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조손(祖孫)가정’의 아이와 같은 불자(佛子)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1. 7. 3. 10:43

 

 

조손(祖孫)가정의 아이와 같은 불자(佛子)

 

 

 

언젠가 일하지 않는 즐거움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북미에서 베스트셀러이었다는 그 책의 저자는 너무 일에 매달리지 말고, 여가시간을 잘 활용하자는 취지에서 책을 썼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그런 여가활용에 있어서 글쓰기도 들어가 있었는데, 그 때 당시 글쓰기는 상상도 못하였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로 생각되었다.

 

공유할 것을 생각하면

 

그런데 개인적인 환경의 변화와 인터넷시대를 맞이 하여 글쓰기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제 글쓰기가 생활화된 시점에서 글쓰기는 하나의 커다란 즐거움이 되었는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하얀 여백을 한 줄 한  줄 채워나가도 보면 희열을 만끽한다.

 

이렇게 완성된 글을 이름 모를법우님들과 공유할 것을 생각하면 그 기쁨은 배가 된다.

 

글쓰기에 있어서 또 하나 즐거움은 글을 올리고 난 다음 법우님들의 반응이다. 열성적인 법우님들의 경우 반드시 매일 빠짐없이 추천을 눌러 주신다. 이때 가장 힘을 받는다. 거기에다 글까지 남겨 주시면 뿌듯함을 느낀다.

 

더구나 눈으로만 보다가 처음으로 글을 올려 주신 법우님들의 글을 보면 소박하기 그지 없다. 주로 감사하다는 칭찬의 글이 주류이다.

 

목숨을 걸고

 

하지만 다 칭찬이나 격려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깍아내리려 하거나, 시험하려 하거나, 폄하하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재가불자가 그것도 별 볼일 없는 자영업자가 글을 쓰는 행위가 못 마땅해서 일 것이다. 그런 경우 대게 가소롭게 또는 같잖게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

 

인터넷 인구가 수천만명이 되다보니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 그 중에 취중(醉中)’에 인터넷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신에 문제가 있는 자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부터 위협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글쓰는 행위는 목숨을 걸고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겨진다.

 

누구든지 넘나드는

 

인터넷에는 국경이 없다. 중국과 같이 일부 사이트를 접근금지시키지 않는 한 누구든지 넘나들 수 있는 것이 인터넷의 특징이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 뿐만아니라 타종교인도 다수 들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로 그들이 남긴 글을 보았을 때 알 수 있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들어 오는 타종교인들이 보는 글은 주로 불교관련내용일 것이다. 블로그가 불교관련콘텐츠를 다루다 보니 불교관련 내용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타종교인은 콘텐츠 중에 불교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다운하여 듣고 있다고 글을 남겨 놓은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블로그도 하나의 훌륭한 포교수단이라 생각한다. 주로 초기불교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위주로 콘텐츠가 실려 있지만 이를 접한 타종교인일지라도 공감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전파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이버공간에서조차 비공개라니

 

사실 블로그에 글쓰는 행위는 출가수행자나 불교관련 교수, 언론인등이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적극적으로 그것도 매일 장문의 불교관련글을 올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매일 글을 쓰다보니 최근 수년간 불교관련 주요 인터넷신문을 매일 스캔하고, 수 많은 검색을 하게 되는데,  출가자나 불교엘리트들의 블로그를 접할 수 없었다.

 

설령 블로그가 개설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어쩌다 시간이 남으면 글을 몇 개 올려 놓은 경우가 고작이고, 심지어 일부 출가자의 블로그는 비공개로 되어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도 부지기수이다. 이처럼 사이버공간에서조차 부처님의 가르침이 비공개로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현실공간에서 특히 사람이 몰려 사는 도시에서 불교는 없는 것과 같다. 보이는 것은 교회뿐이고, 더구나 교회끼리 주민들을 대상으로 봉사경쟁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사이버공간에서조차 비공개라니 과연 누구를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인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도시의 불자들은 조손가정과 다름없어 보인다.

 

조손가정이란?

