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을 넘어 마주한 용문석굴 봉선사동
낙양시를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크게 두가지로 보여진다. 하나는 ‘목단(모란)’이고 또 하나는 ‘용문석굴’이다.
낙양의 상징은
낙양에서 목단은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다. 이미 꽃이 졌지만 호텔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고, 비록 조화에 지나지 않지만 백마사의 ‘꽃공양’용으로도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목단이 피는 시기는 4월인데, 4월 5일 ‘청명절’부터 목단이 시드는 4월말까지 ‘목단축제’가 대대적으로 열린다고 한다. 이때 중국의 ‘총리’도 참석하여 매우 성대하게 치루어지는데, 전국각지에서 몰린 관광인파로 인하여 용문석굴 입장료를 사는데 한 시간 가량 줄을 설 정도라고 한다.
중국의 관광지는 어디를 가나 인파로 북적인다. 특히 명절과 기념일이 있을 때 절정을 이루는데, 일반적으로 5월의 경우 5월 1일 ‘노동절’ 부터 시작하여 약 4~5일 쉬고, 10월의 경우 10월 1일 ‘국경절’ 부터 시작하여 5~7일정도 쉬고, 6월의 경의 6월1일의 ‘어린이날’ 부터 3일정도 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장 많이 쉬는 때는 명절인데, ‘춘절’의 경우 약 보름정도 쉰다고 한다.
이렇게 많이 쉴 때 중국인들은 무엇을 할까.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여행을 다닌다고 한다. 당일치기가 아닌 몇날 몇일 걸리는 여행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볼거리가 많은 낙양, 정주, 서안과 같은 경우 노는날만 되면 여행객으로 미어 터진다는 것이다.
낙양시를 상징하는 꽃이 목단인데, 낙양시를 상징하는 것이 하나 더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은 낙양시의 대로변 요소마다 입간판에서 볼 수 있는 ‘용문석굴의 부처님상호’이다. 준수하게 잘 생긴 부처님의 얼굴을 곳곳에 볼 수 있게 한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용문석굴과 낙양시를 오버랩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만일 우리나라 경주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 본존불’의 이미지를 경주 시내의 요소에 입간판 형식으로 그려 놓았다면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마당에서 용납될 수 있을까.하지만 이곳 낙양시에서는 그런 것이 허용되고 있다. 이는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라 생각된다.
용문석굴을 향하여
준수하게 잘 생긴 용문석굴 부처님은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으나 이제 실제로 보러 가기 위하여 5월 21일 오후 순례팀은 낙양부근에 있는 용문석굴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용문석굴입구
용문석굴은 이곳에서 시작하여 약 1km에 걸쳐 있다
용문석굴 초입
용문석굴은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가장 먼저 보는 잠계사동
용문석굴은 낙양시 남부 12km 떨어진 곳에 위치 하고 있는데, 볼거리는 크게 두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북위시대 조성된 ‘빈양중동’이고, 또 하나는 당나라시대 조성된 ‘봉선사’라 한다.
용문석굴은 약 1km에 걸쳐서 형성되어 있는데, 중앙의 봉선사를 바라보았을 때 오른편의 동굴이 볼 것이 많고, 왼편의 동굴은 비어 있어서 그다지 볼 것이 없다.
자료로만 보던 용문석굴에서 가장 먼저 접한 동굴은 ‘잠계사’이었다. 동굴마다 명칭이 있는데, 이처럼 절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그런 반계사 동굴의 입구에는 다른 동굴들과 달리 지붕이 달려 있어서 마치 절처럼 보이게 하였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당나라시대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잠계사
가장 초입에 볼 수 있는데, 지붕이 있는 동굴로서 당나라시대에 조성되었다.
북위시대 최초의 동굴 ‘빈양중동’
잠계사를 지나면 또 하나의 큰 동굴을 볼 수 있는데, 빈양중동이라는 동굴이 있다. 자료에 따르면 북위시대(386~512)의 대표적 동굴이라 한다. 약 24년에 걸쳐 조성되었다고 하는 이 동굴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그 모습이 온유하고 돈후한 느낌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초입에 볼 수 있는 이 동굴을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감상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빈양중동의 석가모니상
북위시대(386~512)조성되었는데, 용문석굴의 초입에 있다.
