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졸고 있음 경’과 짜빨라경(Capala sutta), 왜 고유명사로 불러야 하나

담마다사 이병욱 2011. 6. 30. 11:47

 

 

‘졸고 있음 경 짜빨라경(Capala sutta), 왜 고유명사로 불러야 하나

 

 

  

다르마(Dharma) 대신 담마(Dhamma)

 

대승불교의 교리를 널리 알린다는 어느 재가법사에 대한 글 (“한국불교에 새로운 흐름 만들겠다” 불교신행모임 ‘法林’ 7월 7 출범) 을 읽었다.

 

그 법사는 금강경과 유마경을 기본으로 하여 강의한다는데, 단체이름을 진리의 모임(담마 커뮤니티)이라 하였다. 그런데 모임의 이름에 담마(Dhamma)’라는 용어가 들어 간 것이 이채롭다. 대체로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다르마(Dharma)’라고 말하지 담마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담마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까.

 

요새는 담마라는 용어가 보편화 된 것 같다. 법륜스님도 즉문즉설과 같은 강좌에서 담마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최근 몇 년사이에 불교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큰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는 니까야등으로 대표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그 만큼 확산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선사들을 비롯하여 아직도 초기불교의 가치를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산스크리트어 용어나 한문용어를 고집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위빠사나(vipassana)’비파사나로 부른다든지, ‘불법(佛法)의 대의(大意)’와 같은 한문투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변함이 없는데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2 50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단지 시대와 역사에 따라서 가르침의 내용이 그 시대, 그 나라에 적합하도록 번역되어 널리 읽혀지기도 하지만 근본가르침의 내용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역 아함경의 경우 빠알리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경전으로 번역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3중역 되었지만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등 근본가르침마저 바뀌지 않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가르침에 대한 내용은 변화가 없지만 지명이나 사람이름등은 한자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용어중에 빅쿠(bhikkhu)를 비구(比丘)로 한다든지, 우빠사까(upaska)를 우바새(優婆塞)로 표현하는 것은 발음이 비슷하여 어느 정도 알아듣기 쉽다. 하지만 부처님의 제자중의 하나인 꼰단냐(kondañña)를 한역하여 교진여(憍陳如)라고 하였을 경우 전혀 다른 이름처럼 보인다.

 

또 한가지 예로 한자어로 의역(意譯)’하는 경우이다. 흔히 전륜성왕이라 불리우는 마우리아 왕조 3대황제인 아소까(asoka)’무우왕(無憂王)’으로 부르는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빠알리어 아소까는 슬프다라는 뜻의 소까(soka)에 부정접두어 a가 붙어서 근심이 없다또는 슬픔이 없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를 의역하여 한자어로 무우왕이라 하였는데, 이를 다시 우리말로 해석하면 근심이 없는 왕이 될 것이다.

 

순녀(順女)’온순한 여자

 

이런 현상에 대하여 일아스님은 자신의 저서 아소까에서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이름을 문자적으로 풀어서 번역하는 것은 마치 순녀(順女)’라는 이름을 온순한 여자라고 풀어서 부르는 것과 같다.

(일아스님의 아소까에서)

 

 

순녀온순한 여자는 단지 문자적의미로만 본다면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순녀라는 말 대신 온순한 여자!”라고 이름을 불렀을 때 되돌아 볼 수 있을까. 아소까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아소까라고 말하면 이는 세계적인 공통어이기 때문에 모두 알아 듣지만, 이를 무우왕이라고 불렀을 때 단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아스님은 빠알리 경전상의 고유명사들을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여 부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한자어나 한국어로 번역하여 부를경우 이는 글로벌해가는 시대에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결과가 될 것이라 한다. 이런 예는 수 없이 많이 보인다. ‘디가 니까야장부경전이라 하고, ‘맛지마 니까야중부경전으로 부르는 것등은 오로지 한국의 불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라는 것이다.

 

숫따니빠따를 굳이 경집(經集)’이라는 한자용어로 부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법구경처럼 거의 고유명사화한 것은 굳이 담마빠다라고 고집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지명이나 이름에 대하여 고유명사로 붙여 주는 원칙에 따른다면 세계적 공용어인 담마빠다로 불러주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자어 불법(佛法)’이라는 말이 요즘에는 담마(Dhamma)’라는 말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듯이 법구경도 담마빠다로 불려지는 날이 있지 않을까.