 

주말 TV를 보다 보면 불우한 환경에 놓인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에 대한 프로를 볼 수 있다. 인기가수가 이들을 찾아 불우하고 열악한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돌보아 주고 위로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일부는 눈물까지 흘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처럼 부모 없이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가정을 조손(祖孫)가정이라고 한다.

 

 

 

 

 

 

 

사진 http://medwon.egloos.com/2340956

 

 

 

 

조손가정의 특징은 부모가 모두 가출해 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업실패나 이혼등 갖가지 사연으로 인하여 부모가 모두 집을 나가 버렸을 경우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은 모두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몫이 되고만다.

 

늙고 병든 할머니가 나이 어린 손자를 가난한 환경에서 키우는 것을 보면 절로 눈물이 나는데, 이런 장면을 너무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요즘은 잘 보지 않는다. 하지만 종종 보게 되는 조손가정을 보면서 불교의 현실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출과 출가

 

도시에서 불교가 실종되고, 산에나 가야 불교를 볼 수 있는 현실, 그리고 출가자는 모두 산에서만 살고, 그것도 평생산다고 하였을 때 도시에 남겨진 불자는 조손가정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은 가출하여 조손가정이 되고, 또 한편은 출가하여 되돌아 오지 않아 조손불교가 된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한 번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출가수행자가 있는 한 한국불교의 불자들은 부모없이 헤메이며 처참한 환경에서 불행하게 자라는 조손가정의 아이들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할까.

 

조손가정의 경우 집나간 부모가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죽지 못해 삶을 이어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의하여 열악한 환경속에서 양육되는 아이처럼 한국의 불자들은 악조건에 빠져 있다. 누구도 돌 보아 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불교를 공부해야 한다.

 

소통을 거부한 결과

 

도시의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갈망과 갈증이 있지만 현실공간은 물론가상공간에서조차 욕구를 채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절이 산중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출가수행자들의 블로그는 비공개로 되어 있어 불자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이와같이 출가한 수행자들이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한 결과 현실공간은 물론 사이버공간에서조차 불교다운 불교를 접하기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없어서일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싶다.

 

세상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불교는 지혜자비의 종교라고 하였다. 깨달음을 얻어 지혜가 생기면 당연히 자비의 마음이 일어나기 마련이라서 지혜와 자비는 항상 함께 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도 위없는 바른 깨달음(sammā-sambodhi, 正等覺)’을 얻고 난후 제자들이 생겨나자 교단으로서 틀을 갖추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세상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떠나라.

(상윳따 니까야:4마라 쌍윳따1:5, 율장 마하왁가 1)

 

 

여기서 키워드는 자비심이다. 전도는 자비심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깨달은 자만이 중생구제의 자비심을 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는 유일신교의 전도사들이 예천불지를 부르짓는 심정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유일신교 전도사들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는데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불쌍해 보여서 전도한다고 한다. 설령 그들의 믿음이 삿된것일지라도 불쌍하게 보이는 마음 때문에 길거리에서, 전철에서, 시장바닥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예천불지를 부르짓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중생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전도선언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삼매의 즐거움에만 빠져 있었다면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한 마디로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이었다. 그래서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고 싶어서 전도선언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일 부처님 자신 혼자만이 삼매의 즐거움에 빠져 있었다면 전도선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깨닫고 보니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속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 때문에 도무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상사람들이 불쌍해 보였음에 틀림없다.자신만 고통에서 부터 해방되어 더 이상 고통을 받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욕구가 발동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뿐나비구(뿐나경-Punna sutta) 같은 경우 목숨을 걸고 전도하였다.

 

조손가정의 아이와 같은 불자들에게

 

결국 중생에 대한 연민이나 자비심이 없다면 결코 세상속으로 나올 일이 없을 것이라 보여진다. 이는 역설적으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생에 대한 연민이나 자비심이 없을 것이라고 추론 할 수도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여 깨달았다면 당장 도시로 나와 자비심을 베풀어야 한다. 그래서 부모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사는 조손가정의 아이와 같은 불자들에게 자비와 연민을 보내 달라는 것이다.

 

 

2011-07-03

진흙속의연꽃