 1차 결집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제2, 제3의 수밧다

 

담마가 아닌 것이 득세하고, 계율이 아닌 것이 강해지는 것은 부처님 열반당시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부처님 열반당시 수밧다가 부처님을 깍아내렸듯이 지금 제2, 제3의 수밧다가 출현한 것은 아닐까.

 

 

 

201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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