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탁발승과 탁발정신

담마다사 이병욱 2011. 7. 1. 11:36

 

 

탁발승과 탁발정신

 

 

 

 

식당을 찾아서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사무실을 나와 식당이 있는 곳으로 향하지만 어느 집에 가서 먹어야 될지 고민스러운 경우가 많이 있다.

 

저 집의 경우 맛이 있기는 한데 내 놓은 반찬을 또 내 놓는 것 같아서 피하게 되고, 저 건너편의 집은 맛도 좋고 청결한데 가격이 비싸서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중국집에 가서 간단히 먹자니 점심만큼은 제대로 먹어야 된다라는 원칙에 어긋나는 것 같아 피하게 된다.

 

그래서 먹을 곳을 찾아 삼만리식으로 주변을 배회하다 보니 큰 도로 건너편에 있는 매운탕집까지 가게 되었다. 그집은 매운탕 뿐만 아니라 매일 메뉴가 바뀌는 가정식 백반도 겸하고 있었다.

 

점심에 사람들이 몰려 드는 것으로 보아 맛은 인정받은 듯 하다. 가격 또한 요즘과 같은 고물가시대에 적합하였다. 더구나 내 놓은 반찬을 보니 먹다 남은 것을 다시 내 놓은 것 같지 않아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자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보다 늦게 도착하여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데, 입구에서 목탁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승려들의 탁발행각은 수도권 도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주로 식당가를 돌아다니는 승려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그들의 행태를 보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조계종단과 같은 경우 공식적으로 탁발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조계종의 승려는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삭발하고 승복을 걸친 그들을 보면 누가 보아도 스님이라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 없다. 이처럼 탁발에 의존하여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종단에 기부하는 스님들도 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최근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 따르면 서울의 모 주지스님이 입적하기 전에 써 놓은 유언장대로 스님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이 조계종단에 귀속되었다고 보도 하였다. 이는 조계종에서 지난해 1월 추진하였던 승려 사후 개인명의 재산의 종단 출연에 관한 령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라고 한다.

 

스님의 재산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스님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재산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 재산형성과정에 대한 것을 기사에서는 모연된 보시금으로 규정하였다. ‘모연이란 무슨뜻일까. 인터넷국어사전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네이버의 불교에 대한 인식

 

모연(募捐)이란  어떤 일을 하기에 돈이나 물건을 모음을 말한다. 그런데 또다른 모연(募緣)이란 단어에 대한 설명을 보면 중이 시주에게 돈이나 물건을 기부하게 하여 좋은 인연을 맺게 함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다음(Daum)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인터넷사전에서의 설명문이다.

 

이처럼 다음은 불교의 스님들을 비하하여 이라고 사용하였는데, 이는 인터넷사전의 도처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반면 네이버(Naver)사이트의 국어사전을 보면 승려가 시주에게 돈이나 물건을 기부하게 하여 좋은 인연을 맺게 함.”으로 되어 있어서 이라고 표현한 다음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마도 이런 차이가 부처님오신날 첫 화면 배너에 연꽃이미지 실렸던 것과 실리지 않았던  것의 차이의 연장선이라 보여진다.

 

참고로 다음의 경우 2009년과 2010년 부처님오신날 당일 첫화면배너에 연꽃이미지를 내 보내지 않았다. 그 이전은 조사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역시 실리지 않았음에 틀림 없다. 반면 네이버의 경우 해마다 거르지 않고 연꽃 이미지를 실어 주었다.

 

그러고 보면 인터넷 국어사전에서 이라 사용하는 다음과 승려라고 표현해주는 네이버를 보면, 두 사이트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 같다.

 

노후불안에 시달리는 스님들

 

한국적 실정에서 탁발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승려가 있는가 하면 모연된 보시금으로 살아가는  스님도 있어서 한국불교에 있어서 승가사회의 양극을 보는 것 같다.

 

물론 탁발에 의존하여 마치 걸인처럼 살아가는 자들은 사이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불교와 불자들의 위의를 손상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을 제외한다고 쳐도 승가사회의 빈부격차는 있어 보인다.

 

불교신문 (2463/ 2008 101일자)에 따르면 스님들 중 65.4%가 노후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불교미래사회연구소(소장 법안스님)에 따르면 560명의 스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이 중 65.4%가 노후불안에 시달리고 있고, 이 가운데 23.8%는 매우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하였다.

 

이런 노후불안은 많은 문제점을 만들어 내었는데, 미래가 불투명함으로 인하여 수행에 전념하기 어렵고(29.8%), 그에 따라 개인재산축적(26.1%)과 사설사암증가(14.1%)로 이이어지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배신행위

 

스님들이 개인재산을 축적한다거나 노후보장용 사설사암을 만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현실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니까야에서 사꺄의 아들들인 사문은 금과 은을 갖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아 놓았지만, 단지 노후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개인재산을 축적하고나 사설사암을 만드는 행태는 부처님과 불자들에 대한 배신행위나 다름 없다.