측천무후의 이미지를
용문석굴은 북위시대 부터 당나라시대까지 약 400여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동굴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과 전설이 동굴마다 담겨져 있는데, 그 중에 당나라시대의 측천무후에 관한 것도 있다.
측천무후가 자신의 이미지를 미륵보살로 표현하였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측천무후가 실각하면서 그런 작업은 중단되었는데, 지금까지 중단된 채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이를 당대 마애삼불감이라 부른다.
당대 마애삼불감
미륵보살이미지를 당대 측천무후를 닮게 만들었다고 한다. 짓다가 중단된채라 한다.
손때 묻은 불상
초입부터 동굴을 죽 둘러보니 큰 동굴도 있고, 작은 동굴도 있고, 동굴이라고 볼수 없는 큰 홈처럼 패인 것도 있다. 어느경우는 불상이 있는 것도 있고, 불상이 없는 것도 있고, 불상이 있긴 있되 머리부분이 파손된 것도 있어서 매우 다양하다.
손때 묻은 불상
동굴이 아니라 커다란 홈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조성하였는데, 사람들이 만져서 돌이 반들반들하다.
두상이 파손된 불상
머리부분이 파손된 불상이 허다하다.
텅빈 동굴
동굴안이 텅비어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봉선사의 왼쪽 방향의 동굴이 심하다.
바위전체가 예술작품
초입에서 봉선사까지 볼 만한 것이 많은데, 그 중에 유심히 본 것 중의 하나가 조각품이다. 용문석굴에는 석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위에 새겨진 탑, 연꽃무뉘등 각종 예술작품을 볼 수 있다.
바위에 새겨진 3층탑
탑속에 또 탑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바위에 새겨진 크고 작은 불상
아주 작은 불상이 바위의 한 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연화동 입구의 문양
마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바위에 섬세하게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만불전’을 보는 것
용문석굴 초입에서 봉선사까지 볼거리가 많은데, 가장 큰 볼거리는 역시 큰 동굴일 것이다. 그런 동굴은 모두 명칭이 붙어 있는데, 만불동과 연화동도 거기에 포함된다.
만불동은 만분의 부처님을 모셨다고 해서 만불동이라고 한다. 당나라시대에 만들어진 이 동굴의 불상은 실제로 15000부처님이라 한다. 주먹보다 작은 불상들이 벽면 가득히 빼곡히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 사찰에서 천불전이나 만불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만불동
당나라시대에 조성되었고, 작은 불상이 벽면 가득히 빼곡하게 조성되어 있어서 그 숫자가 15000부처님이라 한다.
아름다운 연꽃동굴 ‘연화동’
또 하나 인상적인 동굴이 연화동이다. 이름 그대로 연꽃문양으로 된 아름다운 동굴이다. 북위시대에 조성된 동굴로서 동굴의 깊이가 약 10m에 이르는 긴 동굴이고, 천정에 연꽃 문양이 조성되어 있다.
연화동
북위시대 동굴로서 천정에 아름다운 연꽃 문양이 조성되어 있다.
봉선사 대불은 어떤 모습일까
이렇게 초입에서 부터 볼거리를 찾아 걸어가다 보니 드디어 하이라이트인 봉선사 입구에 도착 하였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봉선사의 대불이 용문석굴의 90%를 차지 한다고 한다. 봉선사 대불이 없다면 용문석굴은 그저 그렇고 그런 일반적인 석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한다. 봉선사 대불이 있기 때문에 용문석굴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초입부터 보아온 석굴들은 경기로 치자면 ‘오픈게임’ 내지 ‘몸풀’기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봉선사 대불은 어떤 모습일까. 낙양시내의 도처에서 보았고, 교과서나 자료로만 보았던 낙양의 상징이자, 용문석굴의 거의 모든 것이라 불리우는 대불을 볼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봉선사로 올라가는 계단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용문석굴을 대표하는 대불을 볼 수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자 사진으로만 보던 대불이 나타났다. 이를 ‘노사나불’이라 한다. 노사나불은 법신, 보신, 응신 가운데 ‘보신불’을 말한다.
