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미국의 고등학생도 아는 팔정도, 우리나라 불자들이 모르는 이유는

담마다사 이병욱 2011. 4. 4. 15:07

 

 

 

 

미국의 고등학생도 아는 팔정도, 우리나라 불자들이 모르는 이유는

 

 

대승과 초기불교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담겨 있는 초기불교경전을 소승의 가르침이라 하여 차별하고 있는데, 아침 불교방송의 경전공부시간(2011 4 4일자)에서 강사스님은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첫째, 진리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둘째,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는다.

셋째,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넷째,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않는다.

(불교방송 경전공부 유마경, 만권스님 강의)

 

 

이 네가지가 대승과 소승을 가르는 결정적인 내용이라 한다.

 

 

진리와 사람

 

먼저 진리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은 무엇일까. 이는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설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이라는 진리에 의지하면 열반에 든 여래의 법신이 무상하지 않은 것처럼 진리 또한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에 의지하는 것은 열반에 드신 부처님이 항상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것이라 한다. 이를 법신상주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인격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의 진리를 믿어야 하는데, 이것이 참나로서 선의 제1목표라는 것이다.

 

뜻과 글

 

두번째의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는 말이나 글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말이나 글로서는 뜻을 완전히 나타낼 수 없으므로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의 참모습은 말을 여의었을 때나타나므로 참뜻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법신 지혜와 육신 지식

 

세번째의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지혜는 자신의 마음속에 본래 감추어져 있는 불성이 발휘된 광명을 참지혜라 말하고, 지식은 단지 보고 듣고 생각하여 얻은 것이라 한다. 따라서 지식은 경험에 그치고 절대의 이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열반경에 따르면 지혜는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몸이 항상 설법하고 계시는 법신인 줄 아는 것이고, 지식은 부처님이 방편으로 나투신 육신만을 보고 5 12 18계를 설한 것이라 한다. 따라서 지혜는 법신에 의지 하는 것이고 육신에 의지하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지혜는 학문으로 얻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본바탕이 드러날 때 나타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성문승들은 소승의 가르침만 배울 뿐 부처님의 대자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지혜를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요의경과 불요의경

 

네번째의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무슨 뜻일까. 궁극적 진리는 대승의 가르침에 있다고한다. 그런 대승의 가르침을 요의경이라 하고, 보편적인 가르침을 불완전하게 나타낸 소승의 경전을 불요의경이라 한다.

 

요의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바른 가르침을 남김없이 설하신 경전을 말하고, 불요의는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알맞게 설하시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을 모두 드러내지 않은 방편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승의 가르침인 요의경에 의지해야지 불완전한 방편의 가르침인 불요의경에 의지해서는 참으로 불법을 배웠다고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완전한 가르침이라는데

 

위의 네 가지를 요약하면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신에 의지해야 하고, 말이나 글로서는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말이나 글을 여의었을 때 진리를 알 수 있고, 부처님이 육신으로 설한 것은 지식이지만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 드러내 보이는 것이 지혜이고,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어른들만 알 수 있는 것을 모두 알려 줄 수 없듯이 근기가 낮은 성문승들에서 설한 소승의 가르침은 방편이어서 불완전한 불요의경이지만 반면에 대승의 가르침은 완전한 요의경이라는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완전한 가르침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완전한 가르침일까.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온처계근제연으로 표현되는 교학과 37조도품으로 표현되는 수행의 가르침이 들어 있는 초기경전은 근기가 낮은 이들을 위한 불요의경에 불과할까. 3월에 열린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도법스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수행의 모든 답은 팔정도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 수행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 도법스님, 누구를 자정하고 무엇을 쇄신할 것인가)

 

 

 

 

 

The Noble Eightfold Path

사진http://www.wrdz.com/the-noble-eightfold-path-2

 

 

 

부처님은 84법문을 설하였다고 한다. 그런 법문을 줄이면 37조도품이 되고, 또 줄이면 8정도라고 한다. 이처럼 8정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래서일까 토론회에서 도법스님은 8정도의 실천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수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부터 배우는 불자들

 

하지만 우리나라 불자들은 8정도에 대하여 잘 모른다. 8정도 뿐만아니라 4성제나 12연기, 5온등 기본적인 교학에 대하여 대부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는 불자가 될 때 오온개공(五蘊皆空)’에서 부터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모두 부정하는 듯한 것 부터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스님들이라고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소승교학이라 하여 가장 하근기의 불자나 배우는 것이라 그런지 몰라도 4성제나, 8정도, 12연기에 대한 법문을 듣기가 매우 힘들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8정도에 모두 요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고등학생도 아는 팔정도

 

우리나라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하여 모르는 것과 달리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은 박광서 교수의 발언을 보면 매우 충격적이다.

 

 

“미국에선 고등학생이 불교의 오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줄 안다. 팔정도도 알고 있다. 이런 것이 미국에서는 고등학생에게도 상식화되어 있는데, 유독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불교가 시대적 역할을 다한 흘러간 종교처럼 되어 있다.

(박광서 교수,  누구를 자정하고 무엇을 쇄신할 것인가)

 

 

불교를 믿지 않는 미국의 고등학생도 오온이나 팔정도와 같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학교에서 교육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불자들은 미국의 고등학생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나 팔정도, 십이연기기,오온등에 대하여 아는 것 대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을 먼저 배웠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닐까.

 

가장 중요한 불교윤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초기경전에 실려 있다. 그런 가르침 중에 가장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팔정도 역시 초기경전에 실려 있다. 불자들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고 또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팔정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여덟 가지 바른길(八正道 : 가장 중요한 불교윤리의 가르침)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
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가르치셨다.
"그대들에게 '여덟 가지의 거룩한 길인가?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①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근원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아
는 것이다.

② 무엇이 바른 생각인가? 악을 행하지 않으려는 생각, 남을 해치
지 않으려는 생각을 말한다.

③ 무엇이 바른 말인가? 거짓말하지 않고, 이간질하지 않고, 악담
하지 않고, 잡담[쓸데없는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④ 무엇이 바른 행동인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
는 것을 갖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⑤ 무엇이 바른 생활수단인가? 잘못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고, 바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⑥ 무엇이 바른 정진인가? 악한 생각이 장차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
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악한 생각을 버리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
력하며, 선한 생각을 일으키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선한
생각을 더욱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는 것이다.

⑦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인가? 열성적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욕과 낙담을 버리고, [무상하고, 불완전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몸을 몸으로 있는 그대로 관
찰하며, 느낌을 느낌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마음을 마음으로 있
는 그대로 관찰하며, 담마 를 담마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머문다.

⑧ 무엇이 바른 짐중인가? 감각적 쾌락과 바람직하지 못한 모든 것
에서 벗어나, 사유와 숙고가 있으며 홀로 명상함에서 오는 환희와 기
쁨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머문다. 사유와 숙고을 멈추고 안으로의 평
온함과 마음의 집중됨이 있으며, 사유와 숙고가 없이 삼매에서 오는
환의와 기쁨이 있는 두 번째 선정에 머문다. 환희가 사라진 후 평정한
마음과 분명한 알아차림과 육신의 행복을 느끼며 머문다. 거룩한 이들
이 말하는 '평정과 마음 챙김에 머무는 사람은 행복하게 머문다.' 고 하
는 세 번째 선정에 머문다. 고통도 쾌락도 버리고 전에 있던 행복도 불
행도 버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에 의하여 도달한 마음챙김
의 순수함이 있는 네 번째 선정에 머문다."

 

(상윳따 니까야 :45  막가 상윳따8,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2011-04-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