 

만일 스님들이 재산을 축적하여 평생먹고 살 걱정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면 재가자들이 굳이 스님들에게 공양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재가자는 출가자들에게 공양을 함으로서 공덕을 짓는다고 하는데, 스님들이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원천봉쇄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가 중흥하려면

 

가장 바람직한 출가와 재가의 관계는 상호보시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전형이 아마도 탁발일 것이다.

 

무소유와 청정함으로 살아가는 출가자는 탁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재가자는 출가자에게 음식거처의약품과 같은 네 가지 필수품을 보시함으로서 공덕을 쌓게 된다.

 

출가자는 자신의 무소유와 청정함을 보여주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줌으로서 역시 공덕을 쌓게 된다. 이렇게 출가자와 재가자가 모두 공덕을 쌓게 하는 첫 출발점이 아마도 탁발일 것이다. 그래서 어느 법우님은 한국불교가 중흥하려면 탁발정신을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글을 남겼다.

 

하지만 승려가 재산을 축적하여 재가자들의 도움 없이도 생존해 갈 수 있다면, 그것도 늙어 죽을 때까지 도움이 필요없다면  출가자와 재가자와의 관계는 단절 되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열심히 재산축적을 하여 재가자의 도움없이도, 재가자에게 공덕을 쌓을 기회도 주지 않고 산중에서 살아가는 스님들 뿐이라면 불교는 점차 쇠퇴해 갈 것이다. 그런 조짐은 이미 도시에서 나타나고 있다.

 

도시에서 교회는

 

도시에서 교회는 주민을 상대로 봉사경쟁을 하고 있는데, 이는 산중에 있는 사찰들과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유치원이나 청소년 공부방을 만들어 봉사하는 것을 넘어 이제 65세 이상 어르신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 노인들에게 점심을 제공하고 경로대학을 만드는가 하면 미용봉사도 해주고 있어서 교회끼리 경쟁이 붙은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시에서 교회가 주민을 위하여 좋은 이미지를 계속심어 주고 있을 때, 불교는 거꾸로 좋지 않은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찰이 늘어나는 것은 고사하고 사이비로 추정되는 탁발승이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며 마치 걸인처럼 구걸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본 그 탁발승도 그랬다.

 

다짜고짜 목탁부터

 

탁발승은 아무 허락도 없이 들어와 목탁부터 치기 시작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 사무실 문을 노크할 때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결코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다. 또 그들은 최대한 잘 차려입은 복장으로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호감을 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탁발승은 그런 예의는 찾아 볼 수 없다. 다짜고짜 밀고 들어 온 것 처럼 목탁부터 치기 시작하니까 식당집 주인은 군말 없이 1000원짜리 한장을 쥐어 준다. 만일 나가라고 소리지르면 소란이 벌어질 수 있어서 고객관리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목탁소리와 함께 반야심경을 모두 낭송한 탁발승은 나갔다. 이때 식당에서 식사하던 손님들은 한 마디씩 한다. 저 스님이 진짠인지 가짜인지 논쟁이 붙고 어느 식당에서 저런 경우를 보았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다.

 

탁발승을 통해서 불교를?

 

서울과 수도권은 불교세가 매우 약한 곳이다. 개신교에 비하여 교세가 훨씬 못미치고, 천주교와 비슷한 교세를 형성하고 있다. 더구나 도시에서 사찰구경하기가 힘들어 사람들은 불교를 접할 기회도 없고, 또 불교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 그들이 불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아이러니 하게도 탁발승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교가 긍정적인 종교가 아니라 부정적인 종교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탁발승이 식당에 들어섰을 때 이를 좋아하는 주인은 없을 것이다. 영업을 방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조용히 수습하려고 한다. 그래서 군말 없이 돈을 주어서 보내는 데 바로 이런 것 때문에 탁발승이 기승을 부리는 지 모르겠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어느 가게든지 밀고 들어가 목탁을 쳤을 때 돈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면 도시의 전 가게를 순례하게 될 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불교의 이미지는 점차로 나빠질 것이고, 이는 불교에 대한 부정적이미지의 확산과 동시에 기피의 대상으로 인식될 것임에 틀림없다.

 

종단이 아무리 서울과 수도권포교의 활성화를 내세워 절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전 가게를 휘젓고 돌아다니는 탁발승이 있는 한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더욱 비관적인 것은 승려들의 재산축적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탁발승이 더

 

승려들이 재산을 축적하게 되어 평생먹고 살 정도가 되면 재가자에게 의지 하지 않아도 되고 탁발정신 또한 남의 이야기나 다름 없을 것이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 스님인 것처럼 보이지만 세속인들의 삶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재가자들 역시 돈 많은 스님들을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탁발에 의지하여 삶을 꾸려 가는 사이비승이나 재산축적을 하여 마치 재가자와 같은 삶을 꾸려 가는 승려들 역시 같은 처지라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차라리 탁발에 의지 하여 생을 꾸려 가는 사이비승이 더 나아 보이기 까지 한다.

