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불자들은 어떻게 절할까, 동아시아 최초의 절 ‘백마사’에서
숭산관람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소림사 부근의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다음 목적지인 ‘낙양’으로 이동하였다.
총 5박6일간의 여행에서 모두 5박을 하였는데, 2박은 ‘정주시’에서, 1박은 같은 호남성인 ‘낙양시’에서, 나머지 2박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시’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낙양으로
또 관람은 총 4일인데, 1일차는 정주에서 북서쪽으로 2시간 거리인 운대산(초작시, 焦作)에서, 2일차는 정주에서 서남쪽으로 역시 2시간 거리인 숭산 소림사(등봉시, 登封)에서 관람하였고, 이제 3일차에 낙양시(洛阳)부근의 백마사와 용문석굴을 관람하기 위하여 소림사에서 서북쪽으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낙양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동 코스에 대한 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남성 정주, 낙양 부근 지도
출처 ; http://map.sogou.com/i.html#c=12623250,4090500,9
5월 20일 이동중에 본 낙양의 밤 풍경은 고층빌딩과 고층아파트가 즐비하였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낙양시의 인구는 대략800만명이라 한다. 이는 주민등록지상의 인구 뿐만아니라 일시거주자의 인구까지 모두 포함한 것이라 한다. 이는 같은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의 인구가 대략 천만명인 것에 비하면 약간 적지만, 서울의 인구만한 도시가 하남성에 두개 있는 것이다. 그런 낙양시는 정주와 달리 역사의 고도이다.
낙양을 수도로 한 왕조는
낙양이 고대중국의 왕조에 있어서 최초로 수도가 된 것은 ‘한나라(BC220~AD220)’때이다. 정확하게말하면 ‘후한(後漢, 25~220)’시대이다. 후한을 중국인들은 ‘동한(東漢)’이라 부른다. 이는 수도가 서쪽에 있었던 ‘장안(서안)’에서 동쪽에 있는 낙양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후한제국시대의 수도이었던 낙양은 후한이 망하고 난후 ‘위나라’의 수도가 된다. 위나라는 삼국시대에 조조가 세운 나라인데, 수도는 정주의 남쪽에 위치한 허창(许昌)이었다. 그런데 조비(세조)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게 되어 두번째의 중국왕조의 수도가 된다.
이후 사마염이 위나라를 가로채서 진나라라 하였는데, 역시 낙양을 수도로 삼게 된다. 따라서 낙양은 후한에서 위,진시대까지 수도 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낙양이 수도이었던 왕조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낙양을 수도로 한 왕조
왕조 |
연대 |
건국자 |
수도 |
현재지명 |
관람 |
진 |
BC 221년 – BC 206 년 |
시황 (영정) |
함양 |
서안 |
병마총(4일차) |
서한 (전한) |
BC 206 년 – AD 8 년 |
고조(유방) |
장안 |
서안 |
|
신 |
AD 8 년 - 23 년 |
왕망 |
장안 |
서안 |
|
동한(후한) |
광무제(유수) |
낙양 |
낙양 |
백마사(3일차) | |
삼국 위 |
조비 |
낙양 |
낙양 |
| |
서진 |
무제(사마염) |
낙양 |
낙양 |
| |
동진 |
원제(사마예) |
건강 |
남경 |
| |
십육국 |
|
|
|
| |
남조 송 |
유유 |
건강 |
남경 |
| |
북조 북위 |
척발규 |
평성→낙양 |
대동->낙양 |
용문석굴(3일차) | |
당 |
고조 (이연) |
장안 |
서안 |
화청지(4일차) |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낙양은 후한과 위진남북조시대에 정복왕조의 수도이었다. 이는 낙양이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중원에 있었기 때문에 중원을 장악한 왕조가 낙양을 수도로 삼은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북쪽의 이민족이 침입하여 정복왕조를 세우면서 한족의 왕조는 남쪽으로 쫒겨가 다시 왕조를 세웠는데, 그 경우 지금의 남경인 ‘건강’에 수도를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민족인 ‘선비족’으로서 중국의 북쪽을 통일한 ‘북위’의 경우 역시 낙양을 수도로 삼았는데, 이때 용문석굴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중국의 길일과 ‘워아이니’
3일차 5월 21일(토)의 중국여행의 관람지는 낙양 부근에 있는 백마사와 용문석굴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오전에 백마사를 보고, 오후에 용문석굴을 보는 일정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패키지 관광상품을 운영하는 여행사들이 백마사는 취급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순례팀은 불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특별히 백마사를 끼워 넣었더. 그런 백마사는 어떤 절일까.
백마사를 관람하기 위하여 미니버스는 호텔을 나섰는데, 그날 따라 폭음이 요란 하였다. 마치 대포를 발사하는 듯한 폭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이드가 설명하기를 오늘이 ‘길일’이라 한다.