거대한 불상의 상호는 원만하고 약간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당나라 시대에 조성 되었다는 봉선사 대불은 높이가 약 17m로서 우아하고 살아 생동하는 모습이다.
봉선사 대불(노사나불)
당나라시대에 조성된 높이 17m의 아름다운 불상이다.
봉선사 대불(노사나불)
측천무후를 형상화 했다는 설도 있다.
2제자, 2보살, 2천왕, 2역사
그런데 봉선사 대불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대불 주위의 조상 또한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조각 되어 있었다.
불상을 중심으로 좌측에 4위, 우측에 4위가 조성되어 있어서 대불을 보좌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손된 것도 많아 원형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자료에 따르면 2제자, 2보살, 2천왕, 2역사라고 한다.
우측의 역사와 천왕상 2위
대불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우측에 있다.
부처님을 호위하는 역사와 천왕상으로서 얼굴부분이 파손되어 형체를 알 수 없다.
우측의 보살상과 제자상
대불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우측에 있다.
대불 바로 오른편에 제자(아난)와 보살(보현)상이 서 있다. 얼굴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것이 특징이다.
좌측의 4위
대불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좌측에 있다.
좌측 끝에서 부터 역사, 천왕, 보살(문수), 제자(가섭)상이 차례로 서 있다. 제자상은 심하게 파손 되어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예술의 걸작, 문수보살상
총 8위의 상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좌측의 보살상’이었다. 섬세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예술의 걸작이라 한다. 파손없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 되어 있는데,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자료에 따르면 ‘문수보살’이라 한다. 그리고 우측은 보현보살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있는 하체 부위가 손자국으로 인하여 변색이 되어 있을 정도이다.
좌측보살상
대불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좌측에 있다. 문수보살로서 삼세하고 아름다운 걸작이라 일컬어 진다.
젊은 이미지의 아난존자상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우측의 제자상이다.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모습이 당나라시대의 승려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 또한 매우 중국적인 이미지이다. 자료에 따르면 ‘아난존자’상이라고 한다. 대불의 왼쪽은 가섭존자(얼굴파손)이다. 아난존자는 가섭존자보다 젊게 표현되었다고 한다.
아난존자
대불의 오른쪽에 있고 젊은 이미지이다.
악귀를 밟고 있는 다문천왕
대체적으로 역사상이나 천왕상은 부리부리한 눈에 무서운 이미지이다. 특히 끝에서 두번째의 천왕은 다문천왕으로서 발 아래에 악귀를 밟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반대편의 천왕은 증장천왕이라 한다.
다문천왕
악귀를 밝고 있다.
왜 만들게 되었을까
용문석굴은 왜 만들게 되었을까. 용문석굴은 북위시대부터 조성되었다. 중국역사에 있어서 위진남북조시대에 해당한다. 그런 북위는 한족이 아닌 북방유목민족인 ‘선비족’이다.
선비족 탁발규가 중원을 정복한 후 수도를 평성(대동)으로 옮겼는데, 그는 불교를 널리 장려 하여 불교가 크게 융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북위 효문제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고 나서 부터 용문석굴이 조성되기 시작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한족이 아닌 북방유목민족출신의 왕조로 부터 개착된 석굴은 당나라시대에 이르기 까지 400여년간 계속 되었는데, 특히 당나라 시대 측천무후시대에 이르러 봉선사 대불이 조성되기에 이른다. 일설에 따르면 봉선사의 대불은 그 때 당시 최고의 실력자인 측천무후를 표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용문석굴은 ‘신심으로’ 때로는 ‘정치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역대 유력군주들이 만들었는데,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불교유적지일 뿐만아니라 유네스코에 등재됨으로서 전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되었다.
용문석굴 봉선사동 전경
시공을 뛰어 넘어
용문석굴은 감숙성의 돈황막고굴, 산서의 대동 운강석굴과 더불어 중국의 3대석굴이라 한다. 그런 석굴을 실제로 접하였는데, 역사나 천왕의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묘사, 그리고 보살상의 자애로운 모습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을 느꼇다. 1500년이라는 시공을 뛰어 넘어 마주 대하는 예술품을 대하는 감동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용문석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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