 

어느 법우님의 글에서

 

부처님도 탁발을 하였다. 이는 재산을 축적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선언이다. 부처님이 몸소 탁발을 함으로서 모범을 보이신 것은 제자들의 해탈열반을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어느 법우님이 올려 놓은 신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얼마전 승적을 버리고 개종한 스님의 소식을 접하며 비탄한 마음 금할바 없습니다.불교계의 문제로 떠오르는 사문의 노후생활에 관한 문제인데 타종교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발전해 왔는데 비해 불교에서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 사문들 가운데 문제로 지적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종말에 개종하는 사람도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이 대목에서 노후의 생활에 관해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노후의 안정적인 생활 이라는것이 세속의 사람들의 그것과 출가사문의 그것이 같다면 출가사문이라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출가 사문의 노후란?......? 밥세끼 먹지 못할까봐 아니면 노인성질환으로 인한 생활의 핍박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그동안의 수행이 무용지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수행하지 않은 세속의 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걱정을 하고있는 것이 보이잖습니까?

 

적어도 수행자라면 그것도 평생 승복을 입고 수행하신 출가사문이라면 죽음과 질병과 굶주림과 고통에대한 해탈의 마음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 수승한 수행자가 광화문 길거리에서 굶주려 죽어간다 고 한다면 한국의 불자들이 그대로 내버려 둘 이치가 아니지 않습니까?

 

 

법우님이 지적한 핵심내용은 어느 수행자가 굶어 죽어갈 정도로 어려운 처지라면 과연 불자들이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비록 굶어 죽을 지라도

 

굶어 죽는 것이 두려워 재산축적을 하고, 노후를 대비하여 사설사암을 만드는 행위를 보았을 때 어느 불자도 보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공덕이 되는 보시는 받는 자가 청정하였을 때라고 하였다. 그런데 받는 자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계를 어기며 더구나 청정하지도 않다면 그런 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최악의 보시라고 하였다. 이럴 경우 비록 사이비처럼 보이지만 거리의 탁발승에게 아무 댓가를 바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집을 떠나 수행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노후걱정을 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당연히 재산축적을 해서도 안된다. 또 노후대책용으로 사설사암을 가져서도 안된다. 모두 재가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실천해 보여 줌으로서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것이다.

 

마치 벌이 향기로은 꽃 주위로 모여 들듯이 무소유와 청정함 그 자체가 가장 큰 재산이라 보여진다. 또 그 것만이 한국적 종교시장에 있어서 가장 큰 경쟁력일 것이다.

 

한 사람의 사기꾼이 출현하면 세상이 탁해지고, 한 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세사이 향내가 난다고 하였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비록 굶어 죽을 지라도 수행자의 자세를 보여 주어야 한다.

 

수행하다 죽으면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수행하다 굶어 죽을 수도 있다. 설령 굶어 죽으면 어떠한가. 수행자가 수행하다 죽으면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고 어느 수행단체에서 법사는 이야기하였다.

 

고디까경(Godhika sutta, 상윳따니까야, SN IV.23)에 따르면 자결한 비구의 이야기가 나온다.

 

고디까비구가 일곱번째 심해탈을 이루고 자결하였을 때 모든 갈애가 소멸됨으르서 아라한이 되었고 동시에 완전한 열반을 이루어 다시 나고 태어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처럼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열반에 드는 것을 주석서에서는 사마시시 (samasisi)’라고 하였다.

 

사마시시는 한 번에 두가지 일이 동시에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런 사마시시는 자세의 사마시시 (iriyapatha-samasisi)’ ‘병의 사마시시 (rpoga-samasisi)’ ‘목숨의 사마시시 (jivita-samasisi)’ ‘느낌의 사마시시  이렇게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굶어 죽은 경우는 어느 사마시시에 해당될까.

 

수행자가 수행하다 굶어 죽어서 아라한이 되고 동시에 열반을 성취하였다면 이는 영광이다. 그런데 굶어 죽는 것이 두려워서 재산을 축적하고, 노후대책용으로 사설사암 갖기가 유행이라면 결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라고 볼 수 없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탁발정신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수단일 것이다.

 

테리가타(Therigatha)에서

 

초기경전에서 탁발정신을 강조라는 대목이 있다. 테리가타(Therigatha)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들은 재물을 창고나, 단지나, 바구니에 저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3)

 

그들은 동전이나 금과 은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탁발한 것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4)

 

(테리가타, 로히니 비구니,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2011-07-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