 

재미있는 경의 제목

 

우리나라는 1999년 전재성박사가 상윳따니까야를 완역함으로서 이후 맛지마니까야, 디가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등 4부니까야의 번역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경전을 모두 구입하려면 큰 비용이 발생하여 보통불자들이 사보기에 매우 부담스러운 가격이 되었다. 그래서 일부 니까야의 경우 가려뽑은경을 모아서 한권으로 내어 놓은 경우도 있다. 그런 책중의 하나가 가려뽑은 앙굿따라니까야이다.

 

그런데 경의 제목이 매우 재미있게되어 있다. ‘항아리경’ ‘소금덩이경’ ‘졸고 있음경’과 같이 순수한 우리말로 의역된 경의 이름을 보면 매우 소박하고 때로는 정겨워 보였지만, 한편으로 약간 성의가 없는 듯이보이기도 하였다. 마치 엿장수 마음대로경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처럼 재미있는 경의 이름에 대한 빠알리어 이름은 무엇일까.

 

‘항아리경’ ‘소금덩이경’ ‘졸고 있음경’

 

항아리경의 경우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아와꿋자경(Avakujja sutta, A3:30)’으로 되어 있다. ‘소금덩이경의 경우 로나팔라경(Lonaphala Sutta, AN 3.99  PTS: A i 249)’인데, 영어제목은 따닛사로 비구(Thanissaro Bhikkhu)가 번역한 것을 보면 ‘The Salt Crystal’로 되어 있다. 여기서 Crystal결정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소금덩이경이라고 불렀을 것이라 추측된다.

 

졸고 있음 경이라는 흥미있는 이름을 가진 경의 원어는 무엇일까. 이는 빠알리어로 짜빨라경(Capala sutta, AN 7.58 , PTS: A iv 85)’ 또는 빠짤라경(Pacala sutta)’임을 알 수 있었다. 이의 영문이름은 ‘Nodding’이다. 노딩을 인터넷영어사전을 참조하여 보니 nod끄덕이다어서 nodding은 현재진행형으로 되어 끄덕거림또는 졸고있음이라는 뜻이 된다.

 

 

 

 

 

 

 

사진: http://www.diytrade.com/china/4/products/3967890/solar_nodding_nohohon.html

 

 

 

이처럼 순수우리말로 된 경의 이름에 대한 원어를 검색하여 보니 대부분 영문으로 번역된 영문이름에서 유래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항아리경, 소금덩이경, 졸고있음경 모두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임에 틀림 없지만 이는 우리나라에만 통용되는 말이다. 또 순녀를 순한여자로 풀이하여 부르듯이 경의 이름 또한 풀이하여 불렀는데, 공교롭게도 영문판에서 볼 수 있는 ‘The Salt Crystal’ ‘Nodding’소금덩이경  졸고 있음경으로 번역된 것은 우연의 일치라 볼 수 있을까.

 

고유명사는 원어로 불러 주어야

 

글로벌시대에 우리것을 지키고 보존 하는 로컬라이즈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것에 한한다. 외국인들이 판소리이라는 용어를 굳이 영어로 의역하여 사용하기 보다 그냥 판소리라고 부르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처럼 지명이나 이름등은 특정한 사물이나 다른 것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교유의 기호를 붙인 이름이다. 이는 문법적으로 명사의 하나이어서 영어에서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쓴다고 인터넷사전에 표현되어 있다. 또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해나 달은 다른 것과 구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고유명사에 속하지 않지만, 홍길동과 같은 인명은 동명이인이 있는 경우라도 고유명사에 속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Lonaphala Sutta는 이 세상에 오로지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은 경이기 때문에 소금덩이경이라고 하기 보다 고유의 원래 이름을 붙여서 주어서 로나팔라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Capala sutta 역시 졸고 있음경이라고 부르기 보다 원어 그대로 짜빨라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굳이 소금덩이경이나  졸고 있음경과 같은 이름을 써야 한다면 원어 다음에 괄호로 표시하면 될 것이다. , 로나팔라경(Lonaphala Sutta, 소금덩이경), 짜빨라경(Capala sutta, 졸고 있음경)과 같이 표시하는 것이다.

 

  

 

2011-06-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