5월 21일을 중국어로 말하면 “워아이니”라 한다. 이 말은 우리말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이라 한다. 그래서 5월 21일에 결혼하는 사람들이 유독많다고 한다. 마침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래서일까 거리에서 차량행렬을 보았는데, 풍선을 달고 다니는 우리와 달리 차량에 ‘꽃 장식’을 하였고, 그 뒤를 2대의 차가 더 따라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종종 대포소리 같은 폭음을 울렸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결혼식을 어디서 할까.
우리와 달리 별도의 결혼식장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호텔을 빌려서 한다고 한다. 호텔의 중식당에서 하는 것이 보통인데, 문제는 하객으로 참석하였을 때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결혼식에 참석하려면 기본이 500원(한화 8만원)인데, 친한친구는 우리 돈으로 20만원 정도이고, 이는 생일잔치에 참석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결혼식이나 생일잔치가 열리면 참석해야 할지 말아야 될지 고민된다고 말한다.
백마사의 유래
백마사는 낙양시에서 차량으로 약 30분 거리(12Km)에 있다. 그렇다면 왜 백마사가 유명한 절일까. 이유는 백마사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절’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불교가 들어왔다는 말과 같다.
백마사가 창건된 때가 후한(동한)시대인 68년이다. 지금으로 부터 2,000년 전이다. 따라서 백마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68년이란면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막 일어날 시점이고, 법화경이나 화엄경같은 경전이 나오기 전이고, 또 공사상이나 유식사상이 나오기 이전이다. 따라서 그 때 당시 들어온 불교는 ‘초기불교’와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구마리집(343~413)등의 서역승들이 역경작업을 본격화 하기 이전 후한시대에 역경승 ‘안세고’가 있었는데, 148년에 번역한 ‘안반수의경’을 보면 오늘날 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사띠빠따나경(satipatthana Sutta, 염처경)’과 유사하다고 한다. 이는 중국불교의 특징이 되어버리다시피한 선종과 다른 것으로서, 테라와다전통 불교의 ‘위빠사나’와 유사한것이라 한다.
이처럼 1~2세기에 들어온 불교는 지금의 대승불교와 다른 것이었다. 그런 불교를 최초로 중국에 전달한 사람이 지금의 아프간지방에 해당하는 ‘대월식’에서 온 가섭마등(迦葉眠:Kasyapa Matainga) , 축법란(竺法蘭:Dharmaratna) )이라는 두 스님이라고 한다.
두 스님이 경전과 불상을 백마에 태우고 낙양에 도착하였는데, 이들을 맞기 위하여 관청에서 숙소를 제공란 것이 백마사의 시초라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 두 분의 스님을 기리기 위한 큰 행사가 매년 백마사에서 성대하게 열린다고 한다. 그 때 소림사등 인근사찰의 많은 스님들이 참석한다고 한다.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서일까 우리나라 불자들이 많이 찾는다고 하는데, 이는 낙양과 가까이 있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백마사 일주문
이 번 순례에서 백마사는 소림사에 이어 두 번째 로 참배하는 사찰이다. 소림사가 무술공연등으로 인한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어 세계각국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지만, 백마사에는 중국인들 외에 외국인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 듯하다. 대신 전국각지에서 관광 중국인 관람객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백마사에서 유심하게 관찰한 것은 중국인들의 ‘신행’에 관한 것이었다.
백마사는 너른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은 보이지 않는다. 평지에 세워진 백마사는 우리나라의 총림정도 규모로 보인다. 그런 백마사에도 정문에 들어가지 전까지 몇 개의 일주문 비슷한 대문을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일주문
두 번째 일주문이 나어기 까지 양옆으로 가게가 즐비하다.
두 번째 일주문
돌과 돌로 된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국의 일주문형식이라 여겨진다.
소림사에 본 것과 비슷한 형식의 일주문인데, 돌과 돌조각이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두개의 일주문 사이에 가게 양편으로 즐비한데, 불상이나 기념품 그리고 낙양의 꽃이라 불리우는 목단꽃 조화등 불교관련 용품을 팔고 있다. 잘 정비 되어 있는 가게들 가운데, 술집이나 잡상인들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백마사 입구의 가게
음식점이나 술을 파는 가게는 볼 수 없다.
AAAA급 관람지
백마사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하여 검색을 하여 보았다. 블로그나 카페등에 여행기가 많이 올려져 있으나 거의 대동소이한 내용이다. 이럴 경우 중국사이트를 검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문을 몰라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백마사가 중국의 관광지로서 ‘AAAA级景区(AAAA급경구)’라 되어 있다. 아마도 최상의 볼거리가 있는 관람지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그리고‘중국제일고찰’이라 소개 되어 있다.
그런 백마사에 대하여 상세하게 소개한 것이 중국어판 백과사전( 白马寺_百度百科)인데, 가장 정확한 자료라 판단되지만 그 뜻은 알 수 없다. 홈페이지로 여겨지는 사이트는 http://www.baimasi.cn/pic/이다.
백마사 입구
백마사 정문에 들어가기 전에 백마석상을 볼 수 있다. 백마에 불상과 불경, 그리고 스님을 싣고 왔으니, 불법승 삼보를 싣고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백마상
백마사 입구이다. 기와지붕은 우리와 비슷하나 벽이 모두 붉은 색이고, 험하고 무섭게 생긴 돌사자상이 서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이 담이 없는 열린구조임에 반하여 중국사찰의 특징은 담으로 둘러쌓여 있다는 사실이다. 백마사도 그런 유형의 사찰이었다.
백마사 입구
무섭지 않은 사천왕상
백마사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절과 마찬가지로 사천왕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따로 우회로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천왕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중국절의 특징이다. 그런데 사천왕문에 있는 사천왕상이 그다지 무섭게 생겨 보이지 않았다. 소림사의 무시무시한 사천왕상과 비교가 될 정도이다.
사천왕상
무섭게 생기지 않다.
포대화상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포대화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천왕문에 있다.
대불전을 보면
백마사에는 두개의 중요한 전각이 있는데, 대불전과 대웅전이다. 모두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먼저 대불전을 보면 사천왕문을 통과하자 마자 바로 앞에 있다. 대불전 앞에는 향을 사르는 단이 있는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불전
천왕문을 지나자 마자 나온다
대불전에 대한 설명을 중국어 백과사전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大佛殿
天王殿后是一座大佛殿,长22.6米,宽16.3米,殿脊前部有“佛光普照”、后部有“法轮常转”各四个字。殿的中央供奉着三尊塑像:中为释迦牟尼佛,左为摩诃迦叶,右为阿难。这三尊像构成了“释迦灵山会说法像”。这取材于一个佛教禅宗典故。据说有一次释迦牟尼在灵山法会上面对众弟子,闭口不说一字,只是手拈鲜花,面带微笑。众人十分惘然,只有摩诃迦叶发出了会心的微笑。释迦牟尼见此,就说:“我有正眼法藏,涅盘妙心,实相无相,微妙法门,不立文字,教外别传。”这样,摩诃迦叶就成了这“不立文字,教外别传”的禅宗传人,中国佛教禅宗也奉摩诃迦叶为西土第一祖师。白马寺大佛殿的“释迦灵山会说法像”就是根据此传说塑造而成的。三尊旁边,还有手拿经卷的文殊和手持如意的普贤两位菩萨。释迦牟尼佛像背后是观音菩萨像。殿内还有一口引人注目的大钟,高1.65米,重1500公斤,上饰盘龙花纹,刻有“风调雨顺,国泰民安”等字,并附诗一首:“钟声响彻梵王宫,下通地府震幽冥。西送金马天边去,急催东方玉兔升。”据传此口钟与当时洛阳城内钟楼上的大钟遥相呼应,每天清晨,寺僧焚香诵经,撞钟报时,洛阳城内的钟声也跟着响起来,因此,白马寺钟声被列为当时洛阳八景之一。
(http://baike.baidu.com/view/4032.htm )
글의 말미에 백마사가 낙양8경중의 하나라는 문구가 보인다.
대불전에는 어떤 부처님이 모셔져 있을까. 대불전의 내부를 보니 마루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바닥에 방석이 깔려 있어서 절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신발을 신고 들어 갈 수 있다.
불상은 나무로 조성되어 있는 듯하고, 머리에는 일산이 있다. 불단에는 육법공양을 하는 우리와 달리 꽃공양 위주이다. 그리고 우리의 불전함에 해당하는 ‘공덕함’이라는 문구도 볼 수 있었다.
대불전 내부
바닥이 나무이고, 절을 할 수 있도록 방석이 깔려 있다.
대불전의 부처님상
목조로 조성한 듯 하다. 머리위에 일산모양의 우산이 있는 것도 특징이다.
동영상
대불전의 중국불자들
중국불자들은 어떻게 절할까
대불전의 후미에는 신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목조 관세음보살상이 보인다. 중국절의 특징중의 하나가 전각의 뒷편에 관세음보살상이나 수호신으로 보이는 듯한 상이 있다는 것이다. 대불전의 뒷면에 관세음보살상이 있었고, 대웅보전의 뒷면에는 창을 든 무사풍의 수호신장을 볼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상
대불전 뒤 벽면의 공간에 조성되어 있다.
순례팀들이 모두 관세음보상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였는데, 그래서일까 중국의 불자들 역시 우러러 보는 듯 하다. 일부는 절를 하기도 하였다.
관세음보살을 바라보는 중국불자들
중국의 불자들도 우리처럼 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은 우리와 절하는 모습이 약간 달랐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체투지라 하여 양손과 양무릎, 그리고 이마를 땅에 대고 두 손을 위로 올리는 ‘고두레’를 하지만, 중국의 불자는 고두레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발을 신은 상태에서 무릎을 방석에 대고 쪼그리듯이 절을 하는 것이었다.
중국불자들의 절하는 모습
쪼그리듯이 절하며 두손을 위로 올리는 고두레를 하지 않는다.
또 하나 중국불자들이 우리와 다른 모습은 ‘향공양’이다. 우리의 경우 부처님께 공양올릴 때 ‘육법공양’이라 하여 초,향,차,꽃,과일,쌀 여섯가지 공양을 올리는데, 중국의 불단을 보면 꽃공양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혹 과일이 놓여 있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중국에서 보는 독특한 장면중의 하나가 향공양이다. 큰 향다발에 불을 붙여 역시 큰 향로에 올려 놓는데, 향과 연기로 경내가 자욱할 정도이다. 향공양은 법당 밖에서만 볼 수 있다.
향을 사르고 있는 중국불자들
커다란 향을 한주먹 쥐고 불을 붙이고 있다.
석판 향로
일부 향에 불이 붙어 타기도 한다
향공양
향공양을 올리는 중국불자들
향공양
젊은 여성불자도 향공양을 올리고 있다.
양초공양
흔하지 않지만 양초공양도 볼 수 있다
대불전 뒤의 대웅전
대불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인데, 대불전 뒤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대웅보전이라고도 사이트에 소개 되어 있는데,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좌측에 약사불, 우측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중앙에 석가모니부처님, 좌측에 약사불, 우측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앞의 중국불자들
바닥이 마루로 되오 있지만 신발을 신고 들어간다. 그리고 절을 할 수 있도록 경사진 판이 마련 되어 있다.
나한상
불상 좌우 벽면에 모셔져 있는데, 우리의 해학적인 모습과 달리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
대웅전뒤에 또 하나의 전각이 보이는 데 ‘접인전’이라 한다. 접인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접인전 앞에 수 많은 중국인들이 몰려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신앙이 강하다고 한다. 불단에 ‘목단(모란)꽃’ 공양이 눈에 띈다.
접인전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접인전의 아미타삼존불
중국인풍의 불상의 모습이다.
1시간 정도 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불과 1시간 정도 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구석구석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백마사를 봄으로써 중국불자들의 신행생활과 중국사찰의 모습에 대하여 어느 정도 파악 할 수 있었다.
낙양의 목단축제가 4월중에 열리는데, 오월이라 목단꽃이 모두 떨어져 있다.
중국최초의 사찰인 백마사 바로 옆에는 인도절과 태국절의 모습도 보였다.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들어가 보지 못하였으나, 인도절의 경우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인도의 어느 개인이 개인재산을 기부하여 만든 절이라 한다.
인도풍 사찰
백마사 바로 옆에 있다.
태국풍 사찰
인도풍 사찰 바로 위에 있는데, 공사중이다.
중국불교를 확인하며
다른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나라에서 살아보지 않는 한 쉽지 않다. 비록 문자매체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았다고 할지라도 가서 한 번 보는 것 만 못하다.
중국에서 불교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중국의 최초의 절이자 불자들이 많이 찾는다는 백마사에서 1시간이라는 매우 짦은 시간에 파악하려 하였으나 그 것만 가지고 중국의 불교현황에 대하여 다 알았다고 말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중국에 불교가 있다는 것을 백마사참배를 통하여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 중국불자들의 신심은 우리나라 불자들못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 절하는 모습이나 향공양등으로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젊은 불자들인데, 그들의 모습에서 중국불교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면 세계불교인구는 3억5천만명이고, 기독교는 전부 합쳐서 20억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중국불자를 제외하고 계산한 수치에 불과하다. 중국의 불자를 전부 합하다면 전세계불교인구는 3억 5천만명이 아니라 최대 15억이 된다. 이처럼 중국의 불자를 합산할 경우 불교가 15억, 카톨릭 13억, 개신교 7억이 되어 세계최대종교는 불교가 되는 것이다. 그런 계산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이번 백마사순례를 통하여 확인된 셈이다.
순례팀은 오전에 백마사 순례를 마치고, 오후에 용문석굴을 보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2011-06-01
진흙속의연꽃
'외국성지순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공을 넘어 마주한 용문석굴 봉선사동 (0) | 2011.06.09 |
---|---|
“모두 털어 먹겠다?” 중국가이드의 숙제와 매장순례 (0) | 2011.06.03 |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 신록의 중국‘숭산’을 보며 (0) | 2011.05.31 |
숭산 소림사에서 본 중국불교 (0) | 2011.05.29 |
무술고수와 영화, 소림사와 신소림사 (0) | 